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스 이블
미네트 월터스 지음, 권성환 옮김/영림카디널

 추리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는 많은 소설들이 사실은 추리보다는 인간 그 자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입니다. 물론 이것은 추리소설만이 아니라도 다른 많은 장르문학이 그러합니다만, 장르문학으로서의 어떠한 장치에만 초점을 두지 않고 그 이야기 내에서 그려낼 수 있는 인간의 모습 자체를 살려내는 것이지요. 저 개인적으로는 그러한 장치를 어디까지나 양념이라고 보고, 그려내는 인간의 모습 자체야말로 소설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잘 살아날 수록 좋아합니다. 그리고 <폭스 이블>은 추리문학이라는 딱지를 달고 있지만 실은 인간 자체를 그려낸 소설로 훌륭하게 기능합니다.

 우선 줄거리 소개를 해보죠. 책 뒤에 있는 소개글을 그대로 옮깁니다.

 영국 도싯 지방의 작은 마을 셴스테드. 어느 날 이곳에 있는 고풍스런 장원의 안뜰에서 제임스 로키어-폭스 대령의 부인 에일사가 얇은 잠옷만 걸치고 죽은 채 발견된다. 검시관은 자연사로 결론 내렸지만, 마을에서는 남편이 범인일 거라는 소문이 나돌고 그 저택으로 괴전화들이 걸려온다.

 에일사의 죽음을 계기로, 로키어-폭스 가문의 어두운 가정사와 감춰졌던 비밀들이 차례로 드러나고, 동시에 마을에는 폭스 이블이라는 사내가 이끄는 부랑자들이 캠핑카를 몰고 들어와 마을 빈터를 무단점유한다. 대령의 골칫거리 아들인 레오와 사생활이 문란했던 딸 엘리자베스,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사생아이면서, 소문이 날까 두려워한 에일사가 멀리 입양시켰던 낸시. 그리고 의문의 사나이 폭스 이블. 거기에다 이기적이고 서로를 끊임없이 경계하는 마을 사람들. (후략)

 여러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중심이 되는 캐릭터는 제임스 로키어-폭스, 그의 손녀인 낸시 스미스, 제임스 대령의 변호사인 마크 앤커턴, 그리고 의문의 사나이 폭스 이블이며, 폭스 이블이라는 남자는 이 소설에서 일종의 열쇠 역할을 하고 있고, 그를 중심으로 후반부에서 모든 의문점이 깨끗하게 풀려나갑니다. 엉켜 있던 실타래를 깨끗하게 풀어주고 결말로 이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히 추리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단지, 추리소설이라고는 합니다만 어떻게 죽였느냐를 추리하는 소설이 아니라, 왜 죽였는지 그리고 그들의 인간관계는 어떻게 이어져 있는지를 추리하는 소설입니다. 사실 서스펜스 드라마에 가깝고, 근 55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상당한 두께를 자랑하지만 별 부담 없이 읽어 나갈 수 있지요. 문체는 전형적인 영미권 대중소설의 분위기로, 낸시와 마크의 관계에서는 어딘지 할리퀸 냄새도 납니다. 별로 강하게 나지는 않습니다만.

 사실 제가 이 소설에서 감명을 받은 것은 이 소설에서 인간을 말하는 방식이었지요. 예전 포스트에서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무엇보다 이 부분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전략) ··· 아무튼 울피는 그 여자를 막은 게 기분이 좋았다. 그녀 생김새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그 여자는 비쩍 마른데다 코끝도 뾰족했고, 눈가에선 웃을 때 생기는 주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울피의 어머니는 눈가에 웃음주름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 했다.

 - 그건 웃을 줄 모른다는 뜻이야.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영혼이 없어.

 영혼이 뭐예요?

 - 자기가 지금까지 한 좋은 행동을 모두 합한 거란다. 웃으면 그게 얼굴에 나타나게 돼. 웃음은 영혼의 음악이거든. 영혼은 이 음악을 듣지 못하면 죽는대. 그러니까 나쁜 사람들은 눈가에 웃음주름이 없는 거야.

 울피는 그 말이 사실일 거라 믿었다. 비록 울피가 다른 사람의 영혼을 평가하는 방법이라곤 그 얼굴의 주름 수를 세는 게 고작이었지만. ··· (후략)
<폭스 이블>, 187p

 언급한 예전 포스트에서도 말한 바 있습니다만 저는 중년이 되어서도 얼굴이 그저 깨끗하기만 한 사람이 결코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늙었다는 것, 추하다는 것으로 주름을 볼 것이 아니죠. 나이가 들었는데도 눈가에 주름이 하나 없는 사람은 경계 대상입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이니까요. 나쁜 사람들은 눈가에 웃음주름이 없다는 데에 절대적으로 동감합니다.

 그건 그렇고, 울피는 폭스 이블의 아들이며, 그를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울피의 어머니는 폭스 이블이 일단의 유랑자들과 함께 셴스테드로 올 때 실종되었지요. 그와 관련해, 울피가 그의 아버지에 대해 유랑자들의 반 리더격 되는 벨라라는 여자에게 말한 대목도 한 번 보시겠습니다.

 (전략) ··· 벨라는 4주 전 같이 올 사람들을 정하는 모임을 떠올려 보았다. 그 때 그 여자가 거기에 있었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폭스의 지배력이 너무 강해서 정신을 다른 데 돌릴 수가 없었다.

 - 그 사람 '아내'가 가까이 있었으면 신경을 썼을까?

 아니.

 - 폭스의 아이들이 주변에서 보였으면 신경을 썼을까?

 아니.

 폭스가 설쳐대는 게 꼴 보기 싫었음에도, 그의 강한 의지는 그녀를 흥분시키는 데가 있었다. 그는 추진력이 있었다. 강한 사내, 그렇다ㅡ성급하게 반대만 할 게 아니라ㅡ선견지명이 있는 사내였다.

 "폭스에게 반대하면 어떻게 하는데?"
 "면도칼을 꺼내요."
<폭스 이블>, 233p


 면도칼을 꺼낸다는 일은 폭스 이블이라는 남자가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이것은 소설의 후반부에서 폭스 이블의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을 때 그가 어떤 방식으로 나설 것인가 하는 일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데다, 그와 같은 종류의 인간들에 대해서도 단평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벨라는 이 시점에서 폭스 이블에 대해 '지배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으며, 선견지명이 있다'고 평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같은 사람을 볼 수 있을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을 휘어잡고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기 위해 밀어붙이는 종류의 사람 말이죠. 그러나 폭스 이블에 대해 그의 아들인 울피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에게 반대하면, 면도칼을 꺼낸다'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상대편을 강제적으로 억압하고, 더 나아가 제거할 수도 있는 타입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와 같은 사람들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내는지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와 같은 사람이 '아군'이라고 생각할 때 그에게 종속된 사람들은 벨라처럼 그를 매력적으로 보게 된다는 점이겠죠. 많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의 문제점을 모든 일이 지나간 후에야 깨닫고 맙니다.

 <폭스 이블>에는 이런 식으로 인간을 되새겨볼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가득합니다. 사실 이렇게 인간을 되새겨보게 해주는 방식이 <검은 집>보다 훨씬 세련되었다고 봅니다. 아마 <검은 집>의 시각에서라면 폭스 이블 같은 남자도 사이코패스라고 규정짓고 보통 인간과 별개의 존재인 것처럼 그려내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글쎄요, 결국 그런 사람도 인간의 한 모습 아닐까요.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란 모두 다르기도 하니까요. (아무래도 저는 그런 류의 카테고리화를 좋아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사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보는 시선이 따듯해서, 사실 꽤 추악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는데도 그다지 지저분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무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산뜻한 느낌이죠. 이건 아무래도 마크 앤커턴과 낸시 스미스의 러브-라인 때문일지도. 여하간 그런 소설이니 이런 쪽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읽어보시길. 꽤 괜찮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