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종교개혁사상> (Alister McGrath, <Reformation Thought> 3rd Edition)의 제 3장인 '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수업 과제라서요. 뭐, 이 블로그에 오시는 분들 중 이걸 읽을 분이 얼마나 있을까는 싶습니다만, 저는 언제나 그렇듯 누군가 봐서 유용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올립니다. (사실 좀 더 솔직한 이유를 말하자면 이거 하자고 네 시간은 소모되었으니 아까워서라도 포스팅 거리 채우자는 심산이 있..)

 무슨 내용인가를 설명하면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도움을 준 원인인 인문주의의 발흥과 그것이 종교개혁에 어떤 작용을 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사실 제 말이라기보다는 앨리스터 맥그래스의 말입니다만 어쨌건 저는 제 견해가 있을 만큼 뭘 배운 사람이 못 되어서요. (낄낄) 그래도 나름대로 제 말로 바꾸어 설명한 겁니다요.

 뭐, 부담 없이 읽어 주세요. ←


1. 르네상스의 개념

 보편적으로 르네상스 (Renaissance)는 14-15세기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문학과 예술의 부흥을 가리킨다. 어떤 역사가 (중에서도 야콥 부르크하르트 (Jacob Burckhardt)가 유명하다)들은 르네상스가 현대를 낳았다고 주장하는데, 중세 시대의 공동체 의식에서 벗어나 인간이 처음으로 자신을 ‘개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순수하게 개인주의적으로 보기에 이탈리아 르네상스 인문주의에는 집단적 가치의 측면이 강했고, 이것은 도시생활과 정치, 상업과 가정생활 등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저 주장을 그대로 모두 받아들이기에는 문제가 있다.

 왜 이탈리아가 -혹 특수하게는 플로렌스가- 르네상스의 요람이 되었는가에 대해 몇 가지 요인을 검토할 수 있다. ① 이탈리아에 있는 고대 로마문명이 당시 문화를 황량하게 느끼고 있던 사상가들에게 자극을 주었다. ② 이탈리아에서는 스콜라 신학이 영향력이 약했으며, 이탈리아인으로 신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던 토마스 아퀴나스 (Tomas Aquinas) 등도 북유럽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14세기 내내 지적인 공백이 있었다. 이 공백을 채운 것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였다. ③ 플로렌스의 정치적 안정은 이 도시의 공화정부를 유지하는 일에 달려 있었으며, 따라서 로마 공화정 연구가 관심을 얻게 되었다. 그 모델에 포함된 것이 문학과 문화였다. ④ 플로렌스의 경제적 번영이 여가생활을 창출했고, 그에 따라 문학과 예술이 요구되었다. ⑤ 동로마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하며 헬라어를 말하는 지식인들이 서방으로 탈출하였다. 많은 지식인이 콘스탄티노플에 가까운 이탈리아에 정착했으므로 헬라어의 부흥과 헬라어 고전에 대한 흥미 부흥이 일어났다.


2. 인문주의의 개념

 인문주의라는 용어는 19세기의 발명품이며 르네상스 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인문주의를 보는 두 견해는 ① 고전학문과 언어학에 전념하는 운동으로 보는 것과 ② 르네상스의 새로운 철학으로 보는 것이 있는데 둘 모두 심각한 결점이 있다.

 물론 르네상스에 헬라어와 라틴어 고전에 대한 연구가 널리 이루어졌으나 단순한 학문운동이기보다는 하나의 수단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기록된 웅변의 모델로서 고전을 연구하며 거기서 영감을 얻고 훈련하고자 하였던 것이었으므로, 고전연구와 언어학은 어디까지나 고대의 자료들을 이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인문주의가 스콜라주의의 반작용으로 일어난 새로운 철학이기 때문에 르네상스 시대는 플라톤의 시대였고 스콜라주의 시대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였다는 주장이 있고, 르네상스가 반종교적인 현상으로 18세기 계몽운동 세속주의의 전조였다는 주장이 있으며, 혹은 공화주의 운동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이런 해석들은 다음과 같은 어려움을 가져다 준다:

 ① 인문주의자들이 철학에 공헌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들의 일차적 관심은 웅변능력의 향상이었다. 즉, 한스 바론 (Hans Baron) 같은 이의, 인문주의가 키케로 (Cicero)를 연구하여 사상에서 유익을 얻고자 했다는 주장은 인문주의자들이 대부분 키케로의 정치사상보다는 저술 방식을 위해 키케로를 읽었다는 관찰기록으로 힘을 잃게 된다.

 ② 인문주의는 작가간의 이질성이 큰 운동이었다. 어떤 이들은 플라톤을, 어떤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애호했으며, 인문주의자 간의 정치적 입장은 각기 달랐다. 또한 어떤 이들은 마술과 미신에 사로잡혔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이 운동은 어떤 일관된 철학 · 정치사상으로 특징지어질 성질의 운동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폴 오스카 크리스텔러 (Paul Oskar Kristeller)가 제기한 인문주의 견해가 중요하다. 그에 따르면 인문주의자가 되는 것은 웅변술에 가장 우선적인 관심을 가지고 다른 문제에 부수적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인문주의는 본질적으로 문화 프로그램이며, 웅변술의 모델로서 고대 고전을 끌어들였다. 요컨대 그 사상들의 실제적 내용보다는 사상들이 어떻게 획득되고 표현되었는가에 큰 관심이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의 큰 특징을 이루는, 사상의 다양성은, 그러한 사상들을 어떻게 도출하여 표현하는가에 대한 일반적인 합의를 기초로 한다.


3. Ad fontes - 근원으로 돌아가기

 인문주의의 문학과 문화 프로그램은 ‘근원으로 돌아가자 (ad fontes)’라는 슬로건으로 요약 가능하다. 중세시대의 비루함을 피해 고전시대의 지적 · 예술적 영광을 회복하고자 했고, 기독교회에 이것을 적용하면 기독교의 권리증서들 -즉 교부 저술가들-과, 궁극적으로는 성경으로 직접 돌아가는 것이 된다.

 이 슬로건은 단순히 문명 재생을 위한 자료 검토뿐 아니라 이 자료들을 향해 가질 태도까지 규정하였다. 고전 자료들을 그 자료를 쓴 이의 경험을 재발견하려는 시각에서 읽었다. 신약성경이라면,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신자들의 만남이 묘사된 부분에서, 르네상스 후기 독자들이 그들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성경본문에 접근하는 식이었다.

 이런 시각은 그 당시의 교회에 의해서는 막혀 있었다. 인문주의자들이 고대 원문에 대해 가진 존경심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고전 본문은 하나의 경험을 후세에 전해 주는데, 이 경험은 올바른 방법으로 본문을 다룰 때에만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르네상스 사상가들이 개발한 새로운 언어학적 · 문학적 방법들이 고전 시대의 생명력을 다시 포착하게 해 줄 한 방법으로 여겨졌으며, 기독교회에 있어서도 이것은 신약성경에 묘사된 그리스도인 최초의 경험들이 재현되고 후대까지도 계속 생명력이 있는 형태로 전달될 수 있게 될 기회였다. 사도시대- 교회의 황금시대가 다시 한 번 현재에 실재하게 할 방법이었다. 이로써 당시 유럽 전역의 수많은 개인과 집단들은 교회 역사에 새 시대가 동터오리라 기대하게 되었다.


4. 북유럽의 인문주의

 사실 종교개혁에 영향을 끼친 인문주의는 이탈리아 인문주의라기보다 북유럽 인문주의다. 이탈리아로부터 유래되었으나 북유럽의 상황에 관련성이 있다고 여겨진 것들이 수용되고 채택되었다. 북유럽 인문주의를 크게 특징하는 세 가지 이상은 다음과 같다: ① 훌륭한 문학 (bonae litterae) -고전 양식을 좇은 웅변기록이나 구두웅변-에 관심을 가졌다. ② 교회 공동의 부흥을 꾀하는 종교적인 프로그램을 가졌다. ③ 프랑스-이탈리아 전쟁에 대한 반발로써, 16세기 초 북유럽 인문주의의 어떤 부분은 강력하게 평화주의적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스위스 동부는 지리적 조건 덕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사상을 잘 받아들였다. 스위스 인문주의는 강력하게 윤리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으며, 성경을 하나님의 약속을 설명해 주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그리스도인에게 올바른 윤리적 행동을 지시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이들에게 칭의는 관심 밖의 문제였으며, 스위스 인문주의자들에게 루터는 도덕을 위협하는 과격한 사상을 발전시킨다고 보여졌다. 1519년 쮜리히에서 시작된 쯔빙글리의 개혁 프로그램이 스위스 인문주의가 지닌 도덕주의의 보증서가 된다. 쯔빙글리가 (아마도 1523년경에, 1525년에는 확실히) 도덕주의를 파기하기까지는 그의 개혁 프로그램이 당시 특징적이었던 스위스 인문주의 동호회들의 도덕주의적 교육관에 기초하고 있었다.

 16세기 초에 프랑스에서는 법률 개혁이 프랑스 근대화를 위한 필수적 과정으로 여겨지고 있었고, 기욤 뷔데 (Guillaume Bude)라는 학자는 웅변적이고 실용적인 로마법으로 직접 돌아가 이를 프랑스의 새로운 법률적 필요 충족 수단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프랑스는 중세 법학자들의 주석과 주해에 의존하여 고전 법률서의 본문을 읽은 이탈리아와 달리 직접 원어로 고전 원서를 다루는 과정을 발전시켰고, 이 결과로 주석과 주해서를 원문 연구의 장애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프랑스의 법률적 인문주의가 절정에 있을 동안 부르제와 오를레앙에서 공부한 존 칼빈 (John Calvin)은 뷔데의 영향을 받게 된다. 프랑스의 합리적 인문주의로부터 유능한 언어학자가 되고, 일차 자료 본문에 직접 접근하고, 언어적 · 역사적인 상황의 변수 안에서 해석하고, 그것을 자기가 사는 시대에 적용하기를 배운 것이다.


5.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

 루터나 칼빈에게는 그리 영향이 크지 않았을지 모르나 쯔빙글리나 부써 (Bucer) 등에게는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가 로테르담 (Rotterdam)의 에라스무스 (Erasmus)이다. 종종 그는 북유럽 인문주의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람으로 설명되기도 하나, 에라스무스는 자신을 ‘세계시민’으로 생각해 키케로풍의 라틴어를 세계어로 생각했고 자국어나 민족주의는 유럽 통합의 비전을 위협하기만 할 뿐이라고 보았으므로 다른 인문주의자들의 민족주의적 비전과 갈등을 가졌음을 볼 때 그가 인문주의 전체를 대표하는 대변인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의 저술 중 16세기 첫 십 년대 동안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문주의 작품으로 <엔키리디온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그리스도인 병사의 핸드북)>이 있다. 이것은 당시의 교회 전체가 교부들의 저술들과 성경으로 되돌아감으로써 개혁될 수 있다는 매력적인 명제를 개진하였다. 이 책의 주요 특징으로는 ① 성직자에게는 평신도가 자기와 같은 이해수준을 도달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과, ② ‘종교의 주관성’을 강조해, 의식 · 사제 · 제도가 중요하지 않음을 역설한 것이 있다. 또한 성직자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최고 형태임도 인정치 않았다. 이 책에서는 성경을 읽는 평신도는 그 어떤 수도사만큼 자기 소명에 충실한 자이며, 교회부흥의 열쇠는 평신도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기 소명을 인식하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는 데에 문제가 있었으므로 그는 ① 부정확한 불가타 (Vulgata) 대신 새로이 신약성경을 번역하였다. ‘공인’ 역본 불가타의 번역이 정확하지 않음을 인지시켰고 그때까지의 중세 신학에 문제가 있었음을 밝혔다. 그리고 ② 암브로스, 어거스틴, 제롬 등 교부들의 저술을 신뢰할 만한 인쇄본으로 출판하여, 제대로 그들의 문장의 문맥을 보고 이해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위조된 저술을 가려낼 수 있게 하였다. 이러한 성과로써 이전의 어느 시대보다 안전하고 신뢰 있는 연구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6.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마틴 루터의 지도 아래 비텐베르크에서 전개된 종교개혁과 훌드리히 쯔빙글리의 지도 아래 쮜리히에서 전개된 종교개혁은 서로 성격이 다르므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우선 쯔빙글리가 스위스에서 전개한 종교개혁에서 에라스무스에게 영향받은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종교는 영적이고 내면적인 것이며, 내적 갱신이 우선적으로 강조되고, ② 도덕적 · 윤리적 중생과 개혁에 상당한 중요성이 부여된다. 또한 ③ 예수 그리스도를 일차적으로 도덕적 모범으로서 본다. ④ 에라스무스와 쯔빙글리 모두 제롬과 오리겐을 특별히 중시한다. 어거스틴을 쯔빙글리는 처음에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고, 1520년대부터 더 인정하기 시작한다. ⑤ 종교개혁에서 일차적으로 교회의 교리보다 생활과 도덕에 더 관심이 있다. ⑥ 종교개혁이 교육학적 혹은 교육의 과정으로 비쳐진다.

 즉 쯔빙글리의 초기 종교개혁은 철저하게 인문주의적이었으며, 그가 종교개혁을 신약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을 모범 삼는 인간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던 것에서 탈피하여 인간의 약함을 다스리는 신적 행위로 이해하게 되었던 때는 1520년대였다.

 반면 루터의 경우는 인문주의나 초기 스위스 종교개혁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신학자였으며,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스콜라주의 사고방식과 싸우기 위해 성경과 교부 -특히 어거스틴-을 끌어들였다. 다만 그가 소유한 히브리어 지식, 어거스틴 인쇄본들, 신약성경의 헬라어 본문 등은 인문주의 편집자들과 교육가들에 의해 제공된 것이었다. 그리고, 이유는 서로 달랐지만 루터와 인문주의자들은 스콜라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한다는 점이 같았다.

 1519년 루터가 가톨릭 보수주의자 요한 에크 (Johann Eck)와 논쟁한 라이프찌히 논쟁에서 인문주의자들은 루터의 주장이 인문주의 이상을 변호한 것이라 여겼고, 그의 주장을 열광적으로 지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루터가 그 일로 인해 인문주의에 호의적이라는 인상이 있을 수 있으나, 엄밀히 말해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인문주의의 본문비평이나 언어학적 기술만을 차용했을 뿐 인문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적이었다.


7. 종교개혁과 인문주의 사이의 긴장

 인문주의가 종교개혁 발전에 큰 공헌을 했으나 그 서로간에는 긴장이 있었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① 인문주의자들은 난해성과 우아하지 못한 표현 때문에 스콜라주의를 배척했으나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신학의 잘못됨 때문에 배척했다. 인문주의자들과 쯔빙글리가 스콜라주의를 관계없는 것으로 외면한 반면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은 이것을 개혁신학의 진로를 막는 주된 장애물로 여겼다.

 ② 인문주의자들에게 성경의 권위는 웅변성 · 단순성 · 고대성에만 근거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란 개념의 기초는 없었다. 윤리적인 안내를 위한 자료로만 여긴 점이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의 기록으로 여긴 비텐베르크의 개혁자들과 차이가 났다. 덧붙여 ③ 인문주의자들에게는 교부들의 상대적 장점을 평가하는 데에 필요한 확고한 신학적인 기준이 모자랐다. 그들에게는 고대성과 웅변성이라는 기준만이 있었다.

 ④ 개혁자들에게는 인문주의의 교육방법이 종교개혁의 수단이었으나, 인문주의자에게는 종교사상보다 교육기술의 발달에 관심이 있었다. 또한 ⑤ 인문주의자들에게 수사학은 웅변능력을 위한 향상을 위한 것이었고, 종교개혁자들에게는 종교개혁의 추진 수단이었다.

 종교개혁 초기에 이 상이점은 잘 보여지지 않았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차이를 구분해내는 일이 불가능했다. 이 긴장은 1525년에야 확연해지는데, 쯔빙글리와 루터 모두 에라스무스를 공개적으로 공격하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주의적 견해를 이끌어낼 우려가 있는 에라스무스의 가르침에 반대해 출판된 쯔빙글리의 <참된 종교와 거짓 종교에 관한 주석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과 루터의 노예의지론 (On the Bondage of the Will)>이 인문주의와 종교개혁 사이에 있었던 긴장을 비로소 명백하게 드러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