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름
로스 맥도날드 지음, 강영길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로스 맥도널드는 더쉴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와 함께 하드보일드에선 꽤나 유명합니다. 워낙에 레이먼드 챈들러를 즐겁게 읽었던 터라 더 이상 챈들러를 읽을 게 없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었고, 그래서 다른 하드보일드를 찾아 헤매던 차에 일단 무난하게 로스 맥도널드부터 읽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제게 있어서는 사실 챈들러의 대용처럼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읽기 시작해 보니 이것도 확실히 또 다른 매력이 있더군요. 스토리 라인에 대해서는 책 389p에서 간략하게 소개한 내용을 옮겨와 보겠습니다: 신 혼여행의 첫날 실종된 알렉스 킨케이드의 처, 달리 매기의 행방을 뒤쫓던 루 아처는 수일 뒤, 밤안개가 자욱하게 낀 으스스한 저녁, 남편에게 돌아온 달리의 모습을 발견한다. 찢어진 블라우스 사이로 한쪽 유방이 드러나고 피투성이가 된 두 손과 정신착란 상태의 모습이다. 살인사건에 말려든 달리의 과거에는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불길한 살인의 악몽이 있었던 것이다. 저주받은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는 달리를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가 복잡하게 뒤섞여 얼마 뒤엔 무서운 사건의 진상이 밝혀진다.

하드보일드가 으례 그렇듯이 추리보다는 행동이, 사건의 트릭 -아니, 트릭이랄 게 애당초 없지만-보다는 사건의 이유가 훨씬 중시됩니다. 요컨대 아처의 말대로 "옛날은 언제나 현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사람들: 그를 위해서 타인이 희생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이들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아처는 싸우고, 진실을 알아내고, 결국 밝혀냅니다. 무언가 붕괴되고 망가져 있지만, 딱히 낙관적이지도 그렇다고 아주 비관적이지도 않습니다. 여하간 산 사람들은 살아 있으니까.

개인적으로 하드보일드는 역시 간지! 라고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담담하지만 세심한 필치의 문장이라거나, 비꼬는 듯한 농담이라거나, 살아 있는 캐릭터들이 뿜어 내는 살아 있는 대화 등이죠. -하지만 위에서 보셨겠지만 이걸 번역한 곳은 동서문화사입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믿을 수 있는 번역으로 유명한 곳이죠. 기본적인 문장이야 여하간 이해는 큰 무리 없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대화 번역이 참 에러였습니다. 캐릭터에 따른 어투의 변화를 전혀 살려내지 못하고 있더군요. 어찌하여 어투에서 삼류 통속 소설의 분위기를 느껴야만 하는 것일까요. 게다가 프로이트를 프로스트라고 써 놓은 것도 참 에러입니다. 바로 몇 문단 아래에는 다시 프로이트라고 써 놔서 '아 프로이트 말이었구나' 하고 알 수 있었습니다. 슬픈 일이지요. 그래도 원서를 읽을 능력이 못 되니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챈들러를 멋지게 번역해 준 북하우스에게는 심심한 감사를.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