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도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굴복 또는 저항

Neissy 2010. 1. 7. 17:38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A.스뜨루가쯔키 외 지음/열린책들

 1970년대 말에 쓰여진, 러시아 작가의 반유토피아적 SF 소설입니다. 라고 말하면 짐작하실 수 있겠습니다만 이 소설의 기초는 당시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 것에 놓여있습니다. 물론 그걸 단지 소련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애당초 비유적이기도 하고,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한 체제는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 체제가 인간을 억압하는 일도 어디서고 일어나기 때문이죠. 사실 이렇게 좀 더 자유롭게 이해하지 않으면,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 소련도 무너진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제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시대적 배경도 염두에는 두어야 하겠지만요.

 이야기 자체는 간단합니다. 어떤 천문학자가 있는데, 이 사람이 무언가 획기적인 발견을 하게 되기 직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쓸데없는 전화가 자꾸 걸려오기도 하고, 뜻밖의 방문객이 찾아오기도 해서 그 발견을 방해받습니다. 그 날 밤 이 남자를 찾아온 옆집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은 웬일인지 다음 날 시체로 발견되고, 그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이 천문학자가 의심받아 천문학자는 자기의 연구를 도무지 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계속 발전되고, 이 천문학자의 친구가 몇 사람을 데리고 찾아오는데 이 천문학자의 친구도 천문학자와 경우는 조금 다르지만 비슷한 경우에 처해있음이 드러납니다. 각자 무엇인가의 발견을 하기 직전이고, 그 발견을 어떤 힘에 의해 방해받고 있는 것이죠. 그 힘이 자연의 의지인지 4차원 문명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무언가가 방해하고 있음은 명백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대상자를 파멸에 이르게까지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대상자는 굴복해야 할까요, 아니면 저항해야 할까요?


 ······ 그러나 적어도 내가 체제에 의해 제정된 일련의 법을 준수하는 한 나는 경찰과 군대와 노동조합과 여론과 친구들과 가족에 의해 모든 가능한 위험으로부터 보호될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속한 세계에서 무언가가 잘못 궤도를 벗어났고, 나는 하루아침에 구덩이에 빠진 메기의 꼴이 되어버렸다. 내 주위에는 상어의 그림자들이 막연하게 어른거렸다. 그들이 지느러미만 한번 살짝 움직여도 나는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었다. 한 가지 확실한 점은 내가 그 구덩이에 남아 있기로 결정한다면 목숨은 부지할 거란 사실이었다. ······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 p.137


 굴복할 수도 있고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그 굴복이 완전할 수 있고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저항 또한 완전할 수 있고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굴복하고 있을 수도 있고 굴복하다가 도중에 저항할 수도 있습니다. 언제까지나 저항할 수도 있고 도중에 굴복할 수도 있습니다. 여하간,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 년이나 남았고 (10억 년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두는 거죠, 여기선) 그 사이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법이죠.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런 상황에 처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소설에서는 그에 대해 세 가지 선택을 제시합니다. 그 선택들이 무엇인지는, 이 소설을 읽어보시면 알게 되시겠네요. 뭐 지금 이 문단 중에서 언급하긴 했습니다만.

 SF라지만 사실 SF가 아니어도 별 상관은 없을 소설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SF라 하지 않고 그냥 일반 소설이라고 해도 별 상관없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저런 과학적인 이론들이 등장하고는 있으니 (하지만 등장하지 않아도 이야기의 전개에는 솔직히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굳이 장르로 구분해야 한다면 SF이긴 하지만요. 읽기는 매우 수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