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위의 딸
알렉산드르 뿌쉬낀 지음, 석영중 옮김/열린책들

 제가 읽은 건 Mr.Know 세계문학 판이지만 이것도 어쨌든 표지만 리뉴얼됐을 뿐 내용 자체는 같다고 볼 수 있으니 열린책들 세계문학 판으로 링크합니다. (사실상 Mk.Know 세계문학 판은 이제 품절된 셈이고, 구할 수 있는 쪽을 연결하는 게 낫겠죠)

 <대위의 딸>은 러시아의 유명한 시인인 뿌쉬낀의 유일한 장편소설입니다. 제가 시와는 영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시인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을 알 정도니 어지간히 굉장한 사람이라 할만하겠죠. 흠, 워낙 유명한 사람이다보니 ㅡ게다가 무려 '러시아 문학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시인 뿌쉬낀, 그의 유일한 장편소설이자 산문 예술의 정점'이라고 광고하고 있으니ㅡ 읽기 전에는 '이거 좀 머리 아픈 소설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핬습니다만, 막상 읽어보니 전혀, 이건 굉장히 편안하게 읽어나갈 수 있는 소설이더군요.

 대략 이런 느낌입니다: 실제 역사와 병행하여 전개하되 주인공 개인의 입장에서만 편하게 읽어나갈 수 있도록 서술되는데, 충분한 연애 요소 (제목부터가 '대위의 딸'이고말이죠)가 포함되어있고, 거기에 더하여 일을 망가뜨리려 안달이 난 비열한 연적까지 존재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훌륭한 오락소설이지만, 역사와 병행하여 서술된다는 점이 <대위의 딸>을 단순한 오락소설이라고 말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대위의 딸>은 뿌가쵸프 반란[각주:1]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 소설의 주인공인 그리뇨프는 그 뿌가쵸프를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죠. 이야기 전개 자체야 읽어보시면 아실 테고,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 소설에서는 뿌가쵸프와 예까쩨리나를 대비시키고 있는데, (혁명적인 사상을 기본적으로 갖고 있었으나, 이 소설을 쓸 당시 황제에게 붙들렸고 감시되고 있었던 뿌쉬낀의 입장상) 물론 예까쩨리나에 대해 무척 호의적으로 쓰여있으나 (책 뒤에 해설에 쓰여있듯) 딱 그만큼의 호의를 뿌가쵸프에게도 부여하고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존재가 될 수도 있으나 한없이 너그러운 존재가 될 수도 있는 사람, 분명 예까쩨리나는 크나큰 호의를 베푸는 도량 있는 군주지만 그런 호의와 도량을 뿌가쵸프 역시 보여주죠. 이 소설에서의 갈등의 해결은 모두 이 두 명의 '호의'에 의해 풀립니다. 모든 갈등의 해결이 이 두 사람의 호의에 의해 풀려나간다는 점은 소설로서의 완성도를 좀 떨어뜨리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남발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만 사실 이 소설의 기초를 연애소설로 보지 않고 정치소설로 본다면 오히려 고도의 장치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갈등의 해결이라는 크나큰 역할을 이 두 명에게 부여하고 있는 만큼, (분량상으로는 큰 비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두 명을 강력하게 대비시키기 때문이죠. 책 앞날개의 설명을 인용해보자면, 뿌쉬낀은 '러시아 전제 군주에게 반란자보다 우월한 역사적 지위를 부여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겁니다.

 여주인공인 '대위의 딸', 마리야에 대해서도 약간은 언급을 해두어야겠군요. 뿌쉬낀은 얼굴 외에는 볼 것이 없다고 할 만한 여성, 나딸리야 곤차로바와 결혼했으며, 결혼 후에 그녀의 남성편력으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라지만 엄격히 말하면 뿌쉬낀 자신도 여성편력이 상당했으니, 여기서 남말할 입장은 못 되겠군요) 그리고 뭐, 아시는 분은 다 아시겠지만, 뿌쉬낀은, 나딸리야와 염문을 뿌린 끝에 나딸리야의 여동생과 결혼했지만 그 결혼 후에도 여전히 나딸리야와 밀회한 프랑스인 단테스와 결투하여 결투의 결과로 큰 부상을 입고 사망하게 됩니다. 어쨌거나 그런 부인을 두고 있었던 뿌쉬낀입니다만, <대위의 딸>의 여주인공 마리야의 모습은 더없이 이상적으로 그려져있습니다. 아름답고, 현명하며, 정숙하고, 결단력이 있죠.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여성입니다. 나딸리야와의 결혼으로 고통받는 중에 써낸 <대위의 딸>에서 마리야를 그려내며, 뿌쉬낀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글쎄, <대위의 딸>의 주인공 그리뇨프는 마리야를 위해 쉬바브린과 결투했고 그 끝에 부상을 입지만 살아났지만, 뿌쉬낀 자신은 나딸리야를 위해 단테스와 결투한 끝에 부상을 입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죠.


이건 나딸리야의 초상화······ 무려 라파엘로의 <마돈나>와 유사한 미모라길래,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 찾아봤습니다


 어쨌거나 그런 소설입니다. 연애소설로서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으나 동시에 시인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비추어보면 좀 씁쓸하게 읽히기도 하죠. 모처럼 뿌쉬낀이니, 그의 유명한 시 하나와 함께 감상을 마치겠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Если жизнь тебя обманет,
Не печалься, не сердись!
В день уныния смирись:
День веселья, верь, настанет.

Сердце в будущем живет;
Настоящее уныло:
Все мгновенно, все пройдет;
Что пройдет, то будет мил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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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간략하면, 독일계의 가난한 귀족인 예까쩨리나가 1762년 7월에 남편인 뾰뜨르 3세를 폐위시키고 (뾰뜨르 3세는 그 후 8일만에 암살됩니다) 제위에 올라 선정을 가장하여 농노들을 착취하자, 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입니다. 뿌가쵸프는 살해된 뾰뜨르 3세를 참칭했고 예까쩨리나 행정부를 크게 위협했으나, 종국에는 패배 후 반란군들에게서 정부에게 넘겨져 1775년 1월에 사형당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