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도서
김승옥 소설전집 1 - 무진기행: 이 어둠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Neissy
2010. 1. 13. 21:09

김승옥 지음/문학동네
지금 저에게 있어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전 김승옥이라고 답할 겁니다. 그의 소설은 문장이 섬세하고 묘사는 세심하며 서술은 감성적인 동시에 거침이 없습니다. 전 이 작가를 중학교 때 처음 접했는데, 아마 '중학생이 읽어야 할 소설' 종류의 책에서 읽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쨌든, 그 때는 작가 이름을 외우지는 않았으니 딱히 김승옥이라고 기억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때 읽었던 <서울 1964년 겨울>의 인상은 지금까지도 강렬하게 남아있습니다. 구태여 이리저리 설명을 달지 않고 그저 보여주기만 하는 것으로도 얼마나 큰 충격을 주는지. 근본은 순수한 사람이 사회의 물결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던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승옥 소설전집 1 - <무진기행>에는 다음의 단편들이 수록되어있습니다. 생명연습, 건, 역사,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章,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쟁쟁한 단편들이며 김승옥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이라도 이 단편 중 한두 편 정도는 제목을 알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련의 단편들에서 공통점을 찾아내본다면 - 좀 더 정확히 말해 제가 이 단편들을 읽고 김승옥이라는 작가에게 매료되는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본다면 - 역시 위에서도 말했듯 '근본은 순수한 사람이 사회의 물결에 휩쓸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덕과 윤리를 잃고 타락했지만 양심을 온전히 버리지는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 살아가는 자체가 힘겨워 자기 안의 무엇인가가 부서져가지만 그럼에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모습, 이 단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어두움이며 고통이고 연민입니다. 이 단편들을 읽고 있노라면 가슴 한구석이 저릿하게 아파옵니다. 이것은 1960년대 대한민국의 모습이었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이기도 하며 지금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6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김승옥을 말합니다만 그 때 그가 썼던 소설을 지금 읽어도 여전한 감동을 주는 것은 - 물론 그의 문장이 현재의 기준으로 보기에도 충분히 세련되었다는 이유도 있지만 - 역시 이 단편들이 언제 어디서고 사람들이 느끼는 '삶' 자체에 대한 고통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여기 모든 단편이 그렇지는 않지만 꽤 많은 단편들이 정상적이지 못한 성 (性)을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의미는 건전한 부부관계의 성 내지는 하다못해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의 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관계를 깨어뜨리기 위한 성이기도 하고, 그저 욕망을 위한 성이기도 하고, 고통스런 현실에서의 탈출을 위한 성이기도 합니다. 어느 것이든 그것들은 현실을 '더 낫게' 하는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더 부수어뜨리고 타락시키고 자조적으로 비웃게 만들 종류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일종의 자살이죠. 이 단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죽여가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 모습을 그려냅니다. 염세주의 바로 그것입니다.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 있고 없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그저 이 어둡고 혼탁한 세상 그리고 사람들을 보여줍니다. 그게 이 소설을 제 마음에 들게 하는 원인이며 또한 동시에 제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들어주는 원인입니다.
김승옥은 1981년에 종교적 계시를 받고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위에서 설명한 인간들의 어둠을 그려내는 소설 쓰기는 더 이상 그에게 중대차한 문제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이 소설전집 1 <무진기행>의 서문에서 그는 "하나님의 위로가 없는 한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들의 상황은 항상 1960년대인 것이다. (p.9)"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설을 쓰고 있으며 동시에 기독교인인 저는 이 말에 깊게 동의합니다. 신이 없다면 이러한 삶의 어둠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삶 자체의 속성인 것입니다. 벗어날 길이 있을까요? 그런 것은 없으며 그저 살아갈 뿐입니다. 그걸 해결할 방법은 적어도 세상 내에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무신론자들은 종교적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또한 자기위안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