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있는 소리를 하던 돼지도 이젠 없었다. 엄숙한 토론의 모임도 소라의 위엄도 사라졌다.
-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민음사, p.294


 10년 전에도 지금도, <파리대왕>의 이 부분이 제일 마음에 든다. 모든 질서와 도덕이 무너지고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헤쳐나갈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 그 때의 절망감을 나는 좋아한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주인공은 끝끝내 굴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더더욱 마음에 든다. 물론 나는 역경을 주인공이 뚫고 나가는 것들을 좋아하지만, 주인공이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역경을 만나는 것을 더욱 좋아한다. 그러나 그 역경에 주인공이 굴복해버리는 데까지 가면 그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그게 내가 <1984>를 좋아하지만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 이유일 것이다.

 바꿀 수 없는 거대한 힘에 맞선다, 이게 내가 하드보일드, 정확히는 필립 말로를 좋아하는 이유다. 북하우스판에서는 그를 기사와도 같다고 소개하고 있지만, 내 안에서는 일종의 순교자와도 같이 보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불이익이나 죽음에 굴하지 않는 사람은 감동을 주기 마련이다.

 그리고 내가 얀 트로닉을 통해 그리고 싶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나의 글에 보이는 세계는 그리 희망차지 않을지도, 인간미로 가득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건 내가 보는 세계가 그리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내 세계가 완전히 절망적이지만 않는 것은 얀 트로닉과 같이, 타협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게 나의 중요한 기독교적 가치 중 하나이겠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이상, 뭔가 잘나가는 작가가 자기 글에 대해 해설을 붙이는 느낌으로 써봤습니다. 블로그에 요즘 글이 적어서요. 사실 다 읽어서 감상 올릴 책도 여러 가지 있으니 포스팅 거리가 없는 건 아닌데, 집필에 나름 에너지를 쏟다 보니 감상으로 머리 쓰기가 좀 피곤하네요. 그래도 뭐 언젠가는 날잡아 쓰겠지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