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에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박경서 옮김/아테네

헤밍웨이의 문체는 간결합니다. 건조하고 짧으며 감정을 선뜻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심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일상의 한 부분을 놀라우리만치 세심하게 파헤칩니다. 문장 안에 숨겨진 감정을 읽게 하는 것이 헤밍웨이이죠. 사실 헤밍웨이의 문체가 이렇게 간결한 데에는 그가 기자 생활을 꽤 한 영향이 있습니다만. 제가 좋아하는 하드보일드란 게 애시당초 헤밍웨이로부터 나온 문체이니, 이만하면 제게 어떤 느낌인지 짐작이 가시리라 믿습니다. 사실 그냥 헤밍웨이라고 하면 의외로 모르는 사람도 있는데, <노인과 바다>라거나 <무기여 잘 있거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언급하면 "아아, 그 사람!" 하고 떠올리게 됩니다. 꽤 유명한 작가이지요.

이 단편집은 단편이면서 연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각각의 단편은 그 자체로 완결됩니다만 또한 다음 단편에서는 시간이 지난 후의 또 다른 이야기를 함으로써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이 느낌은 레이먼드 카버의 <제발 조용히 좀 해요>를 읽었을 때와도 비슷한 데가 있는데, 레이먼드 카버는 일상을 회쳐내어 펼치는 데 매우 능숙한 작가입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도 그러한 느낌이라, 삶의 어떤 한 부분을 꺼내어 세심하게 ㅡ단지,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로ㅡ 펼쳐 보입니다. 약간의 액자소설식 구성도 눈에 띄는데, 이 단편집에서는 챕터 (달리 말하면 각각의 단편) 도입부의 프롤로그 같은 부분이 단편 그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단편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이야기를 일단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 프롤로그들끼리 서로 이야기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 덧붙이는데, 이 프롤로그들이 연결된다는 것은 이 단편집의 단편들이 동떨어져 있지만 서로 연결되듯이 그렇게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내용 자체에 대해서는 딱히 크게 할 말은 없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은 헤밍웨이의 자전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알기 쉽게 주제를 떡하니 던지기보다는 일상을 보여주고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요. 죽음, 삶, 만남, 이별 등에 대해서 말입니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지요. 저는 이런 방식을 좋아합니다. 아, 좀 다른 이야기지만, 헤밍웨이 하니 문득 <안녕 내 사랑>에서 필립 말로가 했던 농담이 떠오르는군요. 그 때 필립 말로는 경찰과 이런 대화를 했죠. "농담 좀 한 거요. 케케묵은 농담이지." "헤밍웨이라는 사람이 누구길래?"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훌륭하다고 해줄 때까지 똑같은 내용을 계속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남자지." "그러자면 시간이 죽도록 오래 걸리겠군." (<안녕 내 사랑>, 239p) 물론 이런 식의 농담은 모든 작가들에게 (<안녕 내 사랑>의 작가인 레이먼드 챈들러 자신에게도) 되돌아가는 부메랑 같은 농담이긴 합니다.

번역은 무난한 수준입니다. 다만, 이 책을 만약 읽으실 분이 있다면 책 제일 앞에 붙어 있는 역자 서문은 일단 책을 다 읽은 후에 읽기를 권합니다. 단편의 내용을 미리 다 설명해 버리더군요. 내용을 미리 짐작하고 가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만, 우선 자신의 시각으로 한 번 읽어 본 후 해설을 읽는 쪽이 더 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면 제 감상 자체도 제 시각을 여러분께 제시하고 있는 것이니, 이 말 역시 제게 부메랑처럼 돌아오긴 하겠습니다)


여담. 문득 생각났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시절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에 목표로 삼았던 것이 헤밍웨이의 문체였군요. 간결하지만 표현하려는 바는 모두 표현하는 문체를 지향했었죠. 그 후 나름대로 다른 문체를 만들어 갔지만, 또 다시 되돌아온 것이 하드보일드라니, 이게 제 취향이긴 취향인가 봅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