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그레이 (The Grey, 2012)
감독: 조 카나한
출연: 리암 니슨 외

 Once more into the fray.
 The last good fight I'll ever know.
 Live and die on this day.
 Live and die on this day

 (한 번 더 싸우자.
 마지막으로 폼 나게 싸우자.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자.
 바로 이날 살고 또 죽자.)

 이 네 줄의 시가 이 영화의 내용을 축약합니다. 싸우는 것, 다시 한번 싸우는 것, 살지 죽을지, 어쨌거나 멋지게 싸워나가자는─ 그런 영화라고 할 수 있겠군요.

 어제 보고 왔습니다. 리들리 스콧 참여에 리암 니슨 주연이라는 것 외에는 무슨 영화인지 정보가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보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감상하는 데에 특별히 다른 무언가가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같이 본 가족들은 (특히나 엔딩에서) 다소 떨떠름한 기색을 내비쳤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하긴 후반부에 이르러 주인공이 절망하면서 절대자에게 어디 기적을 보이라고 그러면 내가 믿겠다고 절규하는 부분은 다소 씁쓸했습니다만, 거기서 정말 기적이 일어나고 늑대로 개썰매 타면서 할렐루야 부르고 내려오면 그것만큼 어처구니없는 일도 없었겠죠. 뭐, 절대자에 대한 의견 문제는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영화를 지배하는 것은 혹한의 추위와 그치지 않는 눈, 그리고 지겹도록 쫓아오는 늑대들로 상징되는─ 인간이 극복할 수도 이길 수도 없는 시련들입니다. 그 점에서 재난물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재난물이라고 하면 대개 어떤 재난을 겪은 사람들이 절망하지만 어떻게든 힘을 합치고 지혜를 짜내 그 재난으로부터 헤쳐나가는 게 정석이라 할 만합니다만, 이 영화는 재난물로 광고되었음에도 사실상 '헤쳐나간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비행기 추락과 거기에서의 생존, 혹한의 추위 속에서 길을 찾고 늑대들을 피하는 이 자체는 분명히 재난물이 맞습니다만, 그를 통해 같이 가던 사람들을 그저 하나씩 잃을 뿐이라는 점이 이 영화를 간단히 재난물이라 말하기 어렵게 하죠.

 결국, 제 가족들이 했던 말마따나─ "대체 이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게 뭐야?"가 가장 먼저 나올 감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극복도 해피엔딩도 없습니다. (원래 스탭롤 후의 쿠키로 들어있었던 엔딩 후 3초간의 영상은 국내에서는 편집되어 스탭롤 앞에 붙여져, 스탭롤을 끝까지 보지 않는 사람도 그 엔딩을 볼 수 있게 된 모양입니다. 이 감상을 쓰기 전에 잠시 검색해보니 그런 말이 있더군요. 하지만 그걸 봐도 완전 해결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랄까, 그 후에는 어찌 되는 거야? 싶은 모호함은 여전히 남습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무언가 말하지만, 그게 무얼지는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글쎄요, 그게 사람마다 같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겁니다. 설령 감독이 그럴 의도로 말하지 않았다 해도, 그 부분을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였다면 그것 또한 분명한 하나의 답인 겁니다. 그러니 영화가 말하고 싶은 것이야 어쨌든 관객이 받아들이기 나름입니다.

 라고는 합니다만 이렇게 감상을 쓰는 이상 제 감상도 적어놔야겠군요. 그야 짐작하시겠습니다만, 감상 첫머리에 써둔 대로,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건 역시, 싸워나간다는 겁니다. 그게 인생이란 거죠. 영화에서 사람들은 재난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았습니다. 그 살아남은 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지도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이후 또 특별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살아남았다고 모든 게 끝난 게 아니라 계속해 살아남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버티고, 혹은 도망치고, 길을 찾아야 하죠. 그러는 와중에 허망하게 죽어갑니다. 운이 없었기 때문에, 혹은 약했기 때문에, 혹은 포기했기 때문에─ 불합리하죠. 그러나 원래 인생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그 불합리함을 그대로 끌어왔으니 영화 자체가 필연적으로 불합리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압니다. 이 모든 재난들을 버텨냈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펼쳐지지는 않으리라는 사실을요. 한 명은 결국 포기하며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이걸 이겨내고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느냐고요. 다시 기계를 돌리고, 별 볼일 있을 리 없는 삶. 뭔가 특별한 영광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주인공 또한,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고 짐작되는 중간중간의 장면들을 보아, 그리고 초반부에 자살하려다 만 것을 보아) 돌아가도 특별함이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계속해 싸우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죠. 물론 이 영화가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만. 포기하지도 않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필사적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사람들도 실로 허망하게 죽어가는지라. 하지만 어쨌든 그래도 계속해서 싸워가야 하는 거죠. 그게 인생 아니겠습니까?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보기로는요.

 그런 영화입니다. 희망도 절망도 없고, 혹은 희망도 절망도 있습니다. 취향 꽤 탈 영화랄까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