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의 형성
E 트로크메 지음, 유상현 옮김/대한기독교서회


0. 감상에 들어가기 전에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가 있었는데, 전 이 책이 어떤 성격을 띤 책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이 책을 읽었습니다. 만약 이 책의 자유주의 신학적 성격을 알았더라면 아마 읽지 않았겠죠. 출판사인 대한기독교서회에 대해서도 정확히 몰랐는데, 알고 보니 이 출판사는 속칭 진보 계열로서 에큐메니칼 성격의 책을 많이 내놓는 모양이더군요. 뭐랄까 좀 헛탕을 친 기분입니다만, 어쨌거나 읽으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리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인 에티엔느 트로크메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 신약학 명예교수라 합니다. 으음, 이 약력을 읽어봤을 때 이 저자의 자유주의적 경향을 짐작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앞으로 이 쪽에 대해서 좀 지식을 쌓아둘 필요를 느낍니다.


1. 축자영감 (逐字靈感)

 각설하고, 이 책이 마음에 안 들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저자는 성경을 무오 (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인정하지 않아요. 철저하게, 인간이 편집하여 써냈고 따라서 의도에 따라 진실이 바뀔 수 있으며 어떤 것은 그저 전설일 뿐이라고 하여 부정합니다. 그러니 저 같은 사람에게는 (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이라, 축자영감설과 성경무오설을 긍정합니다) 마음에 안 들 수밖에요.

 이 블로그에 방문해주시는 대다수의 여러분께는 축자영감설이나 성경무오설이 생소한 단어일 테니 간단하게 설명하겠습니다. 축자영감설이란, 성경을 쓸 때 쓰기는 분명 인간의 손으로 썼지만 성령님께서 감동을 주셔서 그게 그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깃든 문서로 쓰게 했다는 교리입니다. 더불어 성경무오설은 이 축자영감설에서 이어지는 것으로, 그렇게 성령께서 역사하신 만큼 성경에는 문자 하나도 잘못됨이 없다고 하는 교리이고요.

 자유주의 - 소위 진보 계열의 신학을 하는 사람은 이 축자영감이나 성경무오를 부정하는데, 이 사람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인간의 눈으로 보면 성경에는 합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부분이 수없이 존재합니다. 과학 · 역사적으로 오류가 있어 보이며, 일반 학문과 합치되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죠.

 성경의 오류라는 부분에 대해 여기서 잠깐 제 의견을 말해본다면 (뭐,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의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과학이 현재 인간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습니다. 학계란 게 뭐가 새로 밝혀질 때마다 쉬이 뒤집히는 판에, 현재까지 내 눈에 보인 게 이러니까 난 저건 못 믿겠다······는 태도는 하나님을 안 믿는 일반 학자라면 모를까 신학자로서는 곤란하지 않나 싶군요. 하나님은 분명 일반법칙 안에서 역사하시지만, 또한 일반법칙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까놓고 말해서, 성경 말씀이 이건 내 눈에 옳아 보이고 저건 틀려 보여서 취사선택한다면 성경을 새로 만드는 행위에 다름없으며, 그렇게 되면 성경에 절대적 진리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기본 중의 기본 교리는 '과학적'으로 납득이 되는지, '역사적'으로 증명되었는지 좀 묻고 싶네요.

 축자영감과 성경무오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면, 이 축자영감설을 뒷받침하는 성경 구절은 일단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디모데후서 3:16-17, 개역개정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베드로후서 2:9, 개역개정판)

 여기에서부터 시작해서 위에 설명한 성경무오설로 이어집니다만, 이 성경무오설은 약간 복잡합니다. 일단 그 무오함을 성경의 모든 사본에까지 적용하느냐, 원본에만 적용하느냐의 문제가 있는데, 일단 제가 속한 교단에선 이걸 '원본 상 무오함'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성경의 원본이란 현재 존재하지 않아, 현존하는 성경은 모두 사본과 그 번역본입니다. 원본 상 무오하지만 사본으로 옮겨 쓰는 중에 다소의 오류는 존재할 수 있다고 보는 주의입니다만, 그렇다고 해도 성경이 사람의 말이 된 것은 아니고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보고 있어요.

 그리고 성경이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기본적으로 사람을 통해 적었기 때문에, 그 문서가 쓰여졌을 때의 시대적 상황이나 문서의 수신자 등도 고려해서, '이것이 그 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인데 이 메시지는 현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겠는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문자 하나하나를 주문처럼 여겨서 신봉시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또 때로는 문자 그대로 이해해야 하는 경우도 있어서, 성경 연구란 좀 머리가 아픈 작업입니다. 괜히 신학이 있는 게 아니죠)

 뭐 그래서, 말이 좀 길었고, 이 블로그에 오시는 대부분의 방문자들께서는 머리 아프다고 생각하실 이야기였습니다만, 성경을 누구의 말로 보고 있느냐 하는 시각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이렇게 굳이 설명을 적었습니다.

 간단요약- 성경을 인간이 나름대로 적은 문서들의 총집합으로 보느냐, 신께서 인간에게 영감을 주셔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있는데 전자가 자유주의이고 후자가 근본주의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지만 성경의 정경화 작업 때 결국 성경을 인간이 고른 것이 아니냐 하는 말도 있는데, 정경화 작업은 그냥 꽂히는 대로 취사선택한 것이 아니랴 문서의 사도성에 근거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다고 말씀드려 두겠습니다. 사도성 (使徒性)이란 사도가 썼느냐 아니냐 하는 게 기준이 되었다는 뜻이고 사도의 개념이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만난 적이 있는- 이른바 친전제자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사도 중에서 사도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느냐 아니냐의 기준이 좀 복잡해질 수도 있는데, 이게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직접 보았다고 인정됩니다.


2. 그래서 <초기 기독교의 형성>이 어떤 성격의 책이냐 하면

 위에서 제가 말한 내용들을 다 부정하고 들어갑니다. 뭐, 그런 신학도 있기는 한데 전 별로 그게 옳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옳다고 생각하면 애당초 위에서 떠들지도 않았겠죠. <초기 기독교의 형성>이 제목인 책인 만큼 초기의 기독교가 어떤 식으로 자아를 확립했느냐 하는 내용을 적어 가고 있는데, 이게 워낙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는 터라 하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저한텐 걸렸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적혀 있지만 이건 저자가 의도를 갖고 이렇게 썼을 거고 저렇게 편집했을 거고 또 이건 너무 전설성이 심하니까 난 못 믿겠다, 하지만 뭐 이 정도는 믿어도 괜찮을 것 같아, 아마 진실은 이거일 거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예장 합신 교단 사람으로서 거북함이 없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죠.

 예수님의 빈 무덤에서 여인들이 천사를 만난 것은 신화적인 요소라며 부정하고 (p.37) (책 내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너무 빈약해 보이는 여인들의 증언을 천사들의 증언으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려 했으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p.38)'), 바울과 실라가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후 소녀의 주인에게서 고발당해 감옥에 갇혔다가 지진이 일어나 자유로이 되었지만 도망가지 않았고 이에 충격 받은 간수가 회심하였고 다음날 석방된다는 이야기도 '전설적인 색채가 강한 이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들과 동일한 사실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 (p.107)'······는 식으로 언급합니다. 뭐 비단 이 두 군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책 전체적으로 이렇습니다. '내 이성이 받아들이는 것만 받아들이겠어!'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성경을 이런 식으로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신기하달까 뭐랄까

 덧붙여 상황에 대한 설명이 그렇게 명쾌한 것도 아닙니다. '아마도 이랬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저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라는 식의 문장이 제법 많은데, 추리소설에선 그래도 되지만 신학에선 그러면 안 된다고 봅니다. 더불어 성경말씀을 근거구절로 꽤 달아놨지만 이게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게 볼 수도 있는 부분들이라, 본인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논의의 여지는 충분히 많습니다.

 ······논의의 여지가 없으면 제가 받아들였지, 이렇게 까고 있겠습니까.


3. 그래도 얻을 건 있는데

 본인이 성경 읽을 때 자기가 납득할만한 내용만 취사선택해 받아들인 그 방법 그대로, 저도 이 책을 읽으며 제가 납득할만한 내용만 취사선택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과 달리 이건 명백하게 논의의 여지 없이 사람의 글이기 때문에······.

 일단 초기 기독교 역사 백여 년 정도 동안, 기독교인들이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자아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지지 않았던 것만은 맞는 듯 싶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선 유대인의 왕으로 오셨고, 유대인인 초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유대교의 연장선에서 있을 수 있다고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게 시일이 지나면서 조금씩 갈려지게 되었고, 분쟁이나 갈등 가운데에서 점점 정체성을 확립했다······ 고 보면 됩니다. (도식을 좀 아주 간략화시키면) 야고보는 친유대인적이었고 바울은 친이방인적이었고.

 하지만 이 내용을 얻기 위해 굳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느냐? 고 묻는다면 전 NO라고 답하고 싶습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습니다. 이렇게까지 성경을 인간의 문서 취급하면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다면 그건 거의 틀림없다······ 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얻는 부분 자체가 적어서 말이죠. 초기 교회사를 다루는 근본주의적 서적도 있잖을까 생각합니다만, 그쪽도 좀 찾아봐야겠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