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저에게는 몇 개쯤 로망이 있습니다. 곧 죽어도 시계는 아날로그여야 한다거나, 샤프펜슬이 확실히 편리하지만 필기감으로는 역시 연필을 따라갈 수 없다 ─에 덧붙여, 칼로 깎아가며 써야 하는 '불편함' 그 자체에 아름다움이 있다!─ 라거나 하는 구시대적 감성 말이죠. 그리고 그런 구시대적 감성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년필인데, 아무리 볼펜 종류가 편리하다 해도 '펜' 자체가 주는 우아함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수트를 쫙 빼입고 안에서 볼펜을 꺼내어 메모하는 것과, 만년필을 꺼내어 메모하는 것, 둘 중 어느 쪽이 멋지냐? 고 묻는다면 역시 많은 사람들이 만년필 쪽이라고 답하지 않을까요. 불편함이 따르는 건 사실이지만, 또한 불편하기 때문에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열변)

 ..라는 생각을 하는 인간이, 당장은 볼펜을 쓰고 있었더라도 종국에는 만년필을 사고 말 것은 명약관화, 그런 이유로 저는 만년필을 샀습니다. 사고야 말았습니다.

 만년필을 쓰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닌데, 중학교 때 이름 모를 만년필을 사용했었고, 대학 초년시절에는 지인이 선물해준 파카 만년필을 사용했었죠. 중학교 때 사용했던 만년필은 피스톤식 컨버터 (만년필에 잉크를 주입하는 장치: 펜촉을 잉크에 담근 뒤, 컨버터 끝의 피스톤을 당기거나 나사를 돌려서 그 기압으로 잉크를 컨버터 안에 주입시킵니다)였고, 대학 초년때 사용했던 만년필은 카트리지 (말 그대로 카트리지. 잉크 교환을 볼펜 심을 바꿔끼우듯 간편하게 처리합니다)였습니다. 이를테면 만년필이 어떤 필기구인가.. 하는 기본적인 감각 정도는 알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당초의 예상 구입 금액은 5만원 정도여서, 그 정도 전후에서 만년필 가격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시점에선 뭐가 뭔지 전혀 몰랐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죠. 알고 있는 브랜드가 몽블랑과 파커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이 가격은 좀 애매해서, 아예 낮춰서 2-3만원 정도의 저가 만년필을 사든지 7-10만원 정도의 중저가 만년필을 사는 쪽이 낫겠다 싶더군요.

 이 가격대의 쓸만한 만년필은 일단 파카 45, 세일러 프로피트, 크로스 아벤츄라, 쉐퍼 락카 등이 있는 모양입니다만, 살펴보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워터맨 필레아가 땡기더군요. 사실 큰 이유가 있는 건 아닌데, 만년필이라는 필기구를 처음 만든 사람이 바로 워터맨이었기 때문입니다. 설명을 그대로 옮겨 보면,


 1883년, 미국 뉴욕의 평범한 보험 세일즈맨 루이스 에드슨 워터맨은 보험에 들겠다는 고객을 만나러 갔다가 봉변을 당했다.
 계약서에 잉크를 쏟는 바람에 계약은커녕 고객마저 잃고 온 것이다. 고심 끝에 그는 모세관식 만년필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그전까지는 잉크를 찍어 쓰거나 펜대에 담아 촉에 흘려쓰는 것이 고작이었으므로 워터맨이 개발한 만년필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라더군요. 이른바 세계 최초의 만년필! 오리지널!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만년필을 써보려 하는 나로서는, 일단 '오리지널'을 접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란 말입니다. 오케이 그럼 워터맨. 가장 저렴한 필레아는 8만원이니까 (실제로 살 때는 홈페이지 할인가에 추가 할인 등으로 6만 2천원까지 내려갔습니다만) 마침 적당하다 싶고, 상품평을 봐도 칭찬 일색이니 이건 뭐 오래 고민할 것 없겠다 싶더군요.


질렀지요. 네, 질렀습니다.


 펜카페 (http://www.pencafe.co.kr)라는 곳에서 샀는데, 꽤 괜찮은 듯 싶습니다. 받아보니 구성품은 기본적으로 만년필 박스 내에, 만년필 + 나사식 컨버터 (요샌 다 나사식인 모양이더군요) + 여분 카트리지 1개  + 품질보증서 (정품인증을 겸하죠) + 설명서 (이건 번역은 안 되어있덥니다만, 그림만 알아볼 줄 알아도 뭔 소린지는 알 듯)가 들어있고, 사은품으로 펠리칸 (독일 브랜드입니다)의 30mL 잉크가 하나, 그리고 Tombow의 비즈노 볼펜이 더불어 왔어요.

 일단 컨버터로 잉크를 담고 ─나사식이 좋긴 하더군요. 세밀하게 잉크를 뽑아 올릴 수 있는데다, 처음에 '나사식'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느낀 이미지처럼 잉크 담아 올리는 게 느리지 않덥니다. 볼륨스위치 돌리는 정도로만 돌리면 간단히 채워진달까 뭐랄까─ 필기해봤습니다. 위의 사진이 그 결과물인데, 제가 구입한 EF촉[각주:1]의 경우 모나미 볼펜과 비교해볼 때 두께가 거의 비슷합니다. 하이테크 펜을 쓸 때처럼 아주 세심한 필기는 어렵지만 (하긴 그런 걸 원했다면 워터맨이 아니라 세일러 펜 같은 걸 샀어야겠죠), 보통으로 쓰려 한다면 무난합니다.

 필기감으로 말할 것 같으면.. 부드럽습니다. 정말 부드러워요. 종이가 실크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펜을 길들이기까지는 좀 서걱거림이 있다고 하는데, 하긴 예민하게 느껴보면 살짝 사각거리긴 하지만, 이게 사각거리는 거라면 대체 길들여져서 부드러워지면 얼마나 부드러워진다는 소리야.. 싶을 정도죠. 시범삼아 어머님께 글씨 써보시라고 쥐어드렸더니 써보시고는 이거 엄청 잘 써진다며 감탄하시더랍니다. 잉크 끊김 같은 건 당연히 전혀 없죠.

 디자인도 꽤 고급스러워서, (따지고 보면 전 금장보다는 실버 메탈릭 계통의 색을 선호함에도 불구하고) 볼수록 흐뭇해집니다. 중후한 멋이 있기 때문에 연세가 있는 분들이 사용해도 무리없을 듯 싶군요. 뭐, 이 만년필에 새겨진 제 이름 이니셜 각인 (사이트에서 무료로 각인 서비스해주더라고요)을 볼 때마다 '크으으, 이게 <내> 만년필이구나!' 라는 감동이 들어서 더욱 마음에 드는 것도 있겠습니다마는.

 흠, 결론적으로 말해서.. 필기감이나 멋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가격을 투자해 구입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누구에게 만년필을 선물할 일이 생기고, 그 상대방이 이미 선호하는 특정한 브랜드가 없다면, 아마 이 만년필을 선물하게 되지 않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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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Extra Fine, 가는 촉을 의미합니다. 그 외로 F (Fine)촉은 보통 굵기이고, M (Medium) 촉은 굵은 글씨를 의미합니다. 만년필 회사마다 촉의 굵기는 달라서, 똑같은 EF촉이라도 어떤 회사는 상대적으로 굵고 어떤 회사는 상대적으로 가늘기도 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