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이윤기 옮김/열린책들

 조르바는 실존인물입니다. 랄까, 저는 당연히 소설 속의 인물이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역자 후기를 보니 '조르바의 딸'이 실존인물로 나오더군요. 그러면 조르바도 실존인물이라는 뜻이고, 그렇다면 이 소설은 어디까지가 가공이고 어디까지가 현실인가······ 싶어집니다만, '장편소설' 딱지를 붙이고 있는 만큼 전 '실존인물에게서 많은 것을 얻어왔지만, 여하간 소설'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많은 여러분도 그럴 겁니다. 하지만 그가 쓴 글을 좀 나열해보면 아실 지도 모르겠군요. <그리스 인 조르바>, <예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다>, <미칼레스 대장>,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등······.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은 그리스 정교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지요. 글쎄, 그건 아직 읽어보지 않았습니다만 <그리스 인 조르바>를 읽어보고 느낀 바로는, 카잔차키스 이 사람은 더없이 인간적으로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있더군요. 아니 불교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제대로 된 기독신학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설명한 그리스도는 이미 그에 의해 재탄생된 다른 그리스도니까요.

 각설하고, <그리스 인 조르바>는 '조르바'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은 거의 화자 역을 수행하죠. 책벌레인- 그래서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많지만 사실 경험한 일은 적은 주인공과,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인생풍파를 여러모로 거쳐간 조르바와의 만남이 이 책의 내용입니다. 조르바를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꼬장꼬장하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를 자유인으로들 일컫는 듯합니다만, 이 땅에서 육신을 갖고 살아가면서 진정한 자유인이 존재할지 저는 모르겠습니다. 단지 그가 자유롭고 싶어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조르바는 인생에 대한 분명한 철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철학은 다분히 반기독적이죠. (카잔차키스가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말은 그만둡시다.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아도 얼마든지 사상이 반기독적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게 더 위험합니다. 여하간, 말했듯, 카잔차키스가 이해한 그리스도는 그에 의해 체가 걸러진 이미 다른 그리스도입니다) 보통은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고 영혼의 자유를 찾으려 들 텐데, 조르바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육체의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인정하고 거리낌없이 욕망 따라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탐욕적이라는 뜻은 아닌데, 그는 물레를 돌리는 데 걸리적거리자 자신의 왼쪽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리기도 했고, 어릴 적에 버찌가 자꾸 먹고 싶어 괴로운 마음이 들자 아버지의 돈을 훔쳐 버찌 한 소쿠리를 먹어치워 아예 질려버리게 해서 끊어버리는 인물입니다. 사실 그가 여자를 찾는 것도 좀 마찬가지 의미인데 참을 수가 없으니까 질려버리게 하겠다는 뭐 그런 의미가 있다죠. (그럴싸한데? 라고 외치실 분, 있을 겁니다)

 조르바는 실로 많은 일들을 경험했고, 따라서 그의 행동은 이유가 없어 보여도 나름 타당한 이유가 존재합니다. 소설의 많은 부분 ─이라기보다 대부분─은 조르바가 이래저래 따져물으면 주인공은 그에 답하지 못하는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요컨대 책 속에 있는 거 다 쓸데없다······ 는 식이 되고, 지식인인 주인공을 자기의 실제 경험으로써 논파하는 조르바는 더욱 멋져 보이게 되죠. 그가 낳는 결과물이 실제로 어떤 식이건간에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조르바를 도무지 미워할 수 없고 오히려 그가 멋져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어떤 식으로건 언행일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아닌가 합니다. 겉으로는 있는 척 다하면서 뒤로 호박씨 까는 사람보다, 겉으로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고 인정해버리는 사람 쪽이 차라리 매력적이기 마련이죠. 이건 인터넷에서 사람들을 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인데 때때로는 오히려 공인 트러블 메이커 쪽이 더 남자다워 보이기도 한달까요. 뭐 그런 이유로, 육체에 갇혀 살아야 하는 게 사실이고 육체의 욕망을 이기는 게 인간으로서 불가능인 한은 차라리 육체의 소욕을 긍정해버리는 조르바가 오히려 더 멋져 보일 수도 있다는 소립니다. (어정쩡하게 육체를 부정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해놓는 일들을 보고 있자면 더욱 그렇죠)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볼까요. 책 뒤에 붙어 있는 작가론에서는 카잔차키스가 육체와 영혼을 나누어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 육체와 영혼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요. 그리고 그에게 있어 성화 (聖化, 메토이소노[각주:1])란 영혼의 육화 (肉化)입니다. 육신은 단지 영혼이 거주하는 썩어질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성화를 이룩할 수 있는 그릇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볼 때 성화란 육신을 부정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형이상학적 변화와 형이하학적 변화는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부분만 따지고 본다면 기독신학적으로 꼭 위험하지는 않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과 육체가 나뉘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게 물과 기름처럼 딱 나뉘는 게 아니라서, 둘은 피차 영향을 받습니다. (이 말이 쉽게 와닿지 않는다면 몸과 마음의 관계를 떠올려주세요. 마음을 다치면 몸도 안 좋아지고 몸이 건강해지면 마음도 활기차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이 (기독교인 아닌 사람이야 뭐 상관없겠죠) <그리스 인 조르바>를 읽을 때 주의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소설은 영혼에 대해 말하는 듯하지만 결국 육체에 대해 말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카잔차키스는 붓다에 매료되었으며, 소설 내에도 나오는 '부처와 목자의 대화'에서 그에 대해 읽을 수 있습니다. 잠시 인용해봅시다:

부처 내게는 황소도 암소도, 목초지도 없습니다. 내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니 하늘이여, 마음대로 비를 내려도 좋습니다.
<그리스 인 조르바>, p.31

 우리에게는 이미 익숙한 '무소유'의 개념입니다.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개념이죠. 물론, 불교의 개념입니다. 위에서 성화에 대해 잠시 언급했는데, 이에 대해 카잔차키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거룩하게 만들기'이다. 나는 조르바라고 하는 위대한 자유인을 겨우 책 한 권으로 변화시켰을 뿐이다. (p.495)" 글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업체 하나가 춤으로 변했다는 것이, 물리적인 변화가 정신적인 변화로 옮겨갔음을 의미하고 있을 뿐일까요? 저로서는 오히려 이것은 '무소유'의 개념에 가깝지 않은가 합니다. 모든 것을 잃었기에 오히려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언가 이룩해내는 것이 아니라,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조르바가 위대하다고 생각된다면 무엇 때문일까요? 그는 무엇을 이룩해냈기 때문에 위대합니까? 그저 '자유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통상적으로 '거룩하다'고 말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고 나면 그에게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거룩함을 느끼게 되죠.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육체적인 욕망에 탐닉하는 듯하지만 오히려 그로써 자유를 누리려고 한다고 읽히기 때문입니다. 이길 수 없는 욕망에 대항해 오히려 질려버릴 때까지 탐닉하여, 사라지게 만드려는 것이죠. 버찌에 탐닉하여 버찌를 질려버리게 만들어, 버찌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카잔차키스는 여기에 감동하지 않았을까요. 다시 한 번 붓다에 대한 대목 하나를 인용해보겠습니다:

······ (상략) 이것이 그의 비밀이며 엄청난 의미다. 부처에겐 스스로를 비운 '순수한' 영혼이 있다. 그의 내부는 공허하며 그 자신이 바로 공 (空)이다.
같은 책, p.209

······ (상략) 부처는 최후의 인간이었다.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을 뿐, 충분히 먹은 것도 마신 것도 사랑한 것도, 아직 충분히 살아 본 것도 아닌 상태였다. 이 숨이 가쁜 사람은 우리에게 너무 빨리 찾아온 것이었다. (하략) ······
같은 책, p.210

 부처가 너무 빨리 찾아왔다면 그건 무슨 의미일까요? 어째서 '우리는 시작에 머물러 있다'고 표현했을까요? 카잔차키스가 지향하는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순수하게 비워야만 합니다. 그가 지향하는 자유는 공 (空), 즉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기독교적이지 않죠. 더할나위없이 불교적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 그는 '그대로 버릴 수 없다면 질려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 (상략) 당신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 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같은 책, p.460

 아직 책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는 그에게 부처는 너무 빨리 찾아왔습니다. 그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비움을 얻기 위해, 잔뜩 먹어 질려버리는 조르바의 방법을 택하려 합니다. 당장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차라리 욕망을 지나치게 취해 그로부터 자유로워지기. 그것이 그가 성화를 얻는 방법이며, 자유를 얻는 방법입니다. 이제 제가 위에서 카잔차키스가 <그리스 인 조르바>에서 영혼에 대해 말하는 듯하지만 오로지 육체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한 이유를 이해하실 줄로 믿습니다. 그가 말하는 보이지 않는 세계는 기독신학의 그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단지, 정신적인 세계를 말할 뿐이죠. 그의 성화란, 결국, 해탈 (解脫)입니다.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원하지도 않게 되는 상태를 원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므로 조르바는 주인공에게 있어 붓다와 같은 존재입니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자유인'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러한 불교적 관점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어쩌면 사족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좀 더 덧붙여두면, 전 카잔차키스에게 있어 기독교는 분명 의미가 없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스 정교회가 <그리스 인 조르바>를 신성을 모독한 작품이라고 했지만, 그에게도 그건 별 의미가 없었을 겁니다. 카잔차키스가 가진 신성은 기독교적인 신성이 아니니까요.

 "두목, 어디 한번 들어 봅시다."
 그가 말문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따사로운 밤 공기 속에서 그윽하면서도 진지했다.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닌 건가요? 누가 이들을 창조했을까요? 왜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에서 조르바의 목소리는 분노와 공포로 떨렸다.
 "······왜 사람들은 죽는 것일까요?"
 "모르겠어요, 조르바."
 나는 이렇게 대답하면서도 부끄러웠다. 나는 가장 단순한 질문,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받은 셈이었지만 그에게 설명해 줄 수는 없었다.
 "모르신다!"
 조르바의 둥근 눈이 놀라움으로 열리면서 소리쳤다. 내가 춤출 줄 모른다고 고백했을 때와 표정이 똑같았다. 그는 또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아니, 두목, 당신이 읽은 그 많은 책 말인데······ 그게 뭐 좋다고 읽고 있소? 왜 읽고 있는 거요?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이 책에 없다면 대체 뭐가 씌어져 있는 거요?"
 "책에 씌어진 건 인간의 혼미(昏迷)에 관한 겁니다. 조르바. 인간의 혼미야말로 당신의 질문에 대답할 수가 있답니다."
 "인간의 혼미 좋아하시네."
 그가 실망했는지 발을 구르며 내뱉듯이 말했다. ······ (하략)
같은 책, pp.414-415

 만물은 각기 무슨 의미를 지녔는가, 누가 이들을 창조했는가, 왜 사람들은 죽는가. 적어도 기독교적이라면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분명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카잔차키스는 '모른다'고 답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가 말했던 성화-메토이소노가 기독교적인 것이라면 여기에서 모른다고 답하거나, 인간의 혼미가 그에 대답할 수 있다고 말할 이유는 없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그가 '하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을 창조했다, 사람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다'는 기독신학을 믿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가 믿는 것은 육체와, 육체의 욕망과, 그 욕망을 버리고 비움으로 자유-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위에서 이래저래 떠벌떠벌 주절였는데 이에 동의하시는 분도 계실 테고 동의하지 않으시는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어쨌건 이건 '제 감상'이고, 저는 이 책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제공했을 뿐이죠. 네가 '카잔차키스가 이해한 기독교는 이미 또 다른 기독교다'라고 말했듯 '네가 이해한 카잔차키스는 이미 또 다른 카잔차키스다'라고 말하시면 뭐 딱히 드릴 말씀은 없겠습니다만, 어쨌건 카잔차키스는 불교에 매우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불교가 생소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스 인 조르바>가 그리 어렵지만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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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메토이소노의 정확한 철자와 어원에 대해서는 인터넷을 뒤져보아도 나오는 게 없었습니다. 카잔차키스가 쓴 소설에 나온 용어이니만큼 그리스 어가 아닌가 하는 추측 정도만 있었습니다만, 역시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메토이소노가 성화를 가리키는 용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