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이 포 벤데타
앨런 무어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아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원작주의자입니다. 어떤 작품의 원작이 영화인 경우 영화만을 보고, 소설인 경우엔 소설만을 읽죠. 그러니 <브이 포 벤데타> 같은 경우도 당연히, 원작인 만화만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걸 꼭 사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이젠 슬슬 출간된 외쿡 만화 대부분을 사버리게 되어서······ (꼭 말하자면 샌드맨이나 프랭크 밀러의 만화는 안 사긴 했는데, 그것들은 일단 그다지 제 취향은 아니어서 앞으로도 별로 살 듯하진 않습니다) 어쨌거나 많이들 '이 현실이 한국과 엄청나게 닮았다' 하길래 한 번쯤 읽어나보자 싶어서 사봤습니다.

 읽고 난 후의 감상은······ 제겐 '한국의 현실과 닮았다'고 생각되지는 않더군요. 20년 전의 한국이었으면 몰라도,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고 권력자들의 이익만을 위해 나라가 존재하는 이런 전체주의적 사회는, 현재의 한국과는 그리 닮지 않았습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우리 나라가 제법 민주화가 되긴 했거든요. 북한이라면 어울릴 만합니다만.

 이 만화를 한 마디로 말해보라면, '희망적인 <1984>'라 하겠습니다. 감시되고 억압받는 세계,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ㅡ 권력에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채워진 세계. 그러나 모두가 전부 대항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어서, 어떻게든 억압에 대항하려는 사람이 있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들로 이야기를 이끌게 됩니다. 하지만 <1984>와 <브이 포 벤데타>에 다른 점이 있다면, <1984>는 결국 처참하게 실패하고 의지 또한 산산히 부서지고 말지만 <브이 포 벤데타>는 그렇지 않고 희망적으로 마무리된다는 점, 그리고 <1984>와 달리 <브이 포 벤데타>의 '대항자'는 다소 외국 히어로 만화의 그것처럼 '영웅'적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이겠군요. 사실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과연 V 같은 '히어로'가 없었다면 체제 전복의 희망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사람들 전체가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좀 히어로 만화로 읽혀요. (여담이지만, 영화판 <브이 포 벤데타>에서는 모두가 V가 된다······ 는 마무리가 있다는 모양인데, 만화에서는 그렇진 않고 '계승'이라는 마무리가 됩니다)

 흠, 어쨌든 전 우리 사회가 이런 식으로 억압되는 체계로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경계하는' 책이 나와 팔릴 수 있다는 자체가 우리 사회가 그렇게 변하지 않으리라는 증거라 보죠. 아마도, 우리에게는, 이미 'V'가 필요치 않을 겁니다. 아무리 히어로가 멋있어 보여도, 히어로가 나올 필요가 없는 세계가 멋진 법이죠. (그게 영화판의 마무리인가요? 전 영화를 안 봐서요)

 만화 자체는, 작화가 좀 낡은 느낌은 들지만, 연출 감각에서는 지금 봐도 탄성을 올릴만한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20년 전 그림이라는 걸 감안하고 보면 그림 자체도 나쁘지 않고요. 색채는 좀 빛바랜 느낌이지만, 파시즘에 무릎꿇은 암울한 세계가 배경인만큼 오히려 더 잘 어울립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