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인 오브 파이어 (Reign of Fire)
롭 바우만 /매튜 매커너히 / 브에나비스타 (Buena Vista)

2002년 영화입니다만 이제 봤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무슨 장르인지 볼 때까지도 몰랐습니다. 카다스 녀석이 놀러온 김에 같이 영화를 볼까 하다가 포스터만 보고 고른 영화가 이겁니다. (그리고 정작 영화 볼 때 카다스 녀석은 뻗어서 잤지만, 아무튼) 이 영화를 고른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크리스챤 베일이 주인공이다'!

..뭐 딱히 별다른 이야기가 있는 영화는 아닙니다. 있을 만한 건 대충 있지만 눈물나는 감동이라거나 우정이라거나 사랑이라거나 심오한 철학이라거나 그런 거 없습니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 만약 드래곤이 나타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랄까, 드래곤을 현실에 등장시켜보자! 라는 느낌의 영화입니다.

그저 드래곤을 보는 맛으로 보는 영화입니다. 꽤 간지는 있습니다. 여하간 드래곤이 나타났고 드래곤에 의해 인간 사회가 거의 멸망에 이르른 시점에서부터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니까요. 그리고 여기 나오는 드래곤이란 굳이 말하면 슈퍼계라기보다 리얼계이고, 좀 더 '피부로 느껴질 만한 강함'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판타지 좋아하는 사람이 두근두근하며 볼 만하게 잘 만들었습니다.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그냥 현대에 나타난 드래곤과 현대의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결이라고 생각하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비주얼이 꽤 좋아요.
Posted by Neissy
6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드디어 반깁스를 풀었습니다. 뼈에 박았던 철심도 뽑았는데 이건 생각보다 별로 안 아프더군요. (뻰찌로 뽑았는데요, 뭐랄까 뼈가 조금 시큰거리긴 했지만 수술하고 난 밤과 새벽에 뼈가 쑤셨던 거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된달까) 여하간 그런 이유로 봉인되었던 오른손을 해방시키고, 저는 지금 오른손 엄지 타이핑이 아니라 모든 손가락을 다 사용해서 타이핑하고 있습니다. 빛나는 나의 손가락, 샤이닝 핑거 만세.

아무래도 철심을 박아 두어서 뼈를 상하게 한 거니 뼈가 붙었다고는 해도 완전한 상태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철심을 박았던 상처에 물이 들어가면 안 되는 관계로 아직도 오른손에 물을 댈 수 없고요. (반깁스는 풀었지만 붕대는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오른손을 사용하라고 하더군요. 이틀 뒤에 다시 병원 가서 철심 빠진 상처가 잘 붙었으면 물리치료도 개시할 모양입니다.

한 달 반을 쓰지 않았을 뿐인데 손이 완전히 다 굳었습니다. 지금은 타이핑을 할 수 있을 정도까진 관절 가동력을 회복시켰습니다만, 처음에는 손이 수도 (手刀)처럼 된 상태에서 움직일 생각을 안 했어요. '이런 건 내 손이 아냐!' 라고 절규하며 용을 쓴 끝에 그럭저럭 구부러지게 되었습니다만. 말하자면 다리 찢기 스트레칭을 안 해서 다리가 안 찢어지는 사람이 끙끙대며 다리찢기를 하는 그런 느낌입니다. 하지만 손이란 건 좀 더 복잡한 부분이고, 요컨대 고생 좀 해야겠죠. 팔근육도 물렁물렁해져서 미끈해져 버렸습니다. 내 전완근 다 어디 갔어 으하하학.

사람의 몸이란 건 쓰지 않으면 굳는다는 걸 절실하게 실감하는 중입니다만, 문득 또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비단 몸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 하고. 그러니까 결국 무엇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사람이 하는 그 어떤 일이건간에, 취미활동이건 공부건간에, 하지 않으면 굳어지는 법이지 싶습니다. 머리를 계속 쓰는 사람은 치매에 걸릴 일이 적다고 하지요. 물론 몸이건 머리건 뭐건간에 너무 무리하면 오히려 망가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그거야 자신의 한계를 알고 적절히 조심해야 할 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 굳어진 오른팔을 위해 죽어라 재활 좀 해야겠습니다. 이 불쌍한 오른손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지금 일반 체육사 악력기를 오른손으로 한 번도 제대로 못 잡고 있어요. 하긴 애당초 관절도 제대로 못 구부리면서 악력을 되살릴 계제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여하간 인간의 몸이란 안 쓰면 이렇게나 순식간에 퇴화해 버리는구나 싶습니다. 뭐, 써야죠, 열심히.
Posted by Neissy
소름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로스 맥도널드는 더쉴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에선 꽤나 유명합니다. 워낙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즐겁게 읽었던 터라 더 이상 챈들러를 읽을 게 없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었고, 그래서 다른 하드보일드를 찾아 헤매던 차에 일단 무난하게 로스 맥도널드부터 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게 있어서는 사실 챈들러의 대용처럼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읽기 시작해 보니 이것도 확실히 또 다른 매력이 있더군요. 스토리 라인에 대해서는 책 389p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신 혼여행의 첫날 실종된 알렉스 킨케이드의 처, 달리 매기의 행방을 뒤쫓던 루 아처는 수일 뒤, 밤안개가 자욱하게 낀 으스스한 저녁, 남편에게 돌아온 달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한쪽 유방이 드러나고 피투성이가 된 두 손과 정신착란 상태의 모습이다. 살인사건에 말려든 달리의 과거에는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불길한 살인의 악몽이 있었던 것이다. 저주받은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달리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가 복잡하게 뒤섞여 얼마 뒤엔 무서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하드보일드가 으례 그렇듯이 추리보다는 행동이, 사건의 트릭 -아니, 트릭이랄 게 애당초 없지만-보다는 사건의 이유가 훨씬 중시됩니다. 요컨대 아처의 말대로 "옛날은 언제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 그를 위해서 타인이 희생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들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처는 싸우고, 진실을 알아내고, 결국 밝혀냅니다. 무언가 붕괴되고 망가져 있지만, 딱히 낙관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비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여하간 산 사람들은 살아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하드보일드는 역시 간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담담하지만 세심한 필치의 문장이라거나, 비꼬는 듯한 농담이라거나, 살아 있는 캐릭터들이 뿜어 내는 살아 있는 대화 등이죠. -하지만 위에서 보셨겠지만 이걸 번역한 곳은 동서문화사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믿을 수 있는 번역으로 유명한 곳이죠. 기본적인 문장이야 여하간 이해는 큰 무리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화 번역이 참 에러였습니다. 캐릭터에 따른 어투의 변화를 전혀 살려내지 못하고 있더군요. 어찌하여 어투에서 삼류 통속 소설의 분위기를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프로이트를 프로스트라고 써 놓은 것도 참 에러입니다. 바로 몇 문단 아래에는 다시 프로이트라고 써 놔서 '아 프로이트 말이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그래도 원서를 읽을 능력이 못 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챈들러를 멋지게 번역해 준 북하우스에게는 심심한 감사를.
Posted by Neissy

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간단하게 말해두겠습니다만 일단 이 소설은 그다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라고만 하고 서론을 끝내기엔 아무래도 거시기하니까 책 뒤쪽의 소개글부터 옮겨와 보겠습니다. " 핵전쟁 후,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병으로 인해 세상은 흡혈귀로 뒤덮인다. 그리고 한 남자만이 살아남는다. 낮에는 시체들에 말뚝을 박고, 밤이면 깨어난 흡혈귀들과 죽음을 건 혈투를 벌이는 지구 최후의 남자 로버트 네빌. 지금 그의 전설이 시작된다." "거장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새벽의 저주' 등 현대 좀비 공포물의 모태가 된 기념비적인 작품." 재미있어 보이지요? 사실 재미있습니다. 단지 제 취향이 아니었을 뿐.

 일단 이 소설을 읽기 이전에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를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는 이를테면 흡혈귀들만이 가득한 세계니까요. 확연한 차이점은 여기에서는 흡혈귀를 신화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컨대 흡혈귀를 전염성이 있는 병원균에 의한 '병'으로 만들어냈다는 거죠. 지금에야 이런, 과학으로 끌어오는 개념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다 싶습니다만, 애당초 이건 50년도 전의 소설인 데다가 이런 SF 스타일 좀비 소설의 효시이니 이 소설이 전설인 겁니다. ..말하는 게 어째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지요? 사실 그랬습니다.

 읽다 보면 이거 쓰느라 작가가 머리 정말 열심히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당초 존재할 리 없는 흡혈귀를 현실에 '이성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이지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납득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냈지요. 이 점에서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하시는 분도 아마 꽤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 포인트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달까요. 이유라면, 일단 애당초 흡혈귀란 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니만큼 그 가상의 존재를 억지로 현실에 끌어대어 봐야 깊이 파고들면 결국 어딘가 어귀가 안 맞는 부분이 생긴다는 겁니다. (기독신학 측면에서 바라봐도 뱀파이어란 존재를 끌어들이려면 결국 어귀가 안 맞죠) 게다가 이 소설 내에서도 브램 스토커에 나오는 흡혈귀를 기본으로 하여, 그놈들이 밤에만 돌아다니는 이유라거나 십자가나 마늘에 약한 이유 등을 나름의 과학적 이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이게 그렇게까지 완전한 게 못 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은 이 소설의 새로운 설정으로 대체하기도 하고, 소거해서 아예 나오지도 않게 합니다. 여기의 흡혈귀는 브램 스토커의 흡혈귀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작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개념의 흡혈귀랄까요, 어느 정도 타협을 본 느낌입니다. 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지만 결국 그 과학적으로 설명된 '신'은 원래의 '신'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체에 걸러져 형태가 달라진 또 다른 '신'이었다, 그런 기분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일반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존재를 그 법칙 내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시도도 꽤 재미있지요.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이게 그렇게 매력적인 건 아니라는 거죠. 이게 아주 마음에 드실 분도 아마 틀림없이 있겠지만.

 또 하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자신 외의 모든 이들이 흡혈귀가 된 세상이라면, 흡혈귀가 '정상'일까요 유일하게 인간인 주인공이 '정상'일까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개념에 대한 논의도 재미있죠. 애꾸눈만이 가득한 세계에선 두 눈 멀쩡한 사람이 비정상이 될 수 있듯이. -근데 전 그래도 두 눈 멀쩡한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하곤 어째 코드가 안 맞는 기분이네요.

  책 자체는 두꺼운 편입니다만 실은 '나는 전설이다'는 반쯤에서 끝나고 나머지는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뭐야 속았다!'라는 기분이었지만 이 단편소설들이 퀄리티가 있는 편이라 괜찮네요. 거침없이 일상을 무너뜨리는 호러소설들이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생각이 어째 좀 편집증적인 기질이 있어서 보다가 영 짜증나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잘 쓰여지기는 잘 쓰여진 글입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고작 두 장짜리 초단편인 '아내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전 좀 간결한 필치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여하간 제 취향에는 참 어지간히 안 맞았습니다만 잘 정돈되고 세심하게 쓰여진 재미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잘못 샀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돈이 아까운 소설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흑흑.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