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 제이든 스미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본 지는 두 주 가량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보았는데 꽤 볼 만 했지요. 이런 류의 드라마 영화도 저는 제법 즐기는 편입니다만, 사실 이런 식으로 '불행과 불행과 불행과 불행이 이어지는' 식의 전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를 좋아하는 게 그 때문인데, 그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사는 사실 무척 우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울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쾌하게까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 이야기를 하려니 예전에 썼던 <포레스트 검프> 감상글이 무척 짤막한 것이 밟히는군요. 하기야 그건 워낙 블로그 초기에 쓴 감상이라 그렇긴 합니다만··· 이건 조만간 재감상을 하든지 해야지 원. (먼산) ···아무튼, 이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는 이를테면 '인생론' 영화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재 속에서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죠. 줄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사실 이런 영화를 볼 때는 감정몰입을 강하게 해서 보면 힘듭니다. 주인공의 기구한 삶이 참 보기 딱하거든요. 위의 줄거리만 보셔도 대강 짐작이 되시겠지만, 저 줄거리가 영화 중반까지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저 주식중개인 인턴에 지원하고 도전하는데 그러고도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닙니다. 고생하고 또 고생하지요. 물론 전 다음과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만: "이건 헐리우드 가족 영화야. 그러니 끝은 절대적으로 해피 엔딩이다."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한 생각이었죠. 물론 실화라는 것을 알았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겠지만요. 이런 류의 영화에서 실화를 근거로 영화를 만들었다 할 때 굳이 비극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무려 크리스 가드너의 '자서전'에 기반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를 같이 봤던 모 군은 이런 말을 했더랬군요. "암울하고 암울하고 암울하고 암울한데, 그러고 끝까지 그냥 암울하고 끝나 버리는 게 <무간도>였죠." 이 영화가 <무간도>가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행복을 찾아서>가 이 영화 제목이고, 주인공은 '행복'을 찾아 매우 노력합니다. 물론 행복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크리스 가드너에게 있어서 지키고 싶은 것은 아들과의 행복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그래서 자신의 아들은 반드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가정을 지키고자 무진 노력을 합니다. 비록 잘 팔아보려던 골밀도 검사기가 마음처럼 팔리지 않아 고생하고, 결국 아내마저 떠나게 됩니다만. (이 놈의 골밀도 검사기는 영화 종반까지 계속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입니다. 더 들이지는 않더라도, 재고는 팔아야 당장 생활비라도 마련되니까요. 이 검사기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구슬픈 잔재미를 주긴 합니다만, 그건 이야기 줄기로는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갑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행복 추구권에 대하여 계속 고민합니다. 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인가? 인간에게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행복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추구하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인간이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가,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좀 차치하고서 말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예전에 들었던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죽도록 노력해라."
사실 필요한 것은 언제고 노력입니다. 주인공에게 세상일은 원하는 대로 풀려 주지 않고, 물론 그건 그 외에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받지 못합니다. 거기에서 그는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고 노력합니다. 성공은 바로 거기에서 옵니다. 운칠기삼이라고, 운이 칠 할이고 기술이 삼 할이라 성공에는 결국 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 사자성어는 다른 것도 의미합니다: 기술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상태에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이죠. 뭐, 보답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력은 필수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포기만 하고 있어서는 영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고 자신이 바라던 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게 될 수 없겠지요.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류의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윌 스미스는 확실히 연기를 잘 하긴 잘 하더군요. 덧붙여 여기에서 주인공의 아들로 나온 아이는 실제로 윌 스미스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제이든 스미스라니 성이 같잖아? 하고 보니 아들이더군요.
가브리엘 무치노 감독, 제이든 스미스 외 출연 / 소니픽쳐스
본 지는 두 주 가량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보았는데 꽤 볼 만 했지요. 이런 류의 드라마 영화도 저는 제법 즐기는 편입니다만, 사실 이런 식으로 '불행과 불행과 불행과 불행이 이어지는' 식의 전개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포레스트 검프>를 좋아하는 게 그 때문인데, 그 영화에서 포레스트 검프의 인생사는 사실 무척 우울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울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경쾌하게까지 보이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 이야기를 하려니 예전에 썼던 <포레스트 검프> 감상글이 무척 짤막한 것이 밟히는군요. 하기야 그건 워낙 블로그 초기에 쓴 감상이라 그렇긴 합니다만··· 이건 조만간 재감상을 하든지 해야지 원. (먼산) ···아무튼, 이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는 이를테면 '인생론' 영화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현재 속에서 미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죠. 줄거리로 말할 것 같으면 이렇습니다.
전재산 21달러, 돌아갈 집도 없었지만 아빠의 손은 따뜻했다!
모두가 경제난에 허덕이던 1980년대 미국 샌프란시스코. 세일즈맨 크리스 가드너 (윌 스미스)는 잠시도 쉬지않고 이곳저곳을뛰어다니지만 한물간 의료기기는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귀여운 아들 크리스토퍼 (제이든 스미스)는 엉터리 유치원에서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리는 신세에다 세금도 못내고 자동차까지 압류당하는 상황이 되자 참다 지친 아내마저 두 사람을 떠난다. 마침내 살던 집에서도 쫓겨나는 크리스와 아들 크리스토퍼. 이제 지갑에 남은 전재산이라곤 달랑 21달러 33센트 뿐.
주식중개인이 되면 페라리를 몰 정도로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크리스는 ‘남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함께 주식중개인 인턴에 지원한다. 덜컥 붙긴 했지만 인턴과정은 땡전 한푼 못받는 무보수일 뿐 아니라 60대 1이라는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야 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학력도 경력도 내세울 것 없던 크리스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 시설과 지하철역을 전전해야 하는 극한의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해지기 위한 마지막 도전을 시작하는데…
- 출처: 알라딘 DVD 소개글
사실 이런 영화를 볼 때는 감정몰입을 강하게 해서 보면 힘듭니다. 주인공의 기구한 삶이 참 보기 딱하거든요. 위의 줄거리만 보셔도 대강 짐작이 되시겠지만, 저 줄거리가 영화 중반까지의 스토리입니다. 그래서 저 주식중개인 인턴에 지원하고 도전하는데 그러고도 일이 잘 풀리는 건 아닙니다. 고생하고 또 고생하지요. 물론 전 다음과 같은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어서 그리 힘들지만은 않았습니다만: "이건 헐리우드 가족 영화야. 그러니 끝은 절대적으로 해피 엔딩이다."
이 영화가 실화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영화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한 생각이었죠. 물론 실화라는 것을 알았어도 크게 달라질 일은 없었겠지만요. 이런 류의 영화에서 실화를 근거로 영화를 만들었다 할 때 굳이 비극을 만들 이유가 없으니까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무려 크리스 가드너의 '자서전'에 기반했다고 합니다. 그러고보면 이 영화를 같이 봤던 모 군은 이런 말을 했더랬군요. "암울하고 암울하고 암울하고 암울한데, 그러고 끝까지 그냥 암울하고 끝나 버리는 게 <무간도>였죠." 이 영화가 <무간도>가 아니라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행복을 찾아서>가 이 영화 제목이고, 주인공은 '행복'을 찾아 매우 노력합니다. 물론 행복에 대한 견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크리스 가드너에게 있어서 지키고 싶은 것은 아들과의 행복이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몰랐으며 그래서 자신의 아들은 반드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게 하겠다는 결심을 했고, 가정을 지키고자 무진 노력을 합니다. 비록 잘 팔아보려던 골밀도 검사기가 마음처럼 팔리지 않아 고생하고, 결국 아내마저 떠나게 됩니다만. (이 놈의 골밀도 검사기는 영화 종반까지 계속 주인공을 따라다니는 존재입니다. 더 들이지는 않더라도, 재고는 팔아야 당장 생활비라도 마련되니까요. 이 검사기와 관련된 몇 가지 에피소드가 구슬픈 잔재미를 주긴 합니다만, 그건 이야기 줄기로는 중요한 건 아니니 넘어갑니다) 그리고 주인공은 행복 추구권에 대하여 계속 고민합니다. 왜 행복권이 아니라 행복 추구권인가? 인간에게 행복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행복은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추구하고만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죠. 인간이 어디에서 행복을 느끼는가, 현재에 만족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좀 차치하고서 말하면,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예전에 들었던 한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무엇을 원하는가?"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죽도록 노력해라."
사실 필요한 것은 언제고 노력입니다. 주인공에게 세상일은 원하는 대로 풀려 주지 않고, 물론 그건 그 외에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노력한 만큼 보답받지 못합니다. 거기에서 그는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고, 어느 순간 기회가 주어졌고,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잡고 노력합니다. 성공은 바로 거기에서 옵니다. 운칠기삼이라고, 운이 칠 할이고 기술이 삼 할이라 성공에는 결국 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이 사자성어는 다른 것도 의미합니다: 기술은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상태에서 나머지는 하늘에 맡긴다는 뜻이죠. 뭐, 보답받기 위해서는 언제나 노력은 필수라는 뜻입니다. 세상을 원망하고 포기만 하고 있어서는 영영 자신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고 자신이 바라던 바 다른 사람들처럼 행복한 표정을 짓게 될 수 없겠지요.
'나도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류의 영화입니다. 그리고 이건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윌 스미스는 확실히 연기를 잘 하긴 잘 하더군요. 덧붙여 여기에서 주인공의 아들로 나온 아이는 실제로 윌 스미스의 아들이기도 합니다. 제이든 스미스라니 성이 같잖아? 하고 보니 아들이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