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슨 크루소
다니엘 디포 지음, 남명성 옮김/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로빈슨 크루소: 그는 누구인가? 중산층의 자녀로 태어나 부모님의 사업을 물려받아 편하게 살 수 있었으나 항해본능을 멈추지 못한 탓에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몇 차례 고난을 맞이하다가 끝내 결정적인 파국을 맞이해, 무인도에서 28년 하고도 두 달 그리고 19일이나 살게 되는 불운한 인물입니다. 여담입니다만 이 소설의 모티브가 된, 실제로 무인도에 갇혔다 귀환한 알렉산더 셀커크라는 남자는 4년간 갇혀 있었답니다.

 <로빈슨 크루소>에 대해서 말해보고픈 부분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우선, 무인도에 살게 되는 때에 이르기까지 서술되는 사건들이 뜻밖에 길다는 것과 무인도에서 벗어나고 나서도 제법 긴 후일담이 더 이어지며 거기서도 죽을 고비는 넘긴다는 것에 대해 말해보죠. '<로빈슨 크루소>는 무인도 서바이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나 불과해야 할 그 앞뒤가 사실은 상당히 길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이건 '무인도에서 사는 건 이 사람의 인생 전체가 아니고 인생 중 일부이다'랄지, 이 작품에서 무인도는 작가가 말하고자 하려는 것을 위해 빌려 온 도구일 뿐이라는 인상을 좀 받게 하죠. 말인즉슨, 무인도라는 도구를 통해 인간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려 했다는 소립니다.

 그렇다고는 합니다만, 그럼에도 뜻밖에 '무인도에서 살아가기 위해 물건을 찾고 만들어내 섬을 개척해가는' 과정이 상세하고 친절하게 쓰여있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자세하죠. 물론 이 소설이 서바이벌 교본도 아닌 이상에야 이걸 보고 뭘 만들어낼 수 있을 정도까지는 아니며, 특별한 생존 훈련을 받았을 리 없는 선원이 (아무리 조건이 좋은 무인도라 해도) 다른 전문가들의 힘 및 필요자원이 있어야만 만들어낼 물건들을 구비할 수는 없음을 고려해, 난파된 배로부터 상당한 양의 물건을 가져와 초기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배려해두었습니다.

 이 책의 서문 (이라고 쓰고 서평이라고 읽을 법한데)에도 적혀있듯, 이 소설의 초중반부까지는 한 인간이 야생을 개척해 나가는 재미가 매우 강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얻은 물건을 사용하고 혹은 없는 물건은 만들어내고, 섬을 탐험하고 기지를 만들죠. 이런 건 언제 봐도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소년들의 로망이죠. (그래서 사실 <로빈슨 크루소>는 거의 소년 시절에 읽게 됩니다. 완역본으로는 아니지만.) 솔직히, 잘 쓰여졌습니다. 많이 공부하고 연구했다는 티가 납니다.

 그러나 개척에는 끝이 있는 법이고, 로빈슨 크루소의 섬 개척도 안정궤도에 오르고 여유를 얻게 되면 이제 '살아남기'만으로는 긴장감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사회로부터 격리된 남자에게, 다시 사회를 부여합니다. 그는 인간의 발자국과 조우하고, 이것이 어찌된 일인지 고뇌하며, 이후 실제로 다른 인간과 만나게 됩니다. ㅡ원래 식인종이었다 로빈슨 크루소가 구해낸 후 크루소와 함께 기독교인이 된, 프라이데이죠. 여기에서부터 소설은 다른 국면을 맞이하여 '다른 인간과 살아간다는 것'과 '다른 문화의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좀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 부분에서 '개척'해야 한다거나 '계몽'해야 한다거나 '전도'해야 한다거나 하는 의식이 나오는데, 현대인이 본다면 개인에 따라 좀 거북하게 여겨질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시대의 소설은 사실상 그 시대의 가치관으로도 좀 이해해 줄 필요는 있습니다. 그래도 <로빈슨 크루소>는 꽉 막히지는 않았는데, 어쨌거나 프라이데이를 크루소 본인의 표현대로 '보잘것없는 야만인 녀석'이라고 하고 실제로 노예로 삼았으면서도, 프라이데이의 지성적이고 견실한 면을 표현하고 또한 그 역시 한 인간임을 보여줍니다. 그래도 결국 대등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노예 대 주인이 아니게 되는 데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점은 어쩔 수 없는 그 당시 인식의 한계라고 생각됩니다만.

 종교적인 색채는 아무래도 강하긴 합니다. 프라이데이를 통해 '신이 전능하다면 왜 당장 악인들을 벌하지 않고 악마를 벌하지 않으며 활개치게 놔두는가?' 라는 질문도 하게 하고, 그에 대해선 크루소를 통해 '신은 자비하므로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라고 답하게 하는데 이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예정'이죠. 아무튼 중간중간, 요소요소마다 이런 식으로 삶 사이에 기독교적 고찰이 들어갑니다. 저야 사실상 동의하는 바니 상관이야 없었지만 '기독교인 아닌 사람은 거북할지도 모르겠네.'라는 생각이 들긴 하더군요. 하지만 딱히 기독교만 그런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 믿는 사람들도 자기 종교적 깨달음을 글에 집어넣는데 이 정도야 뭐 어때 싶기도 하고요. 18세기 영국 소설임을 감안하면 더 그렇죠. 그런데 이거 굳이 내가 이렇게 변호할 필요까진 없겠다 싶기도 하고······.

 그래서, 결국, <로빈슨 크루소>를 다 읽고 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나도 이런 모험을 떠나보고 싶다······ 고 누군가는 (아니 혹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겠지만 저는 사실 아닙니다. 왜냐하면 집 떠나면 고생이니까요. ← 게다가 로빈슨 크루소는 참 모진 고생을 하는 사람이라, '이런' 모험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냥 전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습니다. 길을 찾고, 견디고, 진리를 찾고, 있는 것을 사용하고 필요한 것은 만들며, 사람과 만나게도 되고 교류하고. 어쨌거나 사람이란 모두 자신의 섬에서 살아가는 것 아닐까요······ 라고 하면 너무 폼 잡는 걸까요? 으하하.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