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ry G80-3484HKCUS는 물론 제가 지금 쓰고 있는 키보드의 형식명입니다. 좀 더 보통 쓰는 말로 형용하면 체리 넌클릭 키보드라고도 하죠. 이 키보드에 대한 감상은 약 일 년 전에 이걸 샀을 때 간단하게 올렸더랬습니다만, 이번에는 일 년 정도 쓴 후의 감상을 좀 적어 볼까 합니다. 왜 갑자기 난데없이 키보드에 대한 감상이냐? 하면 요즘 하는 게 없어서 포스팅 거리도 없고, 어쨌거나 컴퓨터 하면 키보드는 항상 만지는 거니까 감상기를 적어도 좋겠다 싶어서 쓰는 겁니다. 글 쓰다 말고 갑자기 뽐뿌를 받아서 쓰는 겁니다만 뭐 이런 거 좀 쓴다고 글을 갑자기 못 쓰게 되는 건 아니니 양해를.

이 키보드의 기본적인 특성은 일단 기계식이라는 겁니다. 보통 여러분이 쓰실 키보드는 기판이 있고 그 위에 고무 스위치를 눌러 접점을 닿게 하고 그 탄성으로 키가 다시 튀어나오는 식이 되겠습니다만, 기계식은 키 하나하나마다 스프링이 있고 스위치가 있어서 보다 키를 누르는 감각이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느 만큼이나 차이가 있냐면, 과장 조금 붙여서 핸드폰 버튼 누르는 것과 여러분 키보드 누르는 것의 차이만큼이나 차이가 있다고 할까요.

그리고 그 스위치라는 것이, 회사마다 노하우가 다르고 제작방법이 다른 만큼 그 키의 감각이 다릅니다. 기계식이라고 다 같은 키감은 아니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이게 얼마나 키감이 좋으냐, 또한 키 배열이 얼마나 편하냐, 또는 내구성이 얼마나 좋으냐에 따라 키보드가 고급이냐 아니냐가 판별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산 체리 키보드는 이 쪽 계열에서는 그래도 고급에 속하는 회사입니다. 독일제라고 하면 일단 '아 좋은 거구나' 하고 이해하시더군요. 더불어 국산 기계식으로는 아론 (ARON)이 유명합니다만 이 쪽은 공장이 중국으로 넘어간 이후부터는 내구도나 마무리 등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뽑기 운이 있지 않으면 어디 하나 금방 망가진다더군요. 입문용 기계식 키보드라고도 불리긴 합니다만 내구도에 문제가 있어서야 믿고 사기 어렵겠죠. 혹여 만약 저렴한 기계식을 구하고 싶으시다면 다른 좋은 국산 기계식으로 세진 (Sejin) 키보드가 있습니다. 이쪽은 윈도우 키가 없는 윈키리스 (Winkeyless) 키보드라 그 점이 걸리긴 합니다만, 마무리는 상당히 좋은 물건으로 정평이 나 있으니 한 번 구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세진 키보드는 일본의 후타바 공업의 스위치를 사용한다더군요.

기실 이 기계식 키보드라는 것은 멤브레인보다 역사가 오래 된, 사실 초창기의 키보드 스타일입니다. 컴퓨터의 저가화 경쟁이 가속되면서 사람들이 크게 신경쓰지 않는 부분은 적당하게 -노골적으로 말하면, 좀 싸구려로- 만드는 방식으로 단가를 낮추었는데 그 중 하나에 키보드도 들어갔습니다. 멤브레인이라는 저가형 키보드는 그래서 나온 겁니다. 옛날 컴퓨터는 사실 부품 하나하나가 다 비쌌지요. 키보드 하나에 십 만원도 이상한 것이 아니었고요. 요즘 키보드는 정말 싸지요. 만원도 되지 않는 키보드가 수두룩하고, 그래서 키보드는 소모품이니 막 쓰고 편하게 바꾸어도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심지어 옛날의 어느 컴퓨터 교재에는, 키보드는 컴퓨터 기기 중 가장 싼 기기이니 걱정 말고 막 써도 된다, 부서져도 하나 사는 데 얼마 안 든다는 설명이 쓰여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봅시다. 컴퓨터 본체 성능이 좋으면 물론 우리가 컴을 사용하는 데 편리하겠지만, 우리가 실제로 컴퓨터를 쓰며 접하는 부분은 모니터와 키보드, 그리고 마우스입니다. (기타 입출력 기기가 더 있기는 합니다만 일단 가장 일반적인 이 세 가지로 해 둡시다) 이 세 가지가 불편하면 컴퓨터를 이용하는 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습니다. 실은 정말 돈을 투자해야 할 부분이 '부수적인 요소'로 취급되는 건 무언가 이상한 일이 아닐까요?

그러니 기계식 키보드, 제대로 된 키보드가 다시 대두될 수 있습니다. 실은 비단 기계식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멤브레인 키보드에도 키감이 쓸만하고 마무리가 제대로 된 키보드는 꽤 있습니다. 굳이 말하라면 많이들 쓰실 거라 생각하는 삼성 DT-35도 그렇게 나쁜 키보드는 아닙니다. 다만 제대로 키감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키스킨은 떼고 쓰시는 게 좋을 겁니다. 스위치가 눌러지는 감각을 제대로 맛볼 수가 없을 뿐더러, 통상 쓰는 키스킨도 구색 맞추기에 가까운 저가형이기 때문에 금방 열화되어 키감을 극도로 저하시킵니다. 키보드에 뭐 쏟아서 망가지는 걸 방지는 해 주겠습니다만, 저로서는 그 하나의 장점을 얻기 위해 '키보드를 누르는 즐거움'을 잃는 것은 너무 희생이 크다고 생각하니까요.

사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겁니다. 키보드는 결국 입력장치이지만, 단순한 입력장치를 벗어나 그 자체에 즐거움이 있는 기기일 수 있습니다. 키보드를 대충 싸구려 사서 쓰는 게 아니라 제대로 된 키보드를 쓰면 말입니다. 대충 굴러는 가는 자동차를 탈 때와 타는 것 자체를 즐길 수 있게 만든 자동차를 탈 때의 느낌이 다를 것처럼 말이죠.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저는 제가 지금 쓰는 이 키보드를 치는 것이 즐거워요.

물론 계속 쓰고 있다 보면 이 키보드가 좋은 키보드라는 것을 잊기도 합니다. 사람이란 금방 익숙해지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익숙해진다고 해서 편한 것이 편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스위치를 누르는 데 힘이 들지 않는 키보드에 익숙해진다고 해서 힘이 들어가게 되지는 않죠.

위에서 말했듯이 기계식 키보드라 해도 모두 같은 성질의 스위치 감각, 요컨대 키감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제가 쓰는 이 체리사의 키보드만 해도 통상 네 개로 스위치 구분을 합니다. 기계식은 역시 짤깍짤깍하는 소리지! 하는 분들을 위한 클릭 타입 청색축, 저같이 편한 키감을 추구하는 사람을 위한 클릭 소리 안 나는 넌클릭의 갈색축, 그 외로 고속타를 위한 리니어 타입 흑색축이라거나 뭐 하는 건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백색축이란 것도 있습니다. 참고로 이 축의 색은 키캡 아래 숨겨진 스위치의 색으로, 청색축이라 해서 키보드가 청색으로 칠해진 것은 아닙니다. 키보드를 뜯어 보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우리가 누르는 키는 그 아래 스위치와 연결되어 있고, 키를 누르면 스위치가 함께 눌려 접점으로 신호를 보내는 겁니다. 그 스위치의 색을 청색이나 갈색 등으로 해 놔서 구분 가능하게 했다는 뜻이죠. 그리고 제가 쓰는 G80-3484HKCUS는 갈색축입니다.

이 키감은 어떤 느낌이냐 하면, 힘도 거의 안 주고 살짝 키를 눌러 보면 약간의 저항감이 있다가 몇 밀리미터 정도 들어가면 그 저항감이 강해지다가 갑자기 풀리며 키가 쑤욱 하고 들어갑니다. 이 저항감이 풀리는 시점이 바로 키가 입력되는 시점이며, 그 이후로는 그냥 키보드를 누르는 느낌을 위해 들어간다고 해도 좋습니다. 물론 멤브레인도 그런 감각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건 보다 스무스하고 엘레강스하다고 할까요. 게다가 힘도 그리 안 들어갑니다. 오죽하면 제가 팔에 깁스하고 팔 전체를 이동하면서 엄지손가락으로 무게만 살짝 놓아 주는 방법으로 타이핑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담이 거의 걸리지 않다 보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마다 키감이 모두 다른데, 저는 이 3484만 써서 다른 키보드의 키감은 잘 모릅니다. 같은 체리사의 청색축의 경우는 찰칵찰칵하는 클릭의 맛이 있고, 리니어 흑색축의 경우는 보다 힘이 들어가지만 그만큼 반발력도 강해서 리드미컬한 고속타가 가능하다고 하며, 일본 토프레 (Topre)의 리얼포스 (Realforce) 같은 경우는 전기 용량을 사용한 러버 돔 스위치의 키보드 -사실 기계식인지 멤브레인인지 분류가 애매하긴 합니다-인데, 갈색축보다도 훨씬 저항감이 적고 (과장 좀 덧붙여서)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만으로 입력될 만큼 힘이 안 들어가는, 구름 위를 노니는 느낌의 고급 키보드라고 합니다. 이외에 알프스니 버클링이니 이것저것 스위치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기계식 키보드에 빠지신 매니아 분들은 다른 키보드의 키감은 어떨까 하고 사들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느 세계나 매니아는 가산을 탕진하기 마련입니다만.. (이 바닥에 빠지신 분들은 아내에게 '내가 자동차나 카메라, A/V에 빠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라'는 변명을 하는 일도 간혹 있다덥니다)

여하간 말을 다시 돌려서, 이 3484에 익숙해지면 굉장히 키를 가볍게 치게 됩니다. 키를 끝까지 누를 수도 있지만 (멤브레인에 익숙하신 분들은 거의 다 이럴 겁니다), 키 입력이 받아들여질 만큼만 가볍게 눌러서 저항감이 사라지면 곧바로 손을 놓고 다음 키를 입력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면 손에 부담이 적으면서도 즐거운 타이핑 라이프를 즐길 수 있죠. 이런 식에 익숙해지고 나면 싸구려 키보드가 왜 싸구려 키보드인지 알게 됩니다. 이건 도무지, 꾹꾹 누르지 않으면 입력이 안 되니 처절하기까지 합니다. "아놔 이거 왜 이렇게 안 눌려" 하고 투덜대게 되죠. 싸구려 키보드를 쓰면 키를 눌렀다고 생각했는데 입력이 안 되어서 본의 아니게 오타도 자주 나덥니다. 쓸데없이 힘이 많이 들어가야 하니 리듬감도 덜 생기고요.

자, 여태까지 자랑질이 많아서 죄송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한 번 맛보시면 왜 이렇게 제가 신나게 이야기를 해 댔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특히나 타이핑을 많이 하시는 분이라면 좋은 키보드를 쓰실 필요가 있습니다. (타이핑 별로 안 하시는 분들은 좋은 키보드를 써도 좋은 건지 잘 모르는 경우도 있긴 하더군요) 자주 쓰는 건 좀 좋은 걸 써야죠. 더불어 기계식 키보드는 내구성도 상당히 좋습니다. (아론 같은 저가님은 예외)

마지막으로 만일 이 글을 읽고 기계식에 흥미를 가지셨을 여러분들을 위해 기계식 키보드를 간략히 설명해 보는 시간을 가질까 합니다만, 일단 제가 제대로 써 본 게 3484밖에 없다 보니 이게 어떻다 저떻다 설명하기 그렇군요. 그래도 주워 들은 정보는 있으니 현재 국내에서 쉽게 구할 만한 키보드에 대한 간략 설명을 해 보면:

아론 (ARON): 예전에 공장이 한국에 있을 때는 꽤 가격대 성능비가 좋았으나 요즘은 부실한 마무리로 악평이 높음. 키감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모양이지만 오작동이나 키가 부러지는 일이 종종 보여 신용도는 낮다. 그래도 국산이니 옹호해주고 싶지만 평이 워낙 나쁨. (사실 Neissy도 처음 기계식을 사려 했을 때 이걸 살까 했었으나 평을 살펴보고 안전한 체리로 선회) 수업료를 지출하고 싶다면 말리지는 않음. 단, 현재 판매되는 버전이 아니라 예전 국내 생산본인 속칭 '구형' 중고라면 구할 가치가 있다.

세진 (Sejin): 원래는 기계식으로 아론보다 유명했으나 이쪽에 대한 마인드가 없었던 탓에 '세진도 기계식이 있었어?' 수준으로까지 타락. 그러나 마무리는 여전히 좋고, 가격도 아론에 비해 별로 비싸지도 않다. 현재 구할 수 있는 SKM-1080은 예전 XT/AT 시절의 금형을 다시 뜬 듯, 윈키리스인 103키라 아쉽지만 현재 구입할 수 있는 국산 기계식 중에서는 최고급이라 할 만하다.

필코 (Filco): 일본 키보드 회사, 스위치는 타사의 스위치를 사용하며, 체리 (Cherry)사의 스위치를 사용한 마제스터치 (Majestouch) 시리즈가 유명하다. 체리 키보드보다 디자인이 세련되었으며 기본적으로 보강판이 들어 있다. 최근에는 신형 알프스 (Alps) 스위치를 탑재한 제로 (Zero) 키보드도 출시했는데 아론이나 세진 급의 저가형이라 기계식 입문자에게 괜찮을 듯. 평은 대체로 좋은 편이다.

아이오매니아 M-10: 키보드 전문 쇼핑몰 아이오매니아의 역작. 사실 어지간한 기계식 키보드는 다 여기에서 구할 수 있으며, 국내 기계식 매니아 치고 이 사이트 모르면 간첩. M-10은 체리 MX 스위치 (청색축)을 탑재하였으며 아론 급의 저가라 입문자에게 부담이 없다.

체리 (Cherry): 독일 회사. 체리에 대해서는 위에 열심히 썰을 풀었으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아도 좋을 듯. 디자인보다 실용성을 중시하며, 아직껏 체리 키보드를 사고 후회했다는 평을 찾아 보지 못했다.

토프레 (Topre): 일본 키보드 회사. 기본적으로 일본 자판 배열에 충실한 키보드만을 만들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쓰기 힘들었으나 US 자판 배열의 리얼포스 101이 있어서 국내에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현재는 한글 두벌식 자판이 인쇄된 블랙 버전이 아이오매니아에서 판매 중. 가격은 조금 비싼 편이나 가격을 무시한다면 현재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최고급의 키보드이다.


요새는 키보드가 소모품같이 여겨지지만 사실 컴을 바꿔도 계속 쓸 수 있는 물건이니, 처음 살 때 충분히 좋은 제품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입니다. 어쨌거나, 기계식 키보드는 일견 비싸 보이지만 그 가격만큼의 값어치를 확실히 해 주는 물건이며 타이핑을 자주 하시는 분이라면 절대 사서 후회는 안 하실 거라고 확언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