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 (양장)
리처드 애덤스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사계절출판사

 오랜만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토끼를 주인공으로 해서 일종의 모험기를 그려내었는데, 무엇보다도 마음에 든 건 토끼의 겉모습만 덮어씌웠지 실제로는 인간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다거나 하지 않고 사고방식이 무척 토끼스러웠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서랄지, 캐릭터를 잡아내고 사회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아무래도 토끼답지 않은 부분이 나타나긴 했습니다만 정말로 모든 것이 토끼다우면 이런 이야기가 만들어질 수도 없기 때문에 넘어갈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읽으며 즐거웠던 부분은 토끼의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과 묘사였는데, 이건 소설 자체가 묘사가 세세해진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도 독자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로서 흥미진진해진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더불어 우리는 인간 입장에서만 세계를 이해하지만 토끼의 입장에서 세계를 본다면 또 다르게 이해할 수 있다는 점도 재미있지요. 인간과 토끼의 관계를 이해할 때 우리는 인간의 입장에서만 바라보지만 토끼의 입장에서 본다면 또 달라집니다. 토지 개발, 농장, 덫, 기차. 토끼들에게는 과연 이런 것들이 어떻게 보일까요? 이 소설에서는 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이 계몽적인 느낌을 주지는 않습니다. 기본적으로는 토끼들의 모험기입니다. <워터십 다운의 열한 마리 토끼>라고 해서 꼭 주인공 토끼가 열한 마리이지는 않는데, 이건 아마도 원제 <워터십 다운 Watership Down>만으로는 토끼 이야기라는 느낌을 독자들이 받기 어려우니 바꿔놓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험기 이야기를 다시 하면, 모험기라고 하면 아무래도 굉장히 거창한 모험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인간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거창한 모험은 아닙니다. 기껏 수 킬로미터를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건 토끼 입장에서는 굉장한 모험입니다. 일생 살아가며 항상 적을 경계해야 하는 토끼가, 바로 도망칠 수 있는 굴을 근처에 놓지 못하고 수 킬로미터를 이동한다는 자체가 이미 모험이죠.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거대하며 또한 두렵습니다. 즉, 바로 그러한 입장이 되어서 모든 사물이 서술됩니다. 그러니 이게 인간 시선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데 익숙해진 우리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오게 되죠. 근 80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임에도 순식간에 읽어나갈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장 자체도 깔끔하게 읽힌다는 점도 한몫하겠습니다만.

 탄생된 캐릭터들이 개성 넘친다는 것도 이 소설의 매력 중 하나입니다. 예언가 파이버, 리더 헤이즐, 투사 영웅 빅윅, 그리고 또한 각기 다른 개성 있는 캐릭터들과, 대악당, 소악당, 온갖 종류의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사실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캐릭터는 다분히 인간적이기 때문에 토끼답지는 못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또 그들의 움직임과 묘사를 보면 완벽한 토끼이기 때문에 이게 단순히 토끼의 가죽을 덮어쓴 인간의 우화만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야, 토끼를 정말로 제대로 구현하면 소설이 아니라 동물기가 나왔겠죠.

 액자소설식으로 삽입되는 토끼들의 전설의 영웅, 엘-어라이어의 영웅담도 제법 재미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만 또한 그것이 현대의 토끼들에게 전통에서부터 지혜와 용기를 빌려와 행동하게 하는 힘이 되어줍니다. 전통을 부정하는 것과 전통을 긍정하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습니다. 그것을 소설 속에서 작가는 특히 카우슬립 마을 이야기로 삽입하여 그 마을 토끼들과 워터십의 토끼들을 비교시키는데, 전통을 부정하고 정체성을 부정하며 현실에 안주하기에 급급한 토끼들의 모습에서,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한번쯤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건 그렇고, 원래 이 소설은 작가의 아이들에게 들려주기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였습니다. 아마 이 소설을 읽을 때 '이거 너무 있어 보이려고 애쓰는군'이란 생각이 들지 않는 건 그래서일 겁니다. 어쨌든 작가의 딸인 줄리엣이 이걸 들려주는 이야기만으로 끝내긴 아깝다고 글로 써보라 권했고, 그런 연유로 이 소설이 탄생했죠. 초기에 이 소설은 출판사 여러 군데에서 퇴짜를 맞았는데, "나이가 찬 아이들은 토끼 이야기라서 유치하다고 싫어할 테고, 어린아이들은 어른 책처럼 쓰여 있어서 어렵다고 싫어한다"는 이유에서였답니다. 그러나 작가의 말을 그대로 빌려서, "이 책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흥미진진한 모험담과 적절한 교훈이 담겨 있으며, 지나치게 머리를 쓰게 하지도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게 하지도 않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판타지 모험담을 좋아하시면 꼭 읽어보시라고 강력히 추천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