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다는 말이 있어서, 간단하게 적어보려 합니다.

  우선 왜 기독교에서는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고 생각하는지 이유를 짚어보죠. 대개 다음과 같은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살인은 죄이며, 스스로를 죽이는 것은 자신을 버림과 동시에 회개할 기회조차 스스로 없애버리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자체는 아주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기독교에서 무엇으로 구원을 받는지 안다면 그 때문에 지옥에 간다고 말하지는 않게 될 것입니다. 우선 아주 근본적인 점을 하나 짚어 두면, 기독교에서는 '그 누군가가 구원받을 만큼 잘 행동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어쨌든, 천천히 다시 살펴보죠.

 살인은 죄이다: 맞습니다. 살인은 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잘 알고 있는 십계명에 기록되어 있죠. 좋습니다, 살인은 지옥에 가기에 충분한 죄일까요?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은 살인은 충분히 지옥에 갈만한 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것도 하나 생각해봅시다. 우리 주위 사람의 소유물을 갖고 싶다고 생각하는 일도 지옥에 가기에 충분한 죄일까요? 답은 '그렇다'입니다. 십계명에서는 동등한 항목으로 나열되어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계명 중의 제 십계명이죠.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적질하지 않고,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않았더라도,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않았다면 살인한 것과 다름없는 죄를 지은 겁니다. 내가 꼭 살인하지 않았더라도, 이웃의 소유를 탐내는 것만으로도 기본 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회개하면 괜찮잖아? 여기에 약간의 (그리고 어쩌면 치명적인) 오해가 있습니다. 회개는 죄에 대한 면죄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말하기 이전에, 과연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전부 회개할 수 있느냐?'하는 것을 먼저 생각해보도록 합시다. 살인에 대해서 잠깐 다시 살펴봅시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을 보죠.

5:21-2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5:27-28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덧붙임: 이 포스트에서 성경말씀은 모두 개역개정판의 번역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고, 간음하지 않은 것으로만 "나는 십계명을 지켰고 그로 인해 구원에 이를 만한 의를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신 말씀입니다. 인간이 율법을 지켜내고 스스로의 의로 구원을 이룰 수 있다는 환상에 대해 일갈하신 말씀이죠.

 단지 사람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화를 내고, 어리석다고 말하거나 (=라가), 그의 인격을 무시하는 어떠한 행위를 하는 것도 모두 살인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모두가 지옥 불에 들어가기에 마땅한 죄라고 말씀하고 계시죠. 또한 간음은 어떻습니까?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오 섹시한데"라고 말하는 것도 모두 간음한 것과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옷 야실야실하게 입고 다니는 여자들은 모두 남자들을 간음하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즉 이것은 사람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만한 의를 성취해내는 일이 불가능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원에 이를 의는 말 그대로 완전무결, 무흠함을 말하며,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 성취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죄 지은 인간을 위해 예수께서 대신 돌아가셨고, 그 대신한 죽음이 자기를 위한 죽음이었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구원을 선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에서 선행은, 선행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감사함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로마서 3장 19절로부터 24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율법과 구원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내용 자체는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것이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말씀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면, 그 말씀은 율법 -하나님께서 명시하신 죄에 대한 법-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혹독한 기준을 두고 있음을 말해주는 동시에, 인간이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모두 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줍니까?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살인과 같은데, 우리는 그 모든 것에 대해 회개할 수 있나요?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또한 죄를 지었어도 회개하는 것은 그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이 부분을 잘 아셔야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회개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멀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있습니다. 이사야 59장 1-2절에서 이사야는 죄가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는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죄를 가까이 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이 그분에게 가까이 할 수 없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데, 스스로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그가 지었고, 짓고 있고, 앞으로 지을 모든 죄를 씻어 주시는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이며 또한 사탄이 끊임없이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를 갈라놓고자 힘쓰기 때문에, 죄를 짓고서도 회개하지 않는 인간은 그 죄가 스스로 걸려서 하나님께 떳떳하게 나아가기 힘들게 됩니다. 바로 그 때문에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모든 죄로부터 자유하다, 어차피 모든 죄를 한번에 씻음받았는데 내가 무슨 일을 하든 어차피 천국에는 가지 않느냐"고 해서는 또 곤란하며 이런 생각을 매우 경계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5-21절에서 말씀하신 다음과 같은 내용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물론 기본적으로 구원은 예수님의 대속하심을 믿는 것으로 이루어지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또한 행동이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불가분의 관계로, 함께 이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봅시다. 시인이라고 자처하지만 시 한 줄 쓰지 못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할까요? 꽃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꽃을 무참하게 짓밟는 사람은요? 정치인이라고 말하지만 싸움박질만 하는 사람은 또 어떻습니까?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 2장 14-17절에서 야고보는 행함이 따르지 않는 믿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이들은 행함이 따르기 마련이고 우리는 정말로 구원받은 사람들을 그들의 행동으로 알아볼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데 정말 구원받았을까?' 하는 고민을 가끔이라도 하시는 분은 아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단지 교회에 다니는 것만으로 구원받았다고 믿고, 행동은 개차반이고 전혀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죠.

 아, 그나저나 간단히 쓴다고 했는데 결국 점점 간단하지 않게 되어 가네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1. 자살은 분명 죄이며 회개할 기회조차 저버린 채로 죽은 것이지만, 애당초 우리의 구원은 죄를 짓지 않고 또한 지은 죄를 회개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살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크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인간은 어차피 다 지옥에 떨어지기에 충분한 죄인이다.

 2. 구원 그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대속하심을 믿는 것으로만 이루어진다. 선행과 회개는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존재한다.

  3. 그러나 생활이 전혀 변화되지 않고, 죄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이며 구원받았는지 의심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죄를 증오하시므로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죄를 즐기는 것은 모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몸 자체는 성화되지 않은 채이므로 죄를 아예 짓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스스로의 의로 구원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4. 어쨌든, 자살한 사람이 꼭 지옥에 떨어진다고 말할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자살은 왜 문제가 되는가? 그것은 자살이 죄이기 때문에 문제라기보다도 사람이 왜 자살하느냐를 생각해보는 쪽이 옳으리라 생각됩니다. 기본적으로 자살은 그 사람이 살 소망이 끊어졌을 때, 즉 자신의 상황이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되지 않으며 어떤 해결책도 보이지 않을 때 절망하여 이루어집니다. 답은 간단히 나오는 듯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인이 자살한다면 그것은 그가 온전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삶을 더 낫게 해주리라고, 자신의 삶에 의미를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슬픈 일이지요.

 이것이 자살한 사람에 대한 정죄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이 너무도 괴로워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해결해보려 하기 이전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옳으리라는 뜻입니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지 못하게 살아갑니다. 실제로 기독교에 대한 많은 정죄와, 심지어 '개독'이라고까지 불리우는 작금의 현실은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세상적인 원리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세상적인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5-3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한 세상에 패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든지 나올 것입니다. 문제에 처했을 때 인간적인 방법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려 하지 맙시다. 물론 그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만, 그것은 오로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결과만을 (다시 말해 딱 그만큼의 결과만을) 내어놓을 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비그리스도인과 동일하다면,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덧. 술에 대하여: 술은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특히나 더욱 그러합니다. 에베소서 5장 16-18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술을 즐긴다면 매우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하나님께 제대로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가 되기 때문입니다.


  덧2. 최진실: 약간 덧붙여두어야 할 듯합니다. 저는 그분을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제 부모님은 최진실을 실제로 보기도 했고, 아주 호감이 있었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그분의 삶이 점점 망가지고, 결국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까지 된 일에는 씁쓸함과 슬픔을 느낍니다. 근래에 그분의 인터뷰를 본 적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기도에도 나가지만, 술을 먹는 일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것을 알게 되었었죠. 그래도 그녀가 신앙으로 잘 이겨내길 바랐는데, 불행히도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녀가 신앙으로 아픔을 극복해냈더라면, 혹은 제대로 치료를 받았더라면, 무너진 자존감이 다시 세워질 수 있었더라면. 그러나 나는 이런 모든 일들이 지금 그분에게는 아무런 고통도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 (정확히 말하자면 전 단계인 낙원이지만)에서 여태까지의 모든 고통을 잊고 편안하게 있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분이 지옥에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덧3.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가겠지요. 그들이 세상에 휩쓸리지 않기를.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