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창비(창작과비평사)

이 책을 읽으면서는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이 쓰여진 연대와 작가의 생년을 볼 때 작가가 지금의 내 나이와 비슷하거나 어릴 때 쓴 글이 이것인데 지금의 나는 과연 이런 글을 쓸 수 있을까, 즉 이 사람은 이렇게나 써냈는데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렇긴 하지만 이 작품들은 너무 일상을 관념적으로 파헤쳐서 오히려 불편하기도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작가는 항시 자신의 글에서 자신의 사상이나 관념을 피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많이 팔리는 글인가를 판단할 때는 보통 그러한 정도가 강하냐 약하냐보다는 그렇게 드러나는 작가의 스타일이 얼마나 많은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됩니다. 소위 말하는 대중적인 글이란 이런 것을 말하고, 그냥 자기 마음대로 써도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가가 있다면 그 또한 하나의 재능입니다. (그리고 이게 바로 제가 글의 수준이 어떠하느냐를 떠나서 귀여니를 무시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달려라, 아비>가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느냐 하면, 저한테 말하라면, 글쎄, 어떨까요.

<달려라, 아비>의 스타일은, 일상의 어떠한 소재를 가지고, 그것을 엮고 깊게 파고들어 어떤 관념과 연결하여 평범한 일상이 더 이상 평범한 일상으로 보이지 않게 하는 스타일입니다. 보통은 '자아'나 '타인에 대한 이해'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이번 감상에서는 수록 단편 중 <나는 편의점에 간다>를 좀 예로 들어 볼까 합니다. 여기서는 우리가 보통 별 생각 없이 이용하는 편의점이라는 소재를 파고들어 '안다'는 것에 대해 말하는데, 주인공은 어떤 상점을 이용하다 보면 주인이 아는 체 해 오는 일을 불편해합니다. 주변을 훑는 질문들, 그리고 그러한 단편적 지식으로 자기를 '안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므로, 손님 접대에 대해 필수적인 질문 밖에 하지 않는 큐마트를 애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다 주인공은 한 가지 생각에 미치게 되는데, 큐마트 직원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녀는 '큐마트에 다니면서 내가 한 가장 큰 착각은 푸른 조끼의 청년과 사적인 말을 하지 않으므로 내 사생활이 전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데 있었다' (46p)고 말하고는, '···그는 나의 가족관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벽마다 와서 햇반을 사가는 여자, 필수품을 스스로 사는 어린 여자, 젓가락은 한개만 가져가는 그 여자는 독신이리라. 그는 나의 고향을 안다. 편의점에 겨울옷을 정리한 택배를 부치러 갔을 때, 그는 수수료를 받으며 내 주소를 확인했다. 그는 나의 생리주기를 안다. 그는 정기적으로 생리대를 사가는 나를 본다. 그는 콘돔갑을 뒤집어 계산대에 올려놓는 나를 본다. 그는 나의 식생활에서 성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두 '보고' 있다. 왜냐하면 편의점이란 모든 걸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큐마트는 나의 가장 오랜 단골이 된 덕에, 청년은 내게 단 한마디의 사적인 대화를 걸지 않고도, 나에 대해 그 어떤 편의점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나도 모르는 나의 습관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47p)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나중에 일이 생겨 그 직원에게 주인공이 무엇인가 부탁하려 했을 때, 이런 결과가 나옵니다.

"저······ 아시죠?"
그는 도시락을 쥔 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저, 이 근처 사는······ 항상 제주 삼다수랑, 디스플러스랑 사갔었는데······"
청년이 계속 모를 듯한 표정을 짓자, 나는 조바심이 났다.
"깨끗한나라 화장지랑, 쓰레기봉투는 꼭 10리터짜리만 사가고, 햇반은 흑미밥만 샀는데······ 모르시겠어요?"
그는 양미간을 찌푸리며, 마치 취중에 함께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기억해내려는 듯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입을 열어 대답했다.
"손님, 죄송하지만 삼다수나 디스는 어느 분이나 사가시는데요."
<달려라, 아비>, '나는 편의점에 간다', 50-51p

물론 저러한 결론이야 이야기를 이끌어내기 위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당연한 귀결입니다만, 어쨌거나 그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셈입니다. 어쨌거나 그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녀 역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채로, 그녀는 또 살아가고 편의점을 이용합니다. 여기에는 절망도 희망도 없습니다. 어쨌거나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안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나는 당신의 이러한 일면을 알고 있지만 저러한 부분은 모를 지 모릅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것, 내가 싫어하는 어떤 것, 어떤 일에 대한 내 의견, 이것을 알고 있다고 당신은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A가 아는 당신과 B가 아는 당신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에서의 주인공은 세븐일레븐이나 포장마차나 패밀리마트의 점원들보다 큐마트의 점원이 자신을 잘 '알'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결국 큐마트의 직원도 주인공을 알지는 못했지요. 그러나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게 가능했다면 철학에서 관념과 실재에 대해 그렇게 고민해 왔을 까닭이 없겠지요. 자기 자신조차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보다는 제 생각을 피력했습니다만, 감상이란 다 그런 법이니 괜찮겠죠. 여하간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이란 대체로 이러합니다. '안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살아간다'는 것이 그냥 살아가는 것이 아니며 필사적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대체로 관념적인 부분에서죠. 이런 건 취향을 무척 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아슬아슬해서, 처음에 말한 바대로 '마음에 들기도 하고 안 들기도 하고' 하는 부분에 걸쳐 있습니다. 괜히 하드보일드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나 관념을 열심히 풀어가기보다는 행동 그 자체를 보여 주는 방법을 좋아하거든요. 그 점에서 보자면 이 책은 작가의 감성이 좀 직접적으로 와닿습니다.

결국, 작가의 고민이 내 고민이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녀의 관심사가 내 관심사가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녀가 보는 세계와 내가 보는 세계는 다르다는 것. 제 취향에 딱히 안 맞는 글을 읽을 때마다 제가 느끼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녀도 저도 '틀린' 것은 아니며 다를 뿐이라는 사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며 또한 그런 것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들을 가치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취향에 맞는 것만을 접하며 사는 사람은 편협하기 마련입니다. 온전히 타인을 이해하며 살아갈 수는 없지만, 이해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세상은 좀 더 나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