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대우 옮김/열린책들

 도스또예프스끼 하면 '어렵다' '머리 아프다'고 생각하실 분이 많으실 텐데, 실제로 그렇습니다. ······라고 하면 이게 무슨 소리냐 하실 분이 계실 지 모르겠군요. '다들 어렵다고 말하지만 읽어 보면 그리 어렵지는 않다'는 쪽이 이런 류의 서두에서 주로 취하는 방식이니까요. 하지만 머리 아픈 걸 머리 아프지 않다고 하기는 어렵죠. 생각만큼 머리 아프지는 않다고 해도 머리 아픈 건 사실이랄까요.

 서두가 길었군요.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를 읽고 나니 저는 왠일인지 장광설이란 걸 한 번 늘어놓고 싶어졌더랬습니다. 요컨대, 장광설 늘어놓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그 이름 도스또예프스끼라는 소리죠. 흠, 도스또예프스끼를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란 기본적으로 그의 소설이 (기독교적으로) 관념적이며, 인물들도 무지하게 많은데 그 인간들이 다들 관념적인 내용으로 장광설을 늘어놓기 때문에 그 결과 분량이 더럽게 많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사유하기를 좋아하는 독자라고 하더라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다소 피곤해지지 않을까요. 이런 류의 장편소설이 많이 그렇지만, 소설 내에 또다시 소설이 있다고 해도 어울릴, 그런 소설입니다.

 간단하게 이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기가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까라마조프 일가를 중심으로 탐욕과 쾌락 등을 쫓는 인간군상의 모습이 펼쳐지고, 또한 그에 대비되어 고귀함을 쫓는 일단의 사람들이 보여지는 소설이라고 일단 간단히 줄여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파고들어보자면 그런 사람들의 형상이 (형상, 그렇죠,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모두가 그 어떤 관념의 형상이라고 하는 쪽이 어울립니다) 무척이나 다양하고 그 관계도 얽히고섥켜 있어서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지만요. 그도 어쩔 수 없는 게, 이 소설 분량이 무지막지합니다. 제가 읽은 건 열린책들의 하드커버판입니다만, 상-중-하로 나뉘어지고 근 천팔백여 페이지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분량을 보여주고 있어요. 사실 이 무식한 분량이 엔간해선 이 소설을 집기 만들게 만드는 원인이기도 하겠습니다.[각주:1]

 그렇다보니 이 책을 이제 겨우 한 번 읽었을 뿐인 제가 이 책에 대해 무언가 심도 있게 평을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건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맙소사, 책 뒤에 붙은 해설이 그냥 해설도 아니고 무려 논문입니다. 과연 도스또예프스끼. 역시 도스또예프스끼) 그러나 이 감상을 통해 나름대로 제가 받은 느낌을 정리하고, 또한 여러분께 전달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글이라는 걸 적어봐야만 하겠지요. 아, 여러분은 평상시 제 감상과 달리 이 감상이 뭔가 자꾸 서두를 붙이려 든다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굳이 지금 이런 문장을 또 덧붙이고 있는 것만 보아도 그렇군요)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장광설의 大家 도스또예프스끼를 읽은 영향인 것입니다······.

 각설하고. 이 소설은 '신'과 '인간'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이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지식 (굳이 신앙이라고까진 않겠습니다)이 필수적인데, 이 소설 내에서 대비되는 인물군들이 기본적으로 신을 긍정하고 있느냐 부정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도스또예프스끼야 소설 밑바탕에 기독교적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교적) 신앙을 깔고 있기로 유명한 작가고, 신을 부정한 인간이 어떻게 파멸로 치닫는가를 소설 내 여러 군데에서 보여주고 있지요. 소설 내에서 스메르쟈꼬프가 도달하고 만 결론인 '신은 없다. 즉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절대적 진리가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상대적이 되어버리며, 인간에게 절대적인 법이란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는 '신사'의 말마따나 "이익을 얻은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들은 바로 양심이 없는 사람뿐이지. 왜냐하면 양심이라곤 전혀 없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거든. 그 대신 양심과 명예심이 아직 남아 있는 점잖은 사람들이 고통을 겪게 되"고 맙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하, p.1419) 제가 예전에 <검은 집> 감상에서도 썼듯이, 절대적인 진리가 없으며 배금주의가 판치는 현재의 환경에서는 자신의 이득만을 추구하고 타인의 고통에 전혀 신경쓰지 않는 소위 사이코패스 같은 이들이 더욱 잘 살아남게 되잖을까요.

 그러나 적어도 도스또예프스키는 인간이 신을 통해 회복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가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알렉세이 까라마조프는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며, 에필로그에서는 소년들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심어주기도 하는, 단연 이 소설 내에서 돋보이는 존재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속물이어서 쾌락과 악덕을 쫓아 살게 되지만, 그러한 악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 힘은 인간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온다고 말할 수 있게 해주는 인물이죠. 인간의 기준이란 상대적이지만 신의 기준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방식이다보니 기독신앙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이를테면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여기서의 '신'을 인간이 만들어낸 어떠한 가치로 해석하려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렇게 된 신은 이미 기독교의 신이 아니죠)

 지금까지 제가 쓴 내용은 물론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대한 촌평에 불과합니다. 이 소설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그 인물들은 각기 자신의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들이 대립되고 부딪히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또한 화합되기도 하죠. 인물 하나에 대해서만 골라잡아도 논문 하나쯤은 간단히 나올 수 있습니다. 저는 일단 이 감상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지을까 합니다만.

 어쨌든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이천 페이지에 근접하는 무식한 분량에 비명을 지르고 인물마다 자기 이야기를 좔좔 늘어놓는 장광설에 '이런 더러운 도스또예프스끼'라고 고통하면서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던 건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내용과 그 표현이 결코 얕지 않기 때문이었죠. 솔직히 현대의 기준으로 볼 때 그 서술법이 좋다고만은 말하기 어렵습니다만 (일단 초반 백 페이지를 인물 · 배경 설명에 할애하고 있다는 것부터가······ ······그 부분을 지나서부터 좀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더군요) 괜히 도스또예프스끼가 유명해진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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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러나 정말 놀라운 사실은, '애초에 2부작으로 구상되었다가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완성되지 못했다'는 사실 (책 소개에서 인용)입니다. ······지금 분량도 충분히 무식한데 이게 1부였다니, 비명이 절로 나올법한 일이죠. 하지만 그렇게 알고 보니, 에필로그까지 봤어도 어쩐지 2부로 이어질 만한 여지가 있긴 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