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만 가지 죽는 방법
로렌스 블록 지음, 김미옥 옮김/황금가지

간단하게 스토리 라인을 소개하면, 무면허 탐정인 매트 스커더 씨한테 의뢰가 들어옵니다. 매춘부인 킴 다키넨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녀는 자신이 그 일을 그만두기를 원한다는 것을 자신의 포주인 챈스에게 말해달라는 거였죠. 사실 이 부분이 애매한데, 그녀는 챈스가 어떻게 반응할 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를 무서워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여하간 그녀는 스커더의 입을 빌려 의사를 밝히게 되고, 의외로 챈스는 매너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신사답게 다키넨을 풀어줍니다. 하지만 그 다음 날 다키넨은 시체로 발견되고, 매트는 챈스가 다키넨을 죽인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챈스는 오히려 다키넨을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달라며 매트에게 의뢰를 해 옵니다.

여기가 도입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 대개 그렇듯이, 주인공은 전직 경찰이고, 사회에서는 일종의 아웃사이더이며, 싸움을 약간 하는 편이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고, 추리력이 아주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강철 같은 의지로 단서를 물고 늘어져 결국 사건의 진실을 알아냅니다. ..라고 하면 물론 어폐가 있습니다. 저는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이라고는 필립 말로 시리즈와 이것밖에는 읽어보지 않았으니까요. 뭐 이런 편견을 갖게 된 데에는 필립 말로 시리즈의 해설에 담긴 내용: 필립 말로는 이후의 하드보일드 탐정 소설에 큰 영향을 주어 그 이후로는 탐정들이 전직 수사관이고 어쩌고.. ..뭐 그런 말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여하간 이 800만가지 죽는 방법을 읽으면서 필립 말로가 생각났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사실 여태까지 읽어본 것 중 이거랑 가장 비교가 잘 되는 것도 필립 말로 시리즈 밖에는 없었고요. 솔직히 필립 말로 시리즈와 비교한다면 이쪽이 캐릭터나 묘사나 그런 측면에서는 좀 약하다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필립 말로의 임팩트가 너무 강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설하고, 글 자체는 상당히 읽을 만 합니다. 추리와 사건의 해결이라는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추리소설만큼 강한 카타르시스를 주지는 못합니다만, 역시 하드보일드라면 그쪽보다는 오히려 사건을 풀어나가는 과정 그 자체, 그리고 사회 하층에서 살아가는 인간군상들, 쓰레기들로 가득한 사회이지만 그래도 살아 나가려는 마음. 뭐 이런 것들이 종합되어 있기에 매력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점이 제게 있어 매력 포인트이기 때문에 필립 말로가 더 생각났던 겁니다. 그나저나 지금 이 문단의 감상은 나중에 필립 말로 시리즈 감상 다시 할 때 쓰려고 했던 건데 써버렸네 이런이런)

아, 제목이 왜 '800만 가지 죽는 방법'인고 하니, 본문에서 인용하여 책 뒷표지에 적혀 있는 문단을 다시 인용해서 여기다가 적어보죠.

죽음에 이르는 800만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중에는 자기 손으로 목숨을 끊는 방법도 얼마든지 있다. 지하철 자살이 그다지 좋지 않은 방법임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철에 몸을 던진다. 뉴욕에는 끝없이 긴 다리들과 고층 빌딩의 창들이 있다. 또 면도날과 빨랫줄과 약을 파는 가게들이 하루 24시간 문을 연다. 내 방 서랍에는 32구경 권총이 있다. 호텔 방 창문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간단히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일을 시도해 본 적은 없다. 겁이 너무 많거나 불굴의 의지를 가졌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나의 지독한 절망이 생각만큼 절실했던 적은 없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드는 뭔가가 있는 모양이다.

여 담.. 이라고 하면 뭐합니다만, 사실 이 '800만'에는 사건 해결 말고도 또 하나 키포인트가 있습니다. 그건 이 매트 스커더가 알콜중독자라는 건데요, 이 남자는 술을 끊기 위해 금주 모임에도 나가지만 "제 이름은 매트고요, 오늘은 그냥 넘어갈게요" 소리만 합니다. 자신이 어떤 상황에 있다는 것도 말할 수가 없는 거죠. (맨날 저 소리밖에 안 하니 저도 다 대사를 외워버렸습니다) 왜 술을 끊어야 하는가? 이렇게 수많은 괴로움이 있는데 술을 먹어서 잊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라는 식으로 자문하기도 합니다만, 글쎄요, 여하튼 최후에 사건을 종결짓고 나서의 금주 모임에서 그는 자신의 문제를 분명하게 밝힐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소설은 끝이 나죠.

사실 이런 류의 소설에서 살인 사건과 그 해결은 중점적으로 처리되는 문제가 아닐 겁니다. 오히려 그건 소재에 불과하죠. 진짜는 거기에서 연결되는 여러 가지- 삶이나 죽음, 이를테면 신념, 살아가는 방식, 기타 등등, 그런 거죠. 그래서 이 알콜중독이라는 이야기가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잘 쓴 소설이에요. 그러니까 이렇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기도 하고요.

감상이란 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봅니다. 읽은 책이 어땠는가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과, 읽은 책이 어땠는가를 자기 자신에게서 되짚어 보는 것. 그래서 결론은 무엇이느냐고요?

그러니까 결국, 취향이란 겁니다. 네, 결국 취향이죠. 이런 게 취향에 맞는 분들은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무척이나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전 원래 당연한 소리밖에 하지 않는 사람인지라. 뭐 그러니까 '이런 게' 어떤 건지 주절주절 설명하기도 한 거죠) 하지만 뭐 어쨌거나, 취향에 맞지 않는다 싶으셔도 이런 것도 한번쯤 읽어보실 가치는 있지 않나 싶습니다. 소설의 재미 중 하나는 역시, 내가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도 삶의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담. 오늘 이 책을 다 읽은 저는 월급도 들어왔겠다 인터넷에서 필립 말로 시리즈 남은 네 권을 다 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제 취향에서는 말로 씨가 최고입니다. 아까부터 계속 필립 말로 필립 말로 했으니 다들 짐작하실 것도 같습니다만.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