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찬은 사람을 망가뜨리기 쉽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상대를 위해서 쓴소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내가 보기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상대를 위하기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것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정말 상대를 위해서는 비판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오로지 그 사람이 비판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달리 말하면, 그가 받아들일 생각이 없을 때에 비판이나 억압으로 그를 변화시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교도소 (矯導所)에서 교도 (矯導)되는 범죄자는 없다. 아내의 바가지에 눈물 쏟으며 변화되는 남편도 없다.

중학교 때까지 나는 강도 면에서 절대 약하지 않은 매를 맞았었다고 자부한다. 종아리에 든 피멍은 일이 주 정도로는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그 매에는 어떠한 이유가 있었다. 강도가 지나치기는 했을지언정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없는 아버지였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지금, 그 수많은 매를 맞아왔음에도, 나는 그 매를 맞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던지, '무슨 일로' 매를 맞았던 것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가끔 가다 들은 아버지의 칭찬- 아버지로서는 아마 무심코 했었을 칭찬 하나에 신경쓰고 그것이 내 행동을 아예 변화시켜버렸던 것을 기억한다. 이를테면, 물을 마시고 무심코 물컵을 깨끗하게 닦았는데 'XX는 컵을 참 깨끗하게 쓴다'고 말한 것 때문에 그 후 컵을 모두 깨끗하게 닦는 습관이 든 것 같은 일 말이다.

사람은 모두 인정받고 싶어한다. 인정받고 싶어하는 게 나쁜가? 인정하고 인정받는 게 좋은 거다. 서로와 서로를 비교하고 우월감이나 자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이해하고 서로의 장점을 보는 눈이 중요하다. 장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설령 무엇 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그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이 싫은 거다. <그 사람> 자체를 인정하라. 사람은 자신을 누군가가 인정해 주면 그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하기 마련이다. 아무도 자신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로워지기도 하고, 빗나가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한다.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사람은 목숨까지 걸게도 된다.

얼마나 많은 비극이 상대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났는지. 또한 작은 믿음으로부터 사람이 얼마나 크게 변화됐는지. 사람이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그러나 또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지.
Posted by Neissy
무술가는 자신의 무술로 말하고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으로 말하고 배우는 자신의 연기로 말하고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말하고

작가는 자신의 글로 말한다.

현실이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건 다 핑계다. 정말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하다면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자신이 행함으로 증명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능력을 키워서 통하게 만들어라.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라. 때로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삶에서 무엇인가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면, 꿈을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 있다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는 자명하지 않은가.


화가 밀레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때문에 초기에는 나체화를 그려 호구지책으로 삼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야만 했다. 그가 주로 그린 그림은, 아내의 나체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들이었다. 더러는 어린 소녀의 모습도 있었다.

어느 날 밀레는 그림 주문도 받을 겸 파리의 화랑가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소녀의 나체가 그려진 파스텔화 앞에서 두 청년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서투른 그림인데! 선이 엉망이야. 구도도 그렇고.”
“밀레라는 자식이 그렸지. 벌거벗은 계집밖에는 아무 것도 그릴 능력이 없는 화가야.”

밀레는 거꾸로 치솟는 울화통을 간신히 참아 냈다. 그러나 그 울화통이란 그 말을 주고받는 청년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 저들 말이 맞아. 예술을 한답시고 너무 무책임하게 굴었어. 이제 나체 같은 건 결코 그리지 않을 거야!”

그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나마 나체화를 그려 생활을 꾸려 가던 그에게, 나채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굶기로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빵을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던 나체화에서 손을 뗀 밀레의 생활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그림을 들고 화랑을 찾아갔으나 모두들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그림을 살 바보는 아무도 없을 거요. 차라리 예전처럼 나체화를 들고 오시오.”

화랑 주인들은 그에게 한사코 나체화만을 요구했다. 하지만 밀레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난로가 꺼져 추위에 떨어야 했고, 빵 한 조각 먹을 게 없어도 그는 나체화를 그리기 위한 붓을 들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시골로 돌아가 고달픈 심신을 전원에 묻고 농민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때 <만종> <이삭 줍기> 같은 불후의 명작이 태어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나체화를 붙들고 있었다면 당장 먹을 빵은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이름을 후세에 널리 알리게 될 명작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처 : Success Partner .. 라고 하더군요. 이 글을 찾아낸 블로그에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이전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글에 더 집중하며 살고 싶어서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지 전업작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통하지 않는다면, 통할 때까지 노력하고 공부하고 써 내자. 살아가면서 닥칠 어떤 괴로움도 고통도 반가이 맞아 주자. 더 좋은 글을 써낼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Posted by Neissy
죽음과 추는 억지춤 또는 어린아이들의 십자군전쟁
커트 보네거트 지음 / 새와물고기

이 책을 읽을 때는 단 두 가지만 신경써 봅시다: "그렇게 가는 거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되는 거다". 삼차원이 아닌 사차원에서 살아가는 이 책의 캐릭터 빌리 필그림에게 시간이란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끌려갔던, 끌려간, 혹은 끌려가게 될 트랄화마도르에서 시간이란 영원한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의 차원에서 존재하며, 그들은 그 모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누군가가 죽었다고, 무언가가 멸망한다고 해서 크게 슬퍼할 일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슬픈 순간도 행복한 순간도 영원하지 않은 동시에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이 마치 실에 꿰인 구슬처럼 다른 순간을 따른다는 개념과 한번 지나간 순간은 영원히 지나가 버린 것이라는 지구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p51) 책의 구성 자체도 시간과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듭니다. 시간 순서대로 흘러가는 보통의 책에 익숙하다면 이 책은 머리가 아플 겁니다. 여하간 시간이란 마음대로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까요.

사진이 없어서 찍어 올립니다. 이 책입니다


자유 의지 같은 것은 없으며, 어떤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는 것은 그 순간 그가 그렇게 행동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가는 겁니다.

이 런 식의 시각도 나름 꽤 신선합니다. 좀 머리는 아프지만, 저는 개인적으로는 시간이란 관념이 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그것을 시사하죠. 뭐 이건 언젠가 좀 체계적으로 연구를 해볼까 하는 부분입니다만, 말 그대로, 시간이란 개념은 피조물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이것과 동시에 자유 의지라는 개념이 겹치면 굉장히 복잡한 부분으로 파고듭니다만, 아직 이 부분에까지 세세하게 썰을 펼칠 내공은 없으니 이 부분은 일단 넘어가겠습니다.

여하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저런 시각들은 인간에 대해 다소 냉소적이면서도 그렇다고 딱히 실망하는 듯이 보이지도 않는 오묘한 입장을 보여 주고 있는데, 삐딱한 블랙 유머가 여기에 조미료를 더합니다. "그러나 캐딜락의 뒷부분은 자동차 수리공이 꿈속에서 보면 몽정을 할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p242)라거나, " 그녀는 멍청했지만, 아기들을 만드는 데 있어서는 어마어마한 유혹을 주는 사람이었다. 남자들은 그녀를 보면 그녀를 당장 아기들로 가득 채워 주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녀는 아직 아기를 하나도 낳지 않았다. 그녀는 피임을 하고 있었다" (p227) 라는 식의 문장 말이지요.

읽는 방법에 따라 그리 쉽게 읽히지는 않을 수도 있고 아니면 쓱쓱 읽힐 수도 있는 글입니다. 저로서는, 아무튼, 아래 문장이 와닿더군요.

"하나님 제게 평온을 주셔서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용기를 주셔서 가능한 것들을 변화시킬 수 있게 하시고, 지혜를 주셔서 항상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p92, 또한, p273)
Posted by Neissy



아침형 인간으로 생활을 개조한다는 안 자체는 좋았지만 어제는 결국 피곤해서 (아침 7시쯤 일어났다가) 낮 2시쯤 잤더니 깨어보니 웬 새벽 2시라던가.. 그때까지 컴을 켜놓고 있어서 MSN도 접속된 상태였다던가.. 그래서 '아침형 인간으로 바꾼다더니 아직 깨어 있네' 라는 따위의 메시지가 한 개쯤은 날아왔을까 두근두근 이랬는데 메시지는 한 개도 날아온 게 없었다던가.. 외출할 때 폰을 안 가지고 나가서 전화오면 어쩌지 문자오면 어쩌지 싶지만 결국 저녁에 집에 돌아와보니 전화니 문자니 한 개도 오지 않았던 그런 기분 비스무레한 걸 느껴봤다거나.. 여하간 그런 어제였습니다요.

오늘은 새벽에 일어난 김에 만화책 좀 보고 잘까 하다가 정신차려보니 이미 햇님이 생글생글 웃으며 '아침이다 이자식아' 이러고 있어서 일단 계속 깨어 있기로 하고 여태까지 계속 깨어 있습니다. 뒷목이 조금 땡기는 기분도 들지만 일단 10시쯤에 자도록 할 생각이므로 버티고 있지요. 중간에 바이올린도 한 시간 반쯤 켰는데 조금씩 조금씩 실력이 늘고 있기는 하더군요. 운동을 할까 했는데 하는 것도 없이 뒷목이 땡기고 있다 보니 왠지 몸을 움직이는 게 싫습니다. 글은 당연히 뒷목이 땡기는 차에 정신집중따위 할 수 있을 리 없고, 마찬가지 이유로 독서도 안 땡기고, 뭔가 만사 귀찮아져서 밀린 영화 보는 것도 싫고, 하릴없이 그냥 시간이나 때우고 있습니다.

..나 대체 뭣 때문에 아침형 인간이 되겠다고 결정한 거지.. ㄱ-

단 하나, '하루가 길게 느껴져서'라는 이득 때문에 아침형 인간으로의 전환을 결심한 거였지만 아무 것도 하는 것 없이 그냥 하루가 길게만 느껴지고 있으니 도무지 쓸데없군요. (...) 생활리듬을 갑자기 바꾼다는 건 역시 무식한 방법이었을까요. 하지만 이렇게 몸을 피곤하게 해 둬야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도무지 자꾸 새벽에 깨 버리니.. 밤에 잔다고 딱히 수면효율이 좋은 것만도 아닌 듯 싶습니다.

아, 역시 시간이 아깝습니다. 박카스라도 하나 사 마시고 심기일전해서 기프트 에피소드 2의 플롯이나 좀 잡아봐야겠군요. ..근데 낮 5시에 훼인 같은 모습으로 박카스를 사러 나가다니, 나도 참 뭐랄까..

<작가>

라는 기분일까나요. 훗훗.


('그냥 훼인일 뿐이야'라고 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듯도 싶습니다만, 상콤하게 무시해줄랍니다)



※ 사진출처는 인터넷서 떠돌고 있던 거라 원 출처는 잘 모르겠습니다. PZ070115니 PZ070320이니 하는 게 뭔가 업로드 날짜라거나 뭔가 기타 뜻이 있는 거 같긴 합니다만, 솔직히 이걸 근거로 원 출처를 탐색해본다거나 하는 건 귀찮아서 ←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