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세벌식을 씁니다.

세벌식이 뭔지 모르는 분이 있을테니 설명하면, 보통 여러분들이 쓰는 한글 자판을 두벌식이라 합니다. 자음 + 모음. 두벌이죠. 반면 세벌식은 초성 + 중성 + 종성 의 방식을 채용합니다. 그래서 세벌이죠. 어쨌거나 한글의 구성 원리에 맞게 만들어진 자판인 만큼 과학적입니다. 고로 한글날 관련 포스트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음?)

세벌식을 다시 쓰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9월 19일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겨우 3주째 되는 셈이로군요. 500~600타가 나오던 두벌식을 버리고 세벌식으로 돌아서고, 처음 며칠은 타수 안 나오니 답답해서 죽겠었습니다만 현재는 200~300타 정도 나오니 그럭저럭 문제없이 쓰고 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때는 세벌식을 썼더랬습니다. 그 때 컴퓨터를 배울 때 본 책 (이름은 기억안나네요) 저자가 공병우 박사님 (세벌식을 고안하신 분입니다)을 존경했달까 여하간 그 책에서 세벌식을 좋다고 말하고 스티커도 있길래 붙이고 배웠더랬죠.

세벌식은 키보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 상에서 지원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프로그램에서 세벌식을 지원한다면 키보드가 어떤 거냐와는 무관하게 쓸 수 있죠. 사실 제가 지금 쓰는 키보드에는 영어만 쓰여 있습니다. (히죽)

다만 뭐랄까.. 제가 세벌식을 사용했던 90년대 초반 당시에는 세벌식을 제대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한글 워드프로세서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세벌식을 고집하긴 힘들었고, 결국 중학생 쯤을 기점으로 두벌식으로 돌아갔었죠.

그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세벌식이었습니다만.. 다시 생각난 건 지금 쓰는 키보드, G80-3484를 사게 되면서부터였습니다. 기계식 키보드를 산다는 것은 '손'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는 것이죠. 이른바 휴먼 인터페이스. 보다 편하고 보다 쓰기 좋은 것. 그러다 어느 순간 세벌식을 기억해냈습니다. 손에 부담을 덜 주기로는 두벌식보다 세벌식이죠. 세벌식은 (주먹구구로 만들어진) 두벌식과 달리 오랜 개발기간을 거치고 실전에서 검증되어왔기 때문에 검지손가락의 사용량이 두벌식보다 많고 두벌식에서 흔히 나오는 왼손 연타가 없습니다. 기계식 키보드 + 세벌식이라면 현재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인터페이스다, 라는 생각이 들었달까요.

뭐 바꾸고 나서 처음엔 느려서 답답했지만 이젠 일상적인 수준의 글은 무리 없이 쓸 수 있습니다. 이런 포스트 같은 걸 쓸 때는 예전 두벌식 쓰던 때와 별 속도 차이를 느끼지도 않아요.


뭐 그런 건 그런 거고, 말 나온 김에 제가 생각하는 세벌식의 장점과 단점도 한 번 적어 볼까 합니다.

※ 여기서 말하는 세벌식은 '세벌식 최종' 자판을 말합니다. 다른 세벌식도 있습니다만 과도기에 나온 자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세벌식 NoShift 같은 것은 장애우를 위한 것이므로 여기에선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장점:

1. 한글의 구성원리에 잘 맞는다

초성 -> 중성 -> 종성의 순으로 입력하기 때문에 글자당 타가 확실하게 맞아떨어집니다. 이른바 도깨비불 현상도 없지요.

※ 도깨비불 현상 : 이를테면 '아기'를 입력할 때, ㅇ 아 악 아기 식으로 쓰여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원래 나올 리 없는 악 자가 나오는 것이죠. 세벌식에서는 그냥 ㅇ 아 아ㄱ 아기 식으로 쓰여집니다.

사실 타수가 올라감에 따라 별 신경 안 쓰고 넘어가게 되는 부분이 이 도깨비불이긴 합니다만, 도깨비불 현상 방지는 단지 눈이 혼란스러운 문제만이 아니라 잘못 오타가 나올 확률을 더 줄여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2. 왼손 연타가 적고 Shift를 치는 수가 적다

자판을 한번이라도 구경해 보시면 알겠지만 세벌식은 오른손 위치에 초성이 위치하고 왼손 위치에 중성과 종성이 위치합니다. 이건 다시 말해 양손을 제대로 골고루 쓸 수 있다는 걸 말하죠. 두벌식은 열심히 치다 보면 왼손이 유달리 피로해져서 왼손을 털어 주기도 했는데 세벌식으로는 그럴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Shift를 치는 수가 두벌식보다 굉장히 줄어드는데.. 자주 쓰는 키가 Shift를 안 쳐도 되는 부분에 위치하고 있어 편합니다. 일례로 받침 ㅆ이 2키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게 써보면 아주 편하죠.

바보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이쿠 그랬어요 오예 아싸 좋구나 :)

..라는 예문이 있을 시 세벌식에서는 위의 말을 치면서 단 한 번도 Shift를 누르지 않습니다. (초성에서 쌍자음이 나올 때도 Shift를 안 치고 키를 두 번 연타합니다. 두벌식에서 그렇게 하면 ㅅㅅ 가 되겠지만 세벌식에선 그냥 ㅆ가 됩니다. 아싸에서 Shift를 안 치면 두벌식에선 앗사 라고 쳐지지만 세벌식은 아싸가 되죠) 이런 게 뭘 말하냐면 세벌식은 두벌식보다 오타유발 횟수가 기본적으로 적다는 겁니다. (예외도 있습니다. 단점에서 설명하죠)


3. 숫자 치기가 편하다.

HJKL: 위치에 각각 01234 가 할당, YUIOP 위치에 각각 56789 가 할당되어 있습니다. (Shift를 누르면 숫자가 나옵니다) 덧붙여 Shift를 누른 상태에서 N 이 - 이 나오고 Shift 를 누르거나 안 누르거나 ,. 이게 그대로 ,. 로 나오기 때문에 손가락을 별로 이동시킬 필요 없이 010-2131-2130 라든가 1.2 등을 간단하게 입력할 수 있습니다. 숫자 할당 방법이 키패드와 다르기 때문에 처음엔 약간 헛갈리지만 익숙해지면 아주 편리합니다.


4. 타자에 리듬감이 있다.

초성 (오른손) -> 중성 (왼손) -> 종성 (왼손)의 순서로 타자를 치기 때문에 글자 하나가 완성될 때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오른손에서 시작해 왼손으로 끝납니다. 이게 두벌식에선 절대 가질 수 없는 세벌식의 리듬감을 가져 오죠. 확실히 세벌식을 쓰다가 두벌식을 쓸라면 Shift도 열라 많이 쓰고 리듬감도 개판입니다.



5. 모아치기가 가능하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세벌식은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하여 글자를 만듭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다시 말해 보면, 꼭 초성 중성 종성의 순으로 글자를 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일테면 뷁이라는 글자를 칠 시:

ㅞ 붸 뷁 이런 식으로 쳐도 문제없이 들어간다는 겁니다.

자음과 모음으로 조합하는 두벌식에선 절대 불가능한 방법이죠.

참고로 방금 '방법'이라는 글자를 칠 때 '법'에서 ㅓ 를 치는 걸 빼먹어서 ㅂㅂ 이 되었었는데 (폰트에 안 나와서 표시가 안 되는군요) ㅓ 를 마저 치자 법 이라는 글자가 완성되었습니다. 고속타자에서 빠르게 치느라 타자가 순서가 조금 틀려도 알아서 보정되어 들어간다는 겁니다. 오타율을 상당히 줄여 주죠.

(단, 이 모아치기는 프로그램에서 지원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XP의 기본 입력기를 IME 2002가 아니라 '날개셋'이라는 걸 쓰고 있죠)



뭐 여기까지 말하면 세벌식 자판이 지상최강의 자판으로 보입니다만..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인간이 만든 것, 결국 단점도 있기 마련입니다. 무조건적인 찬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니 단점도 써 보겠습니다.


단점

1. 사용해야 하는 자판 수가 많다.

이건 익숙해지면 장점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세벌식 최종은 종성의 겹받침까지 하나의 키로 제공하고 있죠. 이를테면 읽 없 등을 칠 때 두벌식은 네 번 쳐야 하지만 세벌식은 세 번으로 충분합니다. 한글의 조합되는 모든 패턴마다 하나씩 키가 배당되어 있기에 일단 익숙해지고 나면 엄청난 고속타를 낼 수 있습니다만..

..역시, 처음에 익숙해지기는 힘듭니다. 두벌식이 자음과 모음뿐인 구조로 모처럼 초중종성으로 과학적인 한글을 로마자 수준으로 떨어뜨렸다고는 해도, 글쇠 수가 적은 만큼 외우기 쉽고 그걸 가지고 조합하기도 간편합니다. 효율적이라는 거랑은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만.

겹받침 하나하나에 다 글쇠를 배당한 세벌식이 비록 익숙해지면 빠르다고 해도 실제로 모든 자판을 다 외우기는 쉽지 않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타자 자체는 금방 가능하긴 합니다만, 겹받침이 들어가는 문장에서, 그 겹받침이 자주 사용해서 외운 게 아니라면 그 때 가서 조금 헤매게 되는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걸 바꾸기도 참 뭐합니다만.


2. 최상단 글쇠까지 사용한다.

1번에 이어지는 문제점입니다. 두벌식과 달리 세벌식은 통상 숫자키로 사용하는 위치까지 글쇠를 배당했습니다. 초중종성을 모두 사용하기 위한 조치이고 덕분에 모든 글쇠를 만들어낼 수 있었습니다만.. 1234나 789 정도의 글쇠는 그리 어렵지 않게 칠 수 있습니다. 손가락만 그냥 위로 좀 올리면 되는 문제니까요. 그러나 56 이나 0-= 위치의 글쇠는 치기가 참 힘듭니다. 이게 세벌식에서는 56이 각기 ㅠㅑ 에, 0-=이 각기 ㅋ)>에 배당되어 있는데요, ㅠㅑ 나 ㅋ ) 이나 실제로 써 보면 상당히 많이 쓰게 되는 글쇠입니다. 왼손 검지로 치게 되는 ㅠㅑ는 그렇다 쳐도 오른손 새끼를 써야 하는 ㅋ) 등은 정말 치기 힘들죠. (새끼손가락은 또 짧지 않습니까) 특히 저같이 판타지를 쓰는 사람은 명사에 ㅋ가 자주 나오면 죽습니다. 캘빈 퀸시 프리크 .. etc. (orz) ㅠㅑ 나 ㅋ 등을 칠 때면 오타가 상당히 잘 납니다. 옆의 글쇠를 잘못 쳐서 ㄱ-


3. 특수기호의 위치가 영문타자의 것과 다르다.

2번에 이어지는 문제점입니다. 물론 이것도 익숙해지면 어느 정도는 장점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굉장히 자주 쓰게 되는 " 이게 M 위치에 할당되어 있어서 새끼로 치는 것보다 검지로 치니 편하거든요. 이외에도 익숙해지면 오히려 편해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만.. 그것과 별개로,

영문타자로는 칠 수 있는 기호를 세벌식으로는 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최상단 글쇠까지 글쇠에 할당해서 나오는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뭐 이 경우는 어쩔 수 없으니 영타로 잠시 전환해서 기호를 넣어야 하죠.

글을 쓸 때야 영타로 전환해서까지 넣을 기호가 없으니 괜찮습니다만 (보통 한글을 쓸 때 나오는 기호는 세벌식 안에도 포함되어 있으니까) 이모티콘 등을 쓸 때는 좀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이상, 세벌식에 대해 설명해 보았습니다. 분명 단점도 존재하긴 합니다만 두벌식보다는 분명히 나은 자판이라고 봅니다. (랄까 두벌식과 비교하긴 사실 뭐한데.. 두벌식이 세벌식보다 나중에 나온 자판입니다. 세벌식은 역사가 근 50년 되었던가 그럴걸요) 적어도 제가 보기로는 현존하는 한글 자판 중 가장 과학적이고 가장 좋은 자판이 세벌식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두벌식을 버리고 세벌식을 잡은 것이고요.

요새는 프로그램도 많이 나왔고 윈도우즈 차원에서도 세벌식을 지원하기 때문에 90년대 초반과 달리 쓰고자 마음만 먹으면 간단하게 세벌식을 쓸 수 있습니다. 한글 자판은 두벌식만이 다가 아닙니다. 키보드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별 생각 없이 두벌식만을 써오신 여러분들도 한글날을 맞아 (...) 자판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