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인
스콧 힉스 감독, 노아 테일러 외 출연 / CJ 엔터테인먼트

※ 이 감상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테토칩에 감자 들어간 함량만큼이나 다량 함유되어 있습니다. 특성상 스토리를 쭉 풀어 나가는 감상이 되기 때문인데, 사전 정보 없이 보고 싶으신 분은 주의하세요.

저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제일 좋아합니다만 친구인 ㅋ군은 3번을 좋아합니다. 그가 3번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이 영화 <샤인>을 본 것이었는데 저는 안 봤었죠. 사실 음악을 좋아하는 건 그냥 들어서 좋아하는 것도 있겠지만 그 어떤 계기로 인해서일 때도 있잖습니까. 영화를 보기 시작할 때까지도 이 영화가 어떤 영화였는지 전혀 몰랐지만,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분명 나도 라흐 피협 3번이 좋아질 거다' 라는 생각이 있었기에 자신있게 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이유가 어째 좀 이상하다 싶지만 세상에는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를 잔뜩 발설하며 스토리와 함께 이야기를 펼칩니다. 포테토칩의 봉지를 열 각오가 되신 분만 클릭하세요


영화는 어느 비 오는 날 작은 식당에 나타난 한 중년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왜소하고 초라하며 몸이 조금 굽어 있는 이 남자는 자신만의 세계를 사는 듯하고 염소 울음 같은 소리를 내며 영 자신감이 없어 보입니다. 바로 이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분명 그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었을 터이고, 그를 그가 살고 있는 곳으로 돌려보낸 후부터 영화는 시점을 과거로 돌려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과거로 돌아가 소년이 되었고, 그 소년의 이름은 데이비드 헬프갓 (David Helfgott). 신이 돕는다 (HelpGod)는 식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성입니다. 이 소년의 아버지는 음악을 사랑했고 소년을 피아니스트로 키우길 원했습니다. 소년을 사랑했으며 보살펴 주려는 마음이 가득했으나, 문제는 이 아버지는 완고했으며 오로지 자신의 방식대로만 가족의 형태가 구성되길 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딸이 다른 남자와 만나는 것을 보고는 빠져나가지 못하게 울타리를 쳐 버리는 아버지였고, 아들이 청년이 되어 재능을 인정받고 미국 유학을 권해 오는 편지를 받았을 때에도 가서 무슨 일이 생길 지 모른다며 편지를 불태워 버리는 아버지였습니다. 분명 아들을 사랑하고는 있었으나 그 방법이 틀렸습니다. 게다가 또한, 세상은 이기는 것이 전부라고- 피아노를 통해 음악 그 자체를 즐기기보다 다른 사람을 이기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아버지였지요. 이런 아버지 밑에서 건강한 정신으로 성장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소년은 어딘가 억압된 듯 소심하고 말을 약간 더듬으며, 청년이 되어서까지도 이불에 세계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화 내용을 다 설명해버릴 생각은 아니니 조금 뛰어 넘어서, 여하간 좀 더 지나서 영국 왕립 학교에서 유학을 권해 왔을 때에는 이 청년도 간단히 아버지에게 수그리지 않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합니다. 아버지는 가족은 모두 함께 있어야 한다며, 네가 지금 간다면 가족이 아닌 것으로 치고 연을 끊어 버리겠다고 말하지만, 이미 청년의 결심은 확고한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갔고 청년은 피아노를 열심히 연습해 갑니다. 그리고 드디어, 정신이 이상해져 버리게 된 계기-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을 본격적으로 연습하게 됩니다. 이 곡은 이 청년이 어릴 때 이미 녹음기를 듣고 연습했던 곡이었고, 자신이 가르치는 것으로 충분하다던 아버지가 선생에게 자신의 아들을 맡기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된 곡입니다. 오로지 라흐마니노프 3번을 연주하게 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 레슨을 시작했다 해도 과언은 아니었지요. 물론 아직 그 곡을 치기에는 이르다며 다른 곡들부터 먼저 시작했습니다만. 미치지 않으면 이 곡을 연주할 수는 없다는 지도선생이었으나 이 청년이 "저는 충분히 미쳐 있어요, 그렇지요?" 라고 말하자 결국 응낙하게 됩니다.

그리고 연주회가 열리고, 헬프갓은 라흐마니노프 3번을 멋지게 연주합니다.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연주를 마치자 돌연 쓰러져 버리고, 이후 이 남자는 20년 동안이나 정신 병원에 갇히고 피아노를 만질 수도 없는 몸이 되었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는 것이나 악보를 보는 것이나 개인적인 손운동 정도는 할 수 있었지만 말이죠. 여하간 시간이 지나고,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이 남자도 병원을 나가게 됩니다. 그를 데리고 나가 줄 여성이 하나 있었죠. 그의 팬이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그의 음악을 사랑했지만 그의 어린애 같은 행동이나 애정을 갈구해 오는 행동은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남자 - 성당의 아는 신도 - 에게로 보내지요. 그러나 이 남자 역시 헬프갓의 모두를 받아 주지는 않았습니다. 피아노를 쳐 대서 시끄럽다는 불평이 오자 피아노를 잠그고 쓰지도 못하게 합니다. 집 안에 있기만 해서는 건강에 나쁘니까 운동이라도 하라고 하죠. 그래서 헬프갓은 밖으로 나가게 되고- 비가 오는 어느 날 작은 식당으로 갑니다. 이제 과거를 보는 것을 지나쳐 현재까지 돌아왔습니다.

그 비가 온 다음 날, 그냥 정신병자로만 생각되는 이 초라한 남자가 다시 이 식당으로 가 사람이 가득한 이 식당의 피아노에 앉았습니다. 건반을 두들겨 보는 이 남자의 모습이 보기에는 그냥 어리숙한 중년으로밖에 보이지 않기에 제지를 할까 하고 종업원이 다가가 부드럽게 일으켜세우려 하지만, 돌연 무언가의 멜로디를 개시한 이 남자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현란하고 화려하며 아름다운 음악, 이름하여 '왕벌의 비행'! 식당 안은 조용해지고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울려퍼집니다. 이 남자는 비로소 이기기 위한 연주가 아니라 즐기기 위한 연주를 사람들에게 들려 준 것이죠. 박수를 받는 헬프갓의 표정이 그렇게 부드럽고 즐거워 보일 수가 없습니다.

이 일로 인해 헬프갓은 이 식당에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이 '기억하십니까?'라는 제목으로 신문에 나옵니다. 이 신문을 보고 의절했던 아버지가 찾아오고, 아버지는 예전에 헬프갓이 라흐 3번을 치고 받은 메달을 이 남자의 목에 다시 걸어 주며 예전 이야기를 하고 '이기기 위한 음악'론을 다시 설파하려 합니다만, 헬프갓은 그 대화에서 대답을 촉구하는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립니다. 그리고 창문을 보고 뒤돌아 섰다가 '중요한 건 살아 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만, 아버지는 이미 그 곳을 나갔기 때문에 그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창가에 서서 돌아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이 남자는 잘 가시라고 말합니다.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알지만 그 방식은 옳지 않기에, 이제는 다른 길을 가는 겁니다.

이후 이 남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성을 만나고 결혼하며, 연주회를 열고 재기에 성공합니다. 이제는 우승하고 우승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앵콜을 연호하고 기립박수를 해 오는 사람들 앞에서, 헬프갓은 눈물을 흘리고 감동하며 섭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헬프갓과 아내는 헬프갓의 아버지의 무덤에 서 있다가 돌아옵니다. 자신의 탓이라고 말하는 그에게 아내는 자신을 탓하는 건 좋지 않다고 말하고, 헬프갓은 고개를 끄덕이며 "매사에 자신을 탓하면 안 돼. 아버지는 안계시니까 아버지도 비난하면 안 돼." 라고 말합니다. 세월은 흐르고, 영원하지 않으며, 세월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살아야 한다고. 항상 이유가 있으며- 순간에 맞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고 말하며 영화는 끝납니다.


뭐 개인적인 주장을 설파하자면 역시, 사람을 사람답게 해 주고 살아가는 데 가장 큰 힘을 주는 것은 역시 사랑이지 싶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이 영화는 너무 지나치거나, 너무 모자라거나, 너무 늦어서 때를 놓친 사랑이 가져다준 상처를 다룬 영화라고 했다는군요. 영화 내내 주인공은 상처 받고 자신의 세계에 파고들고 맙니다. 그러나 그를 그 세계로부터 꺼내 주는 이는 역시 그를 사랑하는 또 다른 사람들이었지요. 어긋난 사랑이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망가뜨린다 해도 역시 그것을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경쟁하고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람을 세워 주는 원동력이 아닐까요.


여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안 사실 두 가지.

1. 이 영화는 실화를 기반으로 했더군요. 실제의 데이비드 헬프갓은 1947년 5월 19일생이고, 오스트레일리아 태생이며, 1984년에 정신분열증을 극복하고 재기하여 첫 독주회를 했다고 합니다. 아내 이름도 영화와 같은 길리언이군요. 이 영화에서 어디까지가 각색이고 어디까지가 실화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대체적으로는 비슷한 모양입니다. 사실 영화를 보는 중에, 만들어낸 플롯이라면 좀 더 치밀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지요.

2. 장년의 데이비드 헬프갓을 연기한 사람이 제프리 러쉬 (Geoffrey Rush) 더군요. 무심히 스탭롤을 보고 있다가 꽥 하고 비명을 지른 후 캐리비안의 해적 DVD를 꺼내 표지와 비교해 보았습니다. 터프가이 캡틴 바르보사와 이 샤이가이 피아니스트 헬프갓이 동일 인물이라니. 이 사람도 연기폭 꽤나 넓군요.


그리고 최후로 추가: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저도 라흐 피협 3번이 확실히 좋아졌습니다. (낄낄)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