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오리지널/기독신학 2007. 9. 7. 14:44
어제는 교회 자매의 어머니가 1년간의 투병 끝에 소천하신 때문에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어제 화장했고 납골까지 했지요. 저는 영정을 들었습니다. 이게 무겁지는 않은데 무겁더군요. 무슨 말인고 하니 육체적으로는 무겁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무겁달까. 모두 끝나고 나니 17시쯤 되었는데 목 주변이 뻐근하더라구요.

위에서 썼듯 화장을 했는데, 가족분들이 보다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이게 화장이었고 납골이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화장하는 곳에서 화장하는 광경을 보여 주지 않았고, -약 한두 시간이 지나 모두 타고 난 다음- 뼈도 부순 다음에 납골함에 넣어 주었습니다. 우리가 본 광경은 이미 부서진 뼈가 납골함에 들어가는 광경으로부터였죠. 기실 화장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않은데, 고인의 시체가 불에 타는 광경이나, 타고 난 다음 남은 뼈를 부수는 것을 유족들에게 보여 주는 것, 또는 굴뚝에서 시체가 타는 연기가 피어 오르는 것을 보게 되는 점에서 그랬습니다. 그런 거 보여서 가슴만 아프지 좋을 게 없다고 봅니다. 사실 본래는 모니터가 있어서 화로 안을 어느 정도 볼 수 있게 해 주는 모양입니다만, 고장났기 때문에 볼 수 없게 되었더군요. 실은 고장나지 않았는데 고장났다고 하고 안 보여 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만, 어느 편이든 이 쪽이 좋았습니다.

납골이 좋았다는 말은, 땅에 묻는 매장의 경우 '정말 보낸다'는 의식이 아주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요즘 납골당-이랄까, 이번에 고인의 유골을 모신 곳은 깨끗하게 잘 되어 있더군요. 밝았고, 유리창으로 되어 안쪽이 보이는 칸칸들에 납골함을 안치할 수 있도록 해 놓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매장과는 개념이 조금 다른데- 이것을 그리 한 것이 아니라 관처럼 땅에 묻었다면 아마 화장이었다고 해도 어제와는 느낌이 달랐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매장의 경우- 땅에 묻는다는 것은, '이젠 정말 끝이다'라는 의식을 강하게 심어 주기 때문에, 그 때까지 참았던 유족들도 관이 땅에 들어가고 삽으로 흙을 퍼 넣기 시작하면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거나 고인을 보낼 수 없다며 장례 절차를 가로막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어제의 경우는 매장과는 경우가 달라서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유족들에게 가능한 한 슬픔을 줄 일은 피하는 것이 좋다는 면에서- 그래도 좀 괜찮더군요.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장례란 고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족을 위한 것이지 않습니까.

사실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 죽음이란 보통 생각하는 것만큼 슬프지는 않습니다. 누구보다 강하게 영혼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죽은 육신은 이 곳에 남아 있지만 지금 '그 분'은 하늘로 올라가 고통이 없는 곳에서 행복하게 계시리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 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죽은 사람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종교란 인간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만들어낸 말도 있습니다만, 그런 해석이 나올 수 있을 정도로, 신을 진정으로 믿는 기독교인은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서 고생하신 고인에 대한 슬픔이나 헤어짐의 아쉬움은 어쩔 수 없이 있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짜 삶'으로 들어가셨다고 볼 수 있기에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해도 사실 기뻐할 수 있을 만큼 강하기는 힘들긴 하죠)

그 자매와 그 가족이 이 일로 너무 힘들어 하지 않고, 다시 힘을 얻고 서로를 아껴 가며 잘 살아 가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지금은 고통이 없는 곳에서 여태까지 힘들었던 모든 것들의 보상을 받고 계실 그 자매의 어머니도 원하시는 일이리라 생각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