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달리아
제임스 엘로이 지음, 이종인 옮김/황금가지

읽기 시작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렸고, 읽는 데에도 사흘이나 걸렸습니다. 읽는 것 자체가 그리 오래 걸리는 건 아니지만 일단 두 권짜리 소설인 데다 초반부에선 특히나 집중이 잘 안 되더군요. 여하간 다 읽었으니 간단하게 감상을 써 보죠. 스포일러는 없을 테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일단 스토리 소개부터 해 볼까요. 언제나 그렇듯이 책 뒤에 쓰인 소개글을 옮겨 봅니다: "1947 년 1월 15일, 할리우드 시내의 빈터에서 젊은 여성의 시체가 발견된다. 스타가 되기 위해 도시의 밑바닥을 전전하던 여성의 처참한 최후. 검은 드레스에 칠흑 같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을 언론에서는 '블랙 달리아'라는 별명으로 대서특필한다. 당시 가장 촉망받는 두 형사가 이 사건을 맡게 되면서, 가려져 있던 할리우드의 뒷세계가 드러난다. 타락한 관료와 부패로 얼룩진 사회를 흡인력 있는 전개와 개성 넘치는 인물로 적나라하게 그려내어 평단으로부터 노벨상감이라는 극찬을 받은 제임스 엘로이의 대표작."

엘리자베스 쇼트 (Elizabeth Short)라는 이 여성의 죽음과, 블랙 달리아라는 별명과, 기타 기본 얼개는 실제로 있었던 미제 사건입니다. 작가인 제임스 엘로이는 이 사건을 기본으로 하여 상상력을 덧붙여서 이야기를 창조해 냈지요. 실제 있었던 사건을 기본으로 해서 이야기를 창조하는 것은 언뜻 매력적일 수도 있겠지만 실은 꽤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그 사건에 실제 관련된 사람들을 힘들게 할 수도 있으니까요. 비록 이게 1947년에 일어난, 60년 전의 사건이라고는 해도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건 일단 접어두고, 한 명의 독자로서 이 소설을 읽을 때는 확실히 잘 쓰여졌다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쓰여져 있습니다.

다만 저 개인적으로 취향은 가능한 군더더기를 배제하고 이야기를 압축해 낸 글을 좋아하고, 그런 걸 명작이라고 칭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이 <블랙 달리아>는, 사실 좀 길더군요. 못 썼다는 말이 아니며 잘 쓴 글입니다만 더 압축할 수 있게 보이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기호긴 하겠습니다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이 사람이 했다는 인터뷰가 어느 정도 제게 반감을 샀달까요. 카방글의 이글루에서 잠시 내용을 빌려 오면, "나는 픽션의 대가입니다. 역대 최고의 범죄 소설가이기도 합니다. 나는 톨스토이가 러시아 문학에, 베토벤이 음악에서 차지하는 것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라고 했다거나,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그는 터무니없이 과대평가되었습니다." 라고 했다거나, 더실 해밋에 대해서는 "그는 그야말로 위대합니다. 다만 내 쪽이 더 위대합니다. 그의 작품 다섯 개를 읽어 보시죠. 그 중 'The Thin Man'과 ‘The Dain Curse' 이 두 가지는 별로입니다. 서술의 논리조차 맞지 않아요." 라고 했다거나 하는 것 말이죠. 사실 이 사람이 글을 잘 쓰고, 장편소설을 재미있게 쓰는 법을 안다는 것은 인정하겠지만 저 오만함은 좀 (...).

그러나 위의 문단은 좀 사견이 되겠고, 역시 기본적으로는 잘 쓰여졌습니다. 무엇보다 현실을 살아가며 타락한 실로 다양한 인간군상을 썩 잘 묘사하고 있으며 그 캐릭터를 잘 이해하고 적재적소에 써먹습니다. 사건을 풀어나가는 솜씨도 괜찮은 편이며 막바지에 가서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을 때는 말 그대로 책을 놓을 수 없게 만듭니다. (라지만 이건 이런 류의 소설을 쓰는 데 있어 거의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사항이군요)

잔혹한 살인 사건이라는 상황이 주는 암울함에 더해서 1940년대 말이라는 시대상이 주는 어두움, 그리고 거기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을 짓밟으며 태연하게 살아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더해집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로부터 '현실은 어두운 것이다'라는 인상을 짙게 받았습니다. 삶에 있어 그 어떤 희망이 존재할 수 있지만 그게 그다지 크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어두운 현실로부터 눈을 돌리고 얻는 행복이라는 인상이 강하달까요. 이렇게 말하면 좀 과장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끈끈한 어둠의 늪 속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기분도 듭니다.

<우부메의 여름>이나 <망량의 상자> 같은 관념파괴적인 글이 주는 충격보다 이런 글이 주는 충격이 외려 강한 것은, '교고쿠도' 식 관념파괴는 일단 그만의 전제를 깔고 그 관념 안에서 일상을 새로이 보는 느낌이라 판타지라는 느낌을 가질 수 있지만 이런 글이 주는 현실의 어두움은 실제로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이지 싶군요.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실제로 있었던 미제 사건을 차용해 쓴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