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인용으로 감상을 시작합시다: "냄새까지 느껴질 듯 생생하게 묘사된 캘리포니아. 필립 말로는 그 비열한 거리를 헤치며 나아간다. 가끔씩 무심한 말을 내뱉으며 낡아빠진 기사도를 꿈꾸는 그에게서 세상의 탐정 반이 태어났다. (decca - howmystery.com 운영자, 북하우스판 필립 말로 시리즈에 인용된 말을 재인용)" 그리고 다음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뒤에 실려 있는 장경현 (싸이월드 '화요 추리 클럽' 운영자)의 해설 일부를 다시 인용해봅시다: "'사립 탐정'이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사냥모자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셜록 홈스. 다른 하나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쓰고 트렌치 코트의 깃을 높이 세운 채 한 손에 권총을 든 남자. 후자는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느와르의 이미지이자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미지이며 바로 필립 말로의 이미지이다." 챈들러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그가 탐정물에 끼친 영향이 막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세상의 탐정을 둘로 나누어서 셜록 홈즈 류의 두뇌파 탐정과 필립 말로 류의 행동파 하드보일드 탐정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탐정 사와자키는 명백히 필립 말로의 계보를 따르는 하드보일드 탐정입니다. 작가인 하라 료 자신이 책머리에 "시미즈 슌지 선생, 후타바 주자부로 선생, 이나바 아키오 선생, 다나카 고미마사 선생의 번역에 감사드린다."고 적어놓았을 정도이니까요 (이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번역한 사람들입니다. 글쎄, 제 경우엔······ 박현주 씨께 감사드려야겠군요). 세상 속을 살아가지만 기사 같은 감각을 지니고, 시니컬한 척하지만 실제로 정말 그렇지는 못하고, 가끔 툭 던지는 대사가 정말이지 예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체는 되도록이면 건조하고 담담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입니다. 챈들러의 팬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만한 책입니다. 이 소설은 챈들러에게 반한 사람이 챈들러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입니다 (사와자키는 필립 말로와 정말 아주 많이 닮았지요. 필립 말로가 라이프치히 출간 '체스 토너먼트 책'을 본다면 사와자키는 '포석의 이해'를 본다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하라 료 자신이 책 마무리를 대신하여 붙인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단편을 꼭 봐야 해요).
물론 이 소설의 모든 부분이 챈들러식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역시 플롯 구성이 다르다는 점인데, 의뢰인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간단하게 보였던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고 마지막에 가서 풀린다는 기본 구조 자체는 다를 바 없습니다만 그 구조가 보다 탄탄합니다. 역시 인용인데, 책 뒤꼬리에 붙은 옮긴이 말에서 인용된 <본격 미스터리 크로니클 300>이란 책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대한 언급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라 료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플롯은 챈들러 이상으로 치밀하다." 흠, 이건 맞는 말입니다. 하라 료는 챈들러의 그 꼬여있고 (종종 수습이 덜 되는) 플롯보다 훨씬 치밀한 플롯을 보여주죠. 맞는 말이긴 한데······ 저로서는 이렇게 언급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런, 거기서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아, 꼭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챈들러보다 플롯이 치밀하다는 게 큰 칭찬은 아니니까요. 챈들러야 플롯이 꼬였기로 유명한 작가고, 애당초 그의 장점은 플롯이 아니죠. 그의 장점은 묘사력입니다. 1940년대의 미국 사회와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심하게 묘사해냈으니까요. 플롯에 대해서라면, 글쎄요, 제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죠: '다른 건 몰라도, 플롯만은 챈들러 그대로 따라가선 곤란하지.'라고요."
그래서 결국 어떻다는 이야기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사와자키 시리즈는 묘사에 있어서 챈들러를 능가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누구라도 어려울 겁니다. 챈들러는 바로 그 부분에서 엄청난 강점을 지녔던 사람이고, 그 스타일에 반해서 그 스타일을 따라가는 사람이 그 스타일을 능가하기란 엄청나게 힘들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냉정하게 말해) 챈들러의 아류 이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뭐 챈들러 같은 스타일의 글을 더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로도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명색이 작가로서 그런 글만 내어놓기도 부끄러운 일이겠죠. 하라 료의 소설에 의미가 있다면, 필립 말로 스타일을 일본식으로 잘 녹여내었다는 점입니다. 그게 뭐 대단하냐, 결국 아류라는 소리가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책중에서 작가 자신이 써놓은 부분을 잠깐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사무실에 나올 때 사온 팥빵과 우유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것 중에 변변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팔빵만은 예외라는 것이 예전 파트너 와타나베의 지론이었다. (p.191)" 물론 이건 어쩌면 별 의미 없는 문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라 료 역시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과작 (寡作) 작가라는 점,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를 존경한다면 틀림없이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터이며 아무 생각 없이 의미 없는 문장을 쓰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제게 저 문장으로부터 무언가 생각하게 만들죠. '이건 하라 료 자신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하고요.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했다는 게 비단 팥빵에만 해당되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팥빵이란 그 자신의 소설을 두고 이르는 말일 수 있겠죠. 저로서는 이 비유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고 절충한 스타일이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맛이 있어서, 꽤 괜찮다고, 그렇게 평을 내리고 있죠.
결론, 챈들러를 좋아하신다면 일단 읽어보세요. 저는 꽤 맘에 들어서, 이 시리즈를 모으기로 작정했습니다. 비채에서는 사와자키 시리즈를 계속 낼 작정이라 하니 제게는 아주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책 뒤의 옮긴이 말에도 적혀있지만, 혹시 이 책을 읽고 이 소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챈들러의 소설도 한 권쯤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아, 결국 전 갈 데 없는 챈들러 빠네요)
하라 료 지음, 권일영 옮김/비채
인용으로 감상을 시작합시다: "냄새까지 느껴질 듯 생생하게 묘사된 캘리포니아. 필립 말로는 그 비열한 거리를 헤치며 나아간다. 가끔씩 무심한 말을 내뱉으며 낡아빠진 기사도를 꿈꾸는 그에게서 세상의 탐정 반이 태어났다. (decca - howmystery.com 운영자, 북하우스판 필립 말로 시리즈에 인용된 말을 재인용)" 그리고 다음엔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 뒤에 실려 있는 장경현 (싸이월드 '화요 추리 클럽' 운영자)의 해설 일부를 다시 인용해봅시다: "'사립 탐정'이라는 단어를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는 아마도 두 가지일 것이다. 하나는 사냥모자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입에 문 셜록 홈스. 다른 하나는 중절모를 깊이 눌러 쓰고 트렌치 코트의 깃을 높이 세운 채 한 손에 권총을 든 남자. 후자는 미국 대중문화를 대표하는 느와르의 이미지이자 하드보일드 탐정의 이미지이며 바로 필립 말로의 이미지이다." 챈들러에 대해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그가 탐정물에 끼친 영향이 막대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세상의 탐정을 둘로 나누어서 셜록 홈즈 류의 두뇌파 탐정과 필립 말로 류의 행동파 하드보일드 탐정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네,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의 탐정 사와자키는 명백히 필립 말로의 계보를 따르는 하드보일드 탐정입니다. 작가인 하라 료 자신이 책머리에 "시미즈 슌지 선생, 후타바 주자부로 선생, 이나바 아키오 선생, 다나카 고미마사 선생의 번역에 감사드린다."고 적어놓았을 정도이니까요 (이 사람들은 모두 일본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 시리즈를 번역한 사람들입니다. 글쎄, 제 경우엔······ 박현주 씨께 감사드려야겠군요). 세상 속을 살아가지만 기사 같은 감각을 지니고, 시니컬한 척하지만 실제로 정말 그렇지는 못하고, 가끔 툭 던지는 대사가 정말이지 예리하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체는 되도록이면 건조하고 담담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입니다. 챈들러의 팬이라면 꼭 한 번쯤 읽어보아야 할 만한 책입니다. 이 소설은 챈들러에게 반한 사람이 챈들러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입니다 (사와자키는 필립 말로와 정말 아주 많이 닮았지요. 필립 말로가 라이프치히 출간 '체스 토너먼트 책'을 본다면 사와자키는 '포석의 이해'를 본다는 것도 그렇고······, 역시 이런 것에 대해서는 하라 료 자신이 책 마무리를 대신하여 붙인 <말로라는 사나이>라는 단편을 꼭 봐야 해요).
물론 이 소설의 모든 부분이 챈들러식이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가장 눈에 띄게 다른 점을 꼽아보자면 역시 플롯 구성이 다르다는 점인데, 의뢰인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간단하게 보였던 사건이 점점 복잡해지고 마지막에 가서 풀린다는 기본 구조 자체는 다를 바 없습니다만 그 구조가 보다 탄탄합니다. 역시 인용인데, 책 뒤꼬리에 붙은 옮긴이 말에서 인용된 <본격 미스터리 크로니클 300>이란 책의 <그리고 밤은 되살아난다>에 대한 언급에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하라 료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플롯은 챈들러 이상으로 치밀하다." 흠, 이건 맞는 말입니다. 하라 료는 챈들러의 그 꼬여있고 (종종 수습이 덜 되는) 플롯보다 훨씬 치밀한 플롯을 보여주죠. 맞는 말이긴 한데······ 저로서는 이렇게 언급할 수밖에 없겠군요.
"이런, 거기서 그렇게 말하시면 안 되죠. 아, 꼭 안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챈들러보다 플롯이 치밀하다는 게 큰 칭찬은 아니니까요. 챈들러야 플롯이 꼬였기로 유명한 작가고, 애당초 그의 장점은 플롯이 아니죠. 그의 장점은 묘사력입니다. 1940년대의 미국 사회와 그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은 흉내내기 어려운 방식으로 세심하게 묘사해냈으니까요. 플롯에 대해서라면, 글쎄요, 제 친구는 저에게 이렇게 말했죠: '다른 건 몰라도, 플롯만은 챈들러 그대로 따라가선 곤란하지.'라고요."
그래서 결국 어떻다는 이야기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사와자키 시리즈는 묘사에 있어서 챈들러를 능가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건 다른 누구라도 어려울 겁니다. 챈들러는 바로 그 부분에서 엄청난 강점을 지녔던 사람이고, 그 스타일에 반해서 그 스타일을 따라가는 사람이 그 스타일을 능가하기란 엄청나게 힘들죠. 그런 의미에서라면 (냉정하게 말해) 챈들러의 아류 이상이 되기 어렵습니다. 뭐 챈들러 같은 스타일의 글을 더 읽고 싶은 사람이라면 그 정도로도 의미가 없진 않겠지만, 명색이 작가로서 그런 글만 내어놓기도 부끄러운 일이겠죠. 하라 료의 소설에 의미가 있다면, 필립 말로 스타일을 일본식으로 잘 녹여내었다는 점입니다. 그게 뭐 대단하냐, 결국 아류라는 소리가 아니냐고 물으신다면, 책중에서 작가 자신이 써놓은 부분을 잠깐 인용해보겠습니다: "나는 사무실에 나올 때 사온 팥빵과 우유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한 것 중에 변변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팔빵만은 예외라는 것이 예전 파트너 와타나베의 지론이었다. (p.191)" 물론 이건 어쩌면 별 의미 없는 문장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라 료 역시 레이먼드 챈들러처럼 과작 (寡作) 작가라는 점, 그리고 레이먼드 챈들러를 존경한다면 틀림없이 문장 하나하나에 신경을 쓸 터이며 아무 생각 없이 의미 없는 문장을 쓰지는 않으리라는 점이 제게 저 문장으로부터 무언가 생각하게 만들죠. '이건 하라 료 자신의 소설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닐까?' 하고요. 서양식과 일본식을 절충했다는 게 비단 팥빵에만 해당되는 소리는 아닐 겁니다. 팥빵이란 그 자신의 소설을 두고 이르는 말일 수 있겠죠. 저로서는 이 비유가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새로운 스타일은 아니고 절충한 스타일이지만, 그건 그 나름대로 맛이 있어서, 꽤 괜찮다고, 그렇게 평을 내리고 있죠.
결론, 챈들러를 좋아하신다면 일단 읽어보세요. 저는 꽤 맘에 들어서, 이 시리즈를 모으기로 작정했습니다. 비채에서는 사와자키 시리즈를 계속 낼 작정이라 하니 제게는 아주 반가운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책 뒤의 옮긴이 말에도 적혀있지만, 혹시 이 책을 읽고 이 소설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면 챈들러의 소설도 한 권쯤은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아, 결국 전 갈 데 없는 챈들러 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