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십 트루퍼스
로버트 A. 하인라인 지음, 김상훈 옮김/황금가지

 이 책을 읽은 것 자체는 오래되었는데, 행복한책읽기 SF총서로 나왔을 때 빌려 읽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읽는 맛이 있어서 사볼까 싶다가 잠깐 미뤘더니 절판되었더군요. 최근에 서점에 갔더니 놀랍게도 이 책이 진열되어 있길래 아무 생각 없이 냅다 구입했습니다.

 <스타십 트루퍼스>에 관해서는, 사실 SF에 좀 관심 있다 하실 분들은 제가 이제 와서 소개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고전입니다. 은하계를 넘나들며, 병사가 강화복을 입고 일종의 초인이 되어 싸운다는 (물론 그 강화복 안에 디스플레이 등도 다 있어서 병사가 그걸 참고하면서 싸우는) 이 아이디어는 <기동전사 건담>이나 <스타크래프트> 등을 포함하여 정말 수많은 작품에 영향을 끼쳤다고 하죠. 이야기 전개를 떠나 강화복이라는 아이디어 하나만으로도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이야기 자체는 어찌 보면 정석적인, 멋모르던 주인공이 여자에게 잘 보이려 입대 → 갈 병과가 없어서 기동보병이 됨 → 훈련소에서 지옥훈련을 받음 → 실전을 겪으며 베테랑이 됨 → 진정한 군인이 되어 최종 전투에 나섬 .. 이라는 전개입니다만 작가가 실제로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해 장교로 근무했던 전적이 있는 만큼 그 서술이 실로 현실감 넘칩니다. 강화복 입은 초인을 만들기 위해 병사들에게 강화복 안 입은 상태로도 초인을 만드는 훈련을 시키는 덕분에 '이건 어디의 특수부대냐!' 싶어지는 무지막지한 장면들이 나오긴 합니다만, (신병 훈련소 과정 중간쯤만 가도 벌써 SEAL 대원은 맨발로 도망가야 할 정도로 무서운 인간들이 됩니다.. 훈련 시작시 2,009명의 신병이 졸업시에는 187명만 남았으며, 떨어져 나간 사람 중에는 14명의 사망자도 있었습니다. 정예 중의 정예 중의 정예 중의 정예..) 실제를 알고 과장하는 것과 상상만으로 표현하는 것에는 확실히 크나큰 차이가 있죠. 작가가 군을 실제로 겪었던 만큼, 이 소설의 군대는 실제로 어딘가에 존재하는 듯한 현실성을 지닙니다.

 이 작품을 이루는 뼈대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가 '강화복', 하나가 방금 말한 '군' 자체라면, 마지막 하나는 '폭력'입니다. 혹자는 폭력에 대해 거부감을 지닐지 모르고, 이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는 군국주의적 색채를 싫어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타십 트루퍼스>의 사회는 군을 마친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며, 잘못한 사람에게는 태형을 가하는 사회입니다. 그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현되어 있으며, 잘못한 사람에게 벌을 곧바로 줌으로써 범죄율이 급감하여 보다 나은 사회가 되었다고 작품 속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감상을 읽는 여러분은 어쩌면 이와 같은 견해에 동조하실지도, 아니면 반발하실지도 모르겠군요.

 그러나 어느 쪽이든, <스타십 트루퍼스>에서는 이미 그런 사회가 되었으며 그런 사회가 자체로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돌아가는 덕분에 굳이 다시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통을 알고 책임을 아는 사람들이 선거권을 가진 만큼 잘못된 사람을 뽑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줄었으며, 교도소에 가둬 '무엇을 잘못해서 잡혔는지 알았으니 이제 갇힌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해 다음 번엔 더 나은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없이 그냥 태형으로 해결함으로써 훨씬 범죄율이 낮은 사회를 구현한 것이죠.

 그에 관해서 가타부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가상 사회이며 그 속에서 구현된 하나의 모델입니다. 만약 제가 좀 더 어렸고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이 사회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러니저러니 말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점에서는 아마 제가 옛날과는 좀 달라진 것이겠죠. 그리고 무엇보다, 적어도 저는 일정 부분 폭력을 긍정합니다. 적어도, 이를테면 '힘이 없는 무저항은 인도주의자에게만 통하는 법'이라는 간디의 말을 긍정한다고 봐야겠죠. 이 소설에서 말하는 폭력에 대한 긍정은 그와 궤를 같이합니다. 싸우려 하지 않고, 평화를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좋은 일이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그리고 그냥 평화만 주창하다가는, 평화를 주창하지 않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삼켜질 것이다. 따라서 무려 책 표지에도 인용된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오는 것이죠.

 "폭력, 즉 순수한 무력은 역사상의 어떠한 인자가 그랬던 것보다도 더 많은 문제를 해결해 왔고, 그 반대 의견은 가장 나쁜 종류의 희망적 관측에 불과해. 이 기본적 사실을 망각한 종족은 언제나 그들 자신의 생명과 자유라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 p44. 뒤부아 선생의 말

 그래서, 이런 요소들이 녹아들어 <스타십 트루퍼스>를 형성합니다. 강화병은 독자를 흥미진진하게 해주는 요소, 주인공의 성장은 기본적인 이야기 전개, 그리고 이 폭력에 관한 철학이 독자로 하여금 현실을 되새겨보게 함과 동시에 주인공이 '왜 싸우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주죠. 이중 어느 것이 빠져도 <스타십 트루퍼스>의 오락적이면서도 비장한 맛은 나오지 않았을 겁니다.

 ······그리고 이게 영화판 <스타십 트루퍼스>가 이미 <스타십 트루퍼스>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된 이유죠. 거기엔 강화병도, 폭력에 대한 철학도 없습니다. 그냥 주인공이 군인이 되어 연애하면서 싸울 뿐이죠. 그건 그 나름대로 오락적으로 재미있긴 했습니다만, 소설과는 그냥 다른 물건이라고 생각하는 쪽이 좋습니다. -아, 이 이야기를 빼먹을 뻔했네요. 사실 제가 가장 처음 본 건 영화판이었습니다. 중딩인가 고딩 시절 VHS 비디오로 빌려 보았죠. 나름대로 재미있게 보았습니다만, 나중에 대학생이 되었을 때 소설을 보니 이건 전혀 다른 물건이더군요······.

 뭐, 그런 소설입니다. 폭력이나 군에 좀 거부감이 있으시다면 읽기 불편하실 테고, 그쪽을 긍정하신다면 꽤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밀리터리에 SF를 끼얹은 것 같은 소설이니까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