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슈피겔만 지음, 권희종 외 옮김/아름드리미디어

 살아가면서 단 한 권의 만화책만 읽을 수 있다면, 전 이 <쥐>를 택하겠습니다. 전위만화가인 아트 슈피겔만이 아버지 블라덱 슈피겔만의 실제 체험을 바탕으로 그려낸 이 만화는, 2차 대전 때의 유태인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가를 수기와도 같은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과장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저 있었던 사실을 감정을 섞지 않고 그려나갑니다. 이와 같이 충격적인 이야기는 특별히 작가가 사건들을 강조하지 않아도 그 이야기 자체만으로 독자에게 강렬한 울림을 전해주는데, 아트 슈피겔만은 그 일을 아주 잘 해냈어요.

 이야기는 두 개의 시점을 동시에 진행시킵니다. 아트 슈피겔만 (아들)과 블라덱 슈피겔만 (아버지)의 현재 시점에서의 이야기를 기본으로, 블라덱이 들려주는 2차대전 당시 과거의 이야기를 수기처럼 삽입해서 진행합니다. 현재 시점으로 돌아오면 과거 시점에서의 그 암울하고 갑갑한 분위기가 어느 정도 해소되어 긴장을 풀 수 있게 해주는데, 또한 그 동시에 과거에 '그런' 일을 겪었던 사람이 어떤 삶을 살게 되는가를 아트가 보는 블라덱의 삶의 모습을 통해 또한 그려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적어도 두 가지를 알게 되죠: '2차 대전 당시에 유태인이 겪었던 고통'과 '그 극단적인 체험을 겪은 사람이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게 되는가'.

 적어도 아트 슈피겔만에게 유태인이 받은 고통만을 강조할 생각이 없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랬다면 아버지 블라덱이 흑인을 차별했고, "검둥이는 유태인과 비교할 수도 없어!"라고 말하기까지 한 사실 (<쥐> Ⅱ, p.99)을 굳이 그려냈을 필요는 없었겠죠. 말하자면 <쥐>에서는 있었던 사실을 그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가치 판단은 독자들이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작가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가 있음이 부분부분 나타나기야 하지만, 그것을 주입하려고 하지는 않아요. 그저, 있었던 일들을 제공하죠. 이게 이 만화의 다큐멘터리적 성격을 더욱 강화시켜줍니다.

 유태인이 쥐로 그려지고 독일인이 고양이로 그려졌다는 게 이 만화의 은유성을 단적으로 말해준다는 건 사실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말하기는 해야 하겠죠. 어쨌거나 이 만화는, 캐릭터들 모두가 동물로 그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만화보다 현실적으로 보입니다. 넘치도록 현실적이죠. 갑갑하고, 고통스럽고. 더불어 이 만화는 흑백이고 마치 판화를 연상시키는 굵고 강한 선을 지니고 있는데 이게 동물로 표현되어 있는 캐릭터들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켜서 한층 만화를 호소력 있게 만듭니다. 세련된 그림체에 풀컬러였다면 화려했을지는 모르지만 <쥐>처럼 강렬하게 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도요.

 전 이 만화를 중학생 때 처음 읽었는데, 그 때 읽을 때도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만 지금 다시 읽어도 역시 좋더군요. 저는 왜 2차대전 때 있었던 일에 매료될까요? 어쩌면 제가 한국인이고, 핍박을 받은 역사가 있는 나라의 후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둠 그 자체를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기분 좋게 읽을 수 있는 만화는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 무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만화입니다.

 저는 가끔 일본 만화를 생각합니다. 그저 미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마냥 자국을 묘사하는 일본 만화들을요. 미국은 일본에 원폭을 투하했고 일본은 그에 당한 피해자죠. 너무 많은 일본 만화들이 '자, 우린 피해를 입었어, 하지만 일본의 혼은 꺾여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때로 저는 일본 만화가 무섭습니다.

 <쥐> Ⅱ 42페이지에서 아트 슈피겔만은 이런 말을 합니다.

 인터뷰어: "선생님의 책이 독일어로 번역되고 있다죠? 독일 청소년들은 대학살 이야기라면 이미 질릴 정도로 듣고 봤습니다. 이 사건들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일인데 왜 그들이 죄책감을 느껴야 할까요?"
 슈피겔만: "누구에게 얘기할까요? 하지만 나치 독일 하에서 번성했던 많은 기업들이 그 어느 때보다 더 번창하고 있죠. 모르겠어요. ···아마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껴야죠. 전부가! 영원히 말예요!"


 덧. 이 포스트가 이 티스토리의 천 번째 포스트가 되었군요. 여기에 뭔가 의미를 담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요.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