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회귀

감상/도서 2017. 2. 20. 22:59


원점회귀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윤세미 옮김/책과삶


 레이먼드 챈들러의 마지막 완성된 장편소설입니다. 북하우스판 챈들러 선집에서는 빠져 있던 소설인데, 근래에 (라고 해도 나온 지 좀 됐습니다만) 다른 출판사에서 새로이 번역되어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챈들러를 경애하는 저로서는 반가운 일이죠.

 원래 영화의 시나리오를 위해 쓰여졌지만 잘되지 않아 소설로 고쳐 적었다고 들은 작품인데, 여태까지의 필립 말로 시리즈보다 확연히 짧습니다. 이전까지의 시리즈라면 슬슬 새로운 전개가 펼쳐질 즈음 해서 마무리가 지어지죠.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하겠습니다만, 이왕이면 조금 더 길었으면 하는 것은 역시 제 욕심이겠지요.

 이 작품을 평할 때, 이 작품의 필립 말로를 일컬어 '기사에서 인간으로 내려왔다'고 합니다. 그는 좀 더 지쳐 있고, 이전까지는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도 보여 주며, 한 소설 내에서 여자와 두 번이나 잠자리를 하기도 합니다. 이전까지 그가 가졌던 고고한 매력을 좋아하던 사람이라면 좀 실망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에는 딱히 실망하진 않았는데, 그건 이 작품이 이렇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읽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살아가면서 그렇게 변화하는 모습 또한 인생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이 든 사람의 삶이 젊었을 때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무언가 변하게 되어 있고, 그렇게 변하는 모습이 자연스럽죠. 그리고, 변했다 하더라도, 역시 필립 말로는 필립 말로입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지켜야만 할 어떤 가치가 있으며 그에 따라 행동합니다. 돈을 위해 움직이는 사립 탐정이지만 돈만을 위해 움직이진 않습니다. 그런 점이 그의 매력이죠.

 다만 필립 말로가 나오는 소설을 한 편 추천한다고 할 때, 이걸 우선 추천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역시 <안녕 내 사랑>이나 <기나긴 이별>이 가장 무난하겠죠. 하지만 그걸 읽고 마음에 들어 필립 말로 시리즈를 다 읽은 사람이라면, 필립 말로에게 실망할까 두려워 이 책을 읽지 않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읽을 수 있어 즐거웠습니다.


 "내가 뻣뻣하지 못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거요. 친절하지 않다면 살아 있을 자격이 없을 테고." - 필립 말로. <원점회귀> p.266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