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술가는 자신의 무술로 말하고 음악가는 자신의 음악으로 말하고 배우는 자신의 연기로 말하고 화가는 자신의 그림으로 말하고

작가는 자신의 글로 말한다.

현실이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건 다 핑계다. 정말 그것이 자신에게 소중하다면 자신에게 소중하다는 것을 자신이 행함으로 증명해야 한다. 능력이 부족하다면 능력을 키워서 통하게 만들어라.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가능한 모든 노력을 다하라. 때로는 자신의 이상을 위해 삶에서 무엇인가 포기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위해 살아가고 싶다면, 꿈을 위해 목숨을 걸 생각이 있다면,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는 자명하지 않은가.


화가 밀레는 매우 가난하게 살았다. 때문에 초기에는 나체화를 그려 호구지책으로 삼으며 화가의 꿈을 키워야만 했다. 그가 주로 그린 그림은, 아내의 나체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들이었다. 더러는 어린 소녀의 모습도 있었다.

어느 날 밀레는 그림 주문도 받을 겸 파리의 화랑가를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소녀의 나체가 그려진 파스텔화 앞에서 두 청년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서투른 그림인데! 선이 엉망이야. 구도도 그렇고.”
“밀레라는 자식이 그렸지. 벌거벗은 계집밖에는 아무 것도 그릴 능력이 없는 화가야.”

밀레는 거꾸로 치솟는 울화통을 간신히 참아 냈다. 그러나 그 울화통이란 그 말을 주고받는 청년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래, 저들 말이 맞아. 예술을 한답시고 너무 무책임하게 굴었어. 이제 나체 같은 건 결코 그리지 않을 거야!”

그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버렸다. 그나마 나체화를 그려 생활을 꾸려 가던 그에게, 나채화를 그리지 않는다는 것은 굶기로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빵을 구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던 나체화에서 손을 뗀 밀레의 생활은 거지와 다를 바 없었다. 다른 그림을 들고 화랑을 찾아갔으나 모두들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런 그림을 살 바보는 아무도 없을 거요. 차라리 예전처럼 나체화를 들고 오시오.”

화랑 주인들은 그에게 한사코 나체화만을 요구했다. 하지만 밀레는 자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한겨울에도 난로가 꺼져 추위에 떨어야 했고, 빵 한 조각 먹을 게 없어도 그는 나체화를 그리기 위한 붓을 들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시골로 돌아가 고달픈 심신을 전원에 묻고 농민들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 때 <만종> <이삭 줍기> 같은 불후의 명작이 태어날 수 있었다.

만약 그가 현실의 어려움 때문에 나체화를 붙들고 있었다면 당장 먹을 빵은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이름을 후세에 널리 알리게 될 명작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출처 : Success Partner .. 라고 하더군요. 이 글을 찾아낸 블로그에서>


나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쓴다. 이전도, 지금도, 앞으로도. 나는 글에 더 집중하며 살고 싶어서 전업작가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지 전업작가가 되고 싶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통하지 않는다면, 통할 때까지 노력하고 공부하고 써 내자. 살아가면서 닥칠 어떤 괴로움도 고통도 반가이 맞아 주자. 더 좋은 글을 써낼 자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