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영춘권/수련단상 2022. 2. 12. 16:12

무술은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한 기술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전 강한 자가 더 강한 자를 이기기 위한 기술이라고 보는 편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약한 채로 누군가를 이길 수 있지 않으며, 누군가를 이기겠다고 생각한다면 당연히 강해져야 하는 게 옳다고 생각한다는 거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전 저보다 강한 사람을 이길 자신은 없습니다. 저보다 약한 사람을 이길 수 있겠죠. 하지만 또 이렇게 말하면, 누군가는 그럼 뭐 하러 무술을 배우냐, 약한 사람 이기는 거 누가 못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을 텐데, 제가 말하는 '저보다 약한 사람'이란 건 모든 면에서 저보다 약한 사람을 뜻하는 건 아닙니다. 제가 추구하고 단련하고 수련한 영역에서 저보다 약한 사람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뜻이죠.

조금 다르게 말해볼까요. 무술마다, 사람마다 잘할 수 있는 부분이 있고 전략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타격을 잘하는 사람이 있겠고 그래플링을 잘하는 사람이 있겠죠. 타격을 잘하는 사람은 잡히고 꺾이는 상황을 피해 타격을 하고자 할 테고요. 그 와중에서 상대방보다 무언가 하나라도 자신이 나은 부분을 찾아 거기에서 승부를 거는 게 맞을 겁니다. 제가 말하는 '저보다 약한 사람'이란 건 그런 의미에서 저보다 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제가 하는 건 영춘권이고, 저는 영춘권이 좋습니다. 치사오 거리- 즉 상대방과 팔과 팔이 닿는 거리에서 공방하는 걸 저는 그럭저럭 괜찮게 할 수 있고, 따라서 제 전략은 여기에서 승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겁니다. 보법 연습은 이것 때문이기도 한데, 상대방이 원하는 거리는 제가 원하는 거리와 늘 같은 것이 아니니 제가 좋아하는 거리를 만들어내려면 파고들거나 흘리고 빠지는 것도 할 수 있어야만 하겠죠. (그렇기 때문에 도장에서도 자주 연습합니다. 중요한 연습이죠)

혹 영춘권이 강한 부분 이외에서도 강하고 싶다며 다른 무술을 함께 섞어 배우는 걸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게 높은 수준으로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저처럼 하루 두세 시간 연습하는 수준에서도 충분한 연습량이 나올지는 잘 모르겠고, 그래서 제가 선택한 건 제가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영역의 수준을 확실하게 올려둔다는 겁니다. 이렇게 말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한마디로 그냥 영춘권 하기만도 벅차다는 뜻이죠. (ㅋㅋ)

결국 이런 건 성향이긴 한데, 제가 기본기 연습에 투자하는 건 어쨌거나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범용성이 높을 기술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술이야말로 충분히 강할 필요가 있죠. 연환충권만 매일 오천 번쯤 치고 있으면, 영춘권 펀치가 위력이 없다거나 하는 말은 나올래야 나오지 않습니다. (사실 삼천 번 정도만 쳐도 괜찮습니다. 아니어도 천 번 정도는 해주는 게 좋고요) 기본 중의 기본 기술이 위력적이지 않다면 그 후에 전개될 어떤 기술도 위협적이지 않겠죠. 충권이 막히면 다른 걸로 바로 이어지는 건 당연하지만, 충권으로 끝낼 수 있으면 그냥 충권으로 끝내버리는 게 이상적입니다. 이런 건 상대적인 문제라 위에는 또 그 위가 있는 법이라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할 수 있는 만큼 해야 그다음을 논할 자격이 있겠죠.

사실 즐거워서 하고 있는 영춘권임에도, 세월이 흐르면서 뭔가 저도 영춘권과 관련해 뭘 증명해야 할 것만 같은 묘한 책임감을 느끼는데, 그렇다고 또 그렇게 거창하게 뭘 하려고 할 필요는 없는 것도 같고, 어쨌든 계속 연습하고 무언가 연구해보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