냅다 다녀왔습니다. 오늘은 로얄석.


경기필 93회 정기연주회 감상을 할 때 이미 적은 바 있습니다만, 오늘은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중에서도 제가 눈물나게 좋아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이 하는 날이었습니다. 이런 건 돈을 좀 투자해서라도 좋은 자리에서 들어야죠. 자, 일단 곡목부터 소개합니다.

G. Verdi, Overture <La Forza del Destino>
    베르디, <운명의 힘> 서곡
S.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C단조, Op.18
V. Kalinnikov, Symphony No.1 in G minor
    칼리니코프, 교향곡 제 1번 G단조


여기서 중요한 건 물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입니다. 아시는 분은 다 아시는 그 명곡, 귀에 매우 익숙한 곡입니다만 실제로 듣기는 또 꽤 어려운 곡입지요. 전에 KBS에서 했을 때는 워낙 비싸서 못 갔지만 이번에는 무려 로얄석이 3만원. 이만하면 충분히 갈 만하지 아니합니까. (실제로는 학생할인으로 이만 사천원이었지만)

일단 이번에는 관객 수준이 괜찮았으므로 그에 대해서는 딱히 특기할 사항이 없습니다. 아, 하나 있긴 합니다. 좌석을 야메로 차지한 듯한 두 여성분이 있더군요. 저와 친한척 군이 앉아야 할 1층 B블록 17열 12, 13번을 떡하니 차지하고 앉아 있어서 "저 죄송하지만 좌석 좀 확인을" 부탁드리니까 "이씨" 투덜거리면서 앞좌석으로 옮겨 가더군요. 이 인간들이 남의 자리에 앉아 놓고는 어디서 이씨야? 내가 집에 가면 너만한 자식이 있어!··· ···는 아니고, 아무튼 좀 수상쩍은 인간들이더군요. 더불어 그 후 이 앞쪽 자리에 일단의 아주머니 부대가 앉았는데 모두 쭉 일행이어야 하는 듯한데 이 두 여자들 때문에 아주머니 두 분이 적당히 다른 자리를 찾아 앉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수상하지요?

그리고 재미있었던 것 하나는··· 이 두 여자고, 아주머니 부대고 간에,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이 끝나고 나자 인터미션 후에 그대로 간 듯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칼리니코프 교향곡 제 1번도 충분히 좋은 곡인데··· ···한국 클래식계의 갈길은 멀고도 험난합니다, 네.

그 외에 별로 재미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니 곡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죠. 우선 베르디의 <운명의 힘> 서곡입니다만, 이 곡은 적당히 힘차면서 우아한 곡입니다. 듣기 좋은 곡이고 무난합니다만, 인상으로서는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을 하기 전에 워밍업을 좀 한다 싶은 것도 사실이죠. 어쨌거나 연주는 좋았습니다. 지휘자인 임동수 씨가 무난하게 오케스트라를 이끌어 가는 인상이었어요.

자, 그리고, 본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C단조 작품번호 18··· 입니다. 워낙 좋아하는 곡이다보니 왠지 이렇게 작품번호까지 다 부르게 돼요. 슬럼프에 잠겨 있던 라흐마니노프가 역경을 딛고 일어서 만들어낸 명곡인데, 초절기교 피아노 선율과 웅장애절한 관현악의 조화가 멋져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요. 차이코프스키도 그렇고 후술할 칼리니코프도 그렇지만, 러시아 작곡가들의 정서란 한국 사람의 그것과 꽤 잘 맞아 떨어지는 면이 있다 싶습니다.

피아니스트는 윤철희 씨였습니다. 전 잘 모르는 분입니다만, 어쨌거나 라흐마니노프를 칠 정도면 상당한 수준이죠. 피아노를 칠 때의 인상을 말할 것 같으면, 사실 저더러 말하라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치는 사람은 다 변태"입니다. 왼손과 오른손이 확실하게 따로 노는 건 물론 기본입니다만 거기에 더해서 음에 취한 듯이 상체를 흐늘흐늘 돌리고 있습니다. 이런 인종이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겠지요.

사실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을 시작하기 전에 조금 뜸이 들어갔습니다. 의자에 앉은 피아니스트가 건반 위에 깃털이 내려앉듯 손을 내려놓습니다. 잠시 침묵이 흐릅니다. 지휘자와 피아니스트가 눈을 마주치고, 지휘자가 살짝 고개를 끄덕입니다. 자, 모두들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공중으로 들어올라갔다가- 건반을 두들깁니다! 그리고 적막 가운데에 울려퍼지는-

천 길 낭떠러지 저 밑바닥까지 비춰주는 빛과 같은 피아노 서주, 그 빛을 들이마신 순간 절벽에서 계곡으로 곡두박질쳐집니다. 오케스트라는 안개를 머금은 계곡에 가느다란 실처럼 뻗쳐 솟아오르는 샘처럼 용솟음쳐 피아노 음과 어우러지고 물결치면서 백 가닥의 물줄기를 이루고는 황금의 꿈의 세계로 데려갑니다ㅡ.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라흐마니노프입니

···네, <노다메 칸타빌레> 6권 10~11p에서 사쿠마 마나부가 치아키 신이치의 라흐마니노프에 대해 평한 글입니다. (···) 원래 평어인 것을 이 포스팅의 분위기에 맞게 존대말로 바꾸었습니다만. 그래서 사실 윤철희 씨의 피아노는 어땠느냐? 서주가 개인적인 취향과는 좀 달랐습니다. 전 좀 더 단촐하게 음을 살리는 것을 좋아하는데, 보통은 거의 묵음시키는 음을 좀 강하게 치더군요. 그 외의 멜로디에서는 딱히 별다른 것은 없었습니다. 단지, 중간중간 음이 튈 듯이 불안한 구석도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라흐마니노프니까요. 그러나 튀어나가지는 않고 잘 잡아냈고, 덕분에 충분히 음을 즐기고 그 안에 빠져들 수 있었습니다. 저로서는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을 실제로 듣는다는 것만으로 일단 만족이었죠. 마치 피겨 스케이팅을 하듯 매끄럽고 우아한 손놀림을 보는 것도 즐거웠고요.

인터미션 후에 칼리니코프 교향곡 제 1번이 연주되었습니다. 이 곡은 라흐마니노프만큼 많이 들은 곡은 아니지만, 서정성으로 말하자면 라흐마니노프에 지지 않는 좋은 곡입니다. 곡이 특별히 난해한 것도 아니어서 누구나 좋게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1악장의 매끄럽고 우아한 멜로디가 기본이 되어, 2악장에서는 하프를 배경으로 좀 애수어린 멜로디를 들려주다가 3악장에서 치고 올라가고서는 4악장에서 다시 1악장의 기본 멜로디를 바탕으로 치고 올라가 마치는 곡입니다.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이 아니었기 때문에 피아노가 조금 불안하다거나 이런 부분은 없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관현악이 강한 부분에서는 아무래도 하프의 선율이 희미해진다는 것이었죠. 그래도 전반적으로 말하자면 역시, 듣기 좋았습니다.

팔이 아프도록 박수를 쳐대서 얻어낸 앵콜곡으로는 아래와 같은 두 곡이 있었습니다.

A. Khachaturian, <Masquerade> Galop
    하챠투리안, <가면 무도회> 중 갤롭
Mascagni, <Cavalleria Rusticana> Intermezzo
    마스카니, 오페라 <시골의 기사> 중 간주곡

카챠투리안의 <가면 무도회> 중 갤롭은 힘차고 유쾌한 곡이었고,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중 간주곡은 다소 애수어린 곡이었습니다. 일단 첫번째 앵콜곡으로 분위기를 바꾸었다가 다시 두번째 앵콜곡으로 칼리니코프와 같은 애수를 돌이켰다는 느낌입니다. 두 개의 앵콜곡 외에 더 이상의 앵콜곡은 없었는데, 사실 라흐 피협 2번이나 칼리니코프 1번 같은 난이도 있는 곡들 후에 또다시 앵콜곡 두 개나 해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팬 서비스는 충분히 한 셈이죠.

하여, 충분한 서정미를 보여준 좋은 공연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또 이런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라흐마니노프 피협 2번 공연이란 대체로 워낙 비싸단 말이죠···.
Posted by Neis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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