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슬립
폴 트렘블레이 지음, 이소은 옮김/비채

 여기 비열한 거리를 지나가야 하는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 자신은 비열하지도 않고 세속에 물들지도 않았으며 두려워하지도 않는 사람. 그러나 사고로 인해 육체에 대한 정상적인 통제력을 잃었고 사회의 어둠을 파헤치기는커녕 자기 자신을 건사하기조차 버거운 사람. 그가 바로 폴 트렘블레이가 창조한 마크 제네비치입니다.

 그냥 봐도 짐작할 수 있다시피 제목인 <리틀 슬립>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빅 슬립>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표지의 남자는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크 제네비치라고 하긴 좀 무리가 있는데, 그는 사고로 인해 (그 자신의 표현대로라면, '피카소가 그린 얼굴보다 더 엉망이' 되도록) 망가진 얼굴을 중절모와 수염으로 가리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표지의 이 남자는 지나치게 멋있습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오마주를 드러내는 작품은 대개 일반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결코 동경의 대상이 된 작품보다 뛰어나지 못하다.' 많은 소설들에 'ㅇㅇ를 능가하는 ㅁㅁ'라는 수식어가 붙지만 그런 식으로 광고를 붙이는 시점에서 이미 누구나 그 소설이 원전보다 뛰어나지 못함을 알게 되죠. 아주 간혹,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요.

 한 가지 질문이 생기죠: <리틀 슬립>은 어떤 작품인가? <빅 슬립>보다 뛰어난가? (어떠한 소설을 다른 소설과 이렇게 비교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제목부터 이렇게 유사하게 달고 나온 이상 마음속으로 비교해버리게 되는 것도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안타깝다면 안타깝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습니다만, <빅 슬립>과 비교하면 여러모로 소박하다는 인상이 강하게 듭니다. 물론 레이먼드 챈들러로부터 온 하드보일드의 감성- 생생하게 묘사된 어두운 사회, 살아 숨쉬는 인물들, 모두가 썩어 있는 중에도 도덕을 추구하는 주인공 등은 확실히 나타나고 있지만, 더 화끈하다거나 혹은 더 깊이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지는 않아요. '강렬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리틀 슬립>은 단지 레이먼드 챈들러를 존경한 사람이 그런 풍으로 써내었을 뿐인,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성에 기대는 그저 그런 작품인가? 그건 또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무엇보다 <리틀 슬립>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것은 바로 제목이기도 한 '리틀 슬립'- 즉 기면증 (嗜眠症, narcolepsy)입니다. 기면증이란 간단히 말하면 깨어 있는 중에 돌연 참을 수 없는 수면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잠이 드는 순간이나 혹은 깨어나는 순간 환상을 보게도 되고 (입면 또는 각성 환각), 의식은 깨어있으되 몸을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게도 됩니다 (수면 마비). 주인공 마크 제네비치는 사고로 인해 기면증이 생겼고, 그래서 자신의 육체조차 제대로 통제할 수 없습니다. 소설 내에서, 바로 위에서 설명한 모든 증상들이 그에게 엄습합니다. 자기 자신과도 싸워 이기기 힘든 한 남자가 사회의 악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 이것이 <리틀 슬립>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냅니다.

 기면증은 이 소설의 모든 것을 만들어갑니다. 그는 환상과 맞서 싸워야 하고, 중요한 순간 잠들어버리는 것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는 의뢰를 받고 사건을 해결하는 사립탐정입니다. 그러나 기면증으로 인해 찾아오는 환상은 그에게 사건이 어떻게 되어있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게 만듭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항상 최악의 순간은 정신이 들고 난 바로 다음이다. 어디까지가 꿈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따위의 질문을 비웃고는 싶은데, 나는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꿈인지 모른다."는 것이죠. 그는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났다고 생각해서 잘못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일어났다고 생각한 일들'을 바탕으로 움직여야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언제 잠들어버릴지 모르고 그것이 일을 심각하게 망쳐놓을 수 있다는 걸 알지만, 어쨌거나 포기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법이니까요.

 마크 제네비치는 필립 말로에 비하자면, 솔직히 멋이 없습니다. 미덥지도 않습니다. 표지의 남자와는 백만 광년쯤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 자신의 말마따나 액션 영웅이 아니며 인터넷에서 데이터베이스나 찾는 그저 그런 탐정에 불과합니다. 기면증 발작은 계속해 그에게 달려들며 일을 망쳐놓도록 유도합니다. 그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입니다. 필립 말로는 자기 자신은 믿을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마크 제네비치는 자기 자신조차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싸워나갑니다. 기면증에 대항해, 어떤 불합리에 대항해 싸우기로 결심했으며 그렇게 살아갑니다. 이게 마크 제네비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사건의 진실 자체는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마크 제네비치가 헤쳐나가는 그 모든 '현실'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런 데에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리틀 슬립>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이 될 겁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