지하철 소녀 쟈지
레몽 크노 지음, 정혜용 옮김/도마뱀출판사

 상투적이지만 소설을 두 가지로 구분해봅시다. 입담이 좋은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신나게 떠벌인다는 인상을 받는 소설과 그렇지 않은 소설. <지하철 소녀 쟈지>는 전자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유쾌합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일상 이야기로서, 작가의 입담은 이 소설을 독자가 즐겁게 읽는 데에 크게 기여합니다. 어떤 식이냐 하면, 이건 일단 문장을 봐야 금방 이해되는 문제니까 잠깐 소개해보죠.

 "어디 한 번 더 말해보시지." 가브리엘이 말했다.
 자그마한 사내는 덩치의 말대꾸에 찔끔하면서도 공을 들여 대꾸할 말을 가다듬었다.
 "뭘 말해보라는 거야?"
 자그마한 사내는 자신의 말대꾸가 제법 맘에 들었다. 다만 한 어깨 하는 인간에게서는 물러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덩치는 몸을 가까이 기울이더니 칠 음절짜리 문장 하나를 내뱉었다.
 "좀저네지꺼린말······."
 자그마한 사내는 점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말방패를, 뭔가 옹골찬 말의 방패를 벼려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가 맨 처음 생각해낸 것은 높임법으로의 급작스러운 전환이었다.
 "우선, 선생, 말 놓으셔도 된다고 한 적 없는데요."
 "한심하기는." 가브리엘이 간단하게 대꾸해치웠다.
<지하철 소녀 쟈지>, pp. 11-12

 말하자면, 문장에 너스레가 있습니다. 문장 하나하나가 꽉 짜여졌다기보다는, 장난스러운 한 남자가 빙글거리며 말하는 내용을 듣는 기분입니다. 더불어, 레몽 크노가 이 소설의 문장을 특정한 법칙이나 짜임새에 구애되어 쓸 생각이 없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다른 부분도 잠깐 같이 살펴봅시다.


 "진실이라고!" 가브리엘이 외친다(몸짓). "자넨들 그게 뭔지 알겠어, 이 세상 그 누군들 그게 뭔지 알겠어. 이 모든 것(몸짓), 팡테옹, 앵발리드, 뢰이이의 병영, 모퉁이 카페, 이 모든 게 죄다 헛소리라고. 암, 헛소리고말고."
<지하철 소녀 쟈지>, p. 23

 (몸짓)이라고 괄호를 넣어 표현하는 방법은 소설에서 주로 쓰이는 방법이 아닙니다. 어느 쪽이냐면 희곡에서 쓰이죠. 아마 보통이라면 다음과 같이 표현했을 겁니다: "가브리엘이 몸짓과 함께 외친다"라는 등의 식으로요. 그러나 레몽 크노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았죠. 이뿐 아니라, 언어의 정합성 (뭐 말하자면 이를테면 아주 거창하게 말하자면 말입니다)을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사용하지 않을 언어 유희도 잔뜩 사용합니다. "··· 아니 투피스 정장젠장환장 한 벌은커녕 명품거품하품 블라우스 하나 없는데, 뭘 어쩌지요? ···" (p. 224) 이건 번역자 자신이 후기에서 번역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인용한 문장인데 (본래는 프랑스 어로 적혀 있었던 언어유희들을 그 원리에 맞추어 한국어로 번역한 번역자의 고충이 십분 이해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이 언어를 가지고 장난치는 (좋은 의미에서) 소설임을 잘 보여주기도 하는 문장이라 재차 인용해보았습니다. 그렇죠, 그리 진지해 보이지 않는 소설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그저 유쾌하기만한 소설이냐 하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이 쉽게쉽게 넘어갈 이야기가 아니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쟈지 (Zazie),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 소녀가 자기 가정사를 소개하는 내용을 잠깐 한 번 같이 살펴봅시다.

 "··· 그런데 아빠가 날 주물러대기 시작하네요. 그래서 난 안 돼요, 라고 말해요. 왜냐면 아빠가, 그 추잡한 인간이 결국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빤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절대로 안 돼요, 그랬더니 아빤 문 쪽으로 뛰어가서 문을 열쇠로 잠그고, 주머니에 열쇠를 집어넣더니, 꼭 영화에서처럼 눈알을 굴리면서 하, 하, 하, 하고 웃어젖히는데, 기가 막힐 노릇이었죠. 널 따먹고 말겠어, 하고 아빤 으름장을 놨어요. 널 따먹고야 말겠어, 그런 추잡한 말을 하는데, 심지어 입에 거품까지 조금 물더라고요. ···"
<지하철 소녀 쟈지>, pp. 82-83

 문장의 너스레와 언어유희 덕에 쉽게 읽히긴 하지만, 이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들이 보여주는 삶은 결코 쉽게 넘어갈만한 삶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기 딸을 강간하려 들고, 그래서 그 아내가 남편을 도끼로 내려쳐 두개골을 쩍 갈라지게 해 죽이고, 그랬지만 어쨌거나 재판에서 승소하긴 했는데, 그 도끼를 갈아준, 아내의 애인이었던 조르주 씨는 이번엔 쟈지를 은근슬쩍 넘보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 어둡게 쓰려면 한없게 어둡게 쓸 수 있는 내용이죠. 그런데 이걸 읽다 보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쟈지는 진실을 말하고 있을까?"

 그건 알 수 없습니다. 쟈지가 말한 내용은 오로지 그녀 자신에 의해서만 증거됩니다. 다른 어떤 인물도 그녀의 말에 대해 보충해서 증거하지 않아요. 믿거나 말거나, 그건 독자 마음입니다. 물론 다른 소설이라면 아마 믿었을 테지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이 소설 속의 세계에서는 딱히 그렇지 않아요. 사실 이 소설에서는 시간도 공간도 명확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세계 속의 어떤 일상사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읽다 보면 '작가가 있을 법하지 않은 내용을 있을 법하게 쓰고 있다'는 사실을 갈수록 강하게 느끼게 됩니다. 위에서도 인용했는데, 가브리엘은 이렇게 말하죠. "진실이라고! 자넨들 그게 뭔지 알겠어, 이 세상 그 누군들 그게 뭔지 알겠어. 이 모든 것(몸짓), 팡테옹, 앵발리드, 뢰이이의 병영, 모퉁이 카페, 이 모든 게 죄다 헛소리라고. 암, 헛소리고말고." 독자가 지금 읽고 있는 이 소설, <지하철 소녀 쟈지>속에 분명한 진실은 없습니다. 작가가 그려낸 세계, 그리고 헛소리가 가득할 뿐이죠.

 어쩌면 레몽 크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이것일지 모릅니다. 작중에 나오는 앵무새, 라베르뒤르가 항상 하는 이 소리를 잠깐 보죠. "나불나불. 나불나불, 네가 할 줄 아는 건 나불대는 게 전부지." 이 말은 소설 중간중간에 계속해서 나와 독자에게 상기시키며, 후반에 가서는 앵무새뿐 아니라 캐릭터들도 앵무새의 말을 인용해 서로에게 사용하기도 하는 꽤 중요한 말입니다. 자, 이 말은 과연 작중의 인물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레몽 크노 자신을 향한 자학적인 말일까요, 아니면 모든 소설가들을 향한 말일까요. (더 나아가서 인간들 전체를 향할 수도 있을까요? 하지만 전 일단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도록 하죠)

 어쨌거나 우리는 소설이란 물건 자체가 그대로 진실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거짓인 줄 잘 알지만, 이런 일도 있을법하다고 여기며 읽어나가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사실은 환상이며, (소설 내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불대는 헛소리입니다. 이게 이 소설의 유쾌한 입담과 황당한 전개를 흥미진진하게 읽어나가면서도 한편으로 독자를 씁쓸하게 만드는 원인이겠습니다. 소설 뒤에 있는 소개말 중, "언어의 판타즘과 해학적 어조로 '어느 얼간이 소설가'가 지었다 허무는 패러디적이고 바로크적인 세계"라는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짓고서 스스로 허물고 있어요. 유쾌하지만, 다 읽고 나서도 그저 유쾌할 만큼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유쾌함과 씁쓸함이 공존하죠. 독특한 소설입니다.


 덧. 제목에 대해 덧붙이지 않을 수 없네요. 원제는 Zazie dans le metro, 즉 '지하철의 자지'입니다. 애당초 제가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책이야?' 하고 흥미를 가지게 된 원인이긴 한데 그대로 옮겨놓으면 한국에서는 차마 쉽게 주위에 추천하기 어려운 어감을 지니는 탓에, 프랑스어 a 발음이 ㅏ와 ㅑ의 중간 발음이라는 궁색한 변명과 함께 소녀 이름을 쟈지로 표기하고 중간에 소녀를 더 끼워넣어서 <지하철 소녀 쟈지>라는 이름으로 발간되었습니다. 글쎄, 번역상의 어려움도 어려움이지만, 이 음란한 어려운 제목이 이 소설을 여태까지 한국에서 출판하기 어렵게 만든 한 원인이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수정을 제대로 못 했는지 이름 표기가 한 군데에는 그냥 자지라고 쓰여 있다거나 하는 건 우리만의 비밀.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