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초
조지 D. 슈먼 지음, 이강표 옮김/황금가지
상투적입니다만, 세상에는 책을 나누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 이 방법만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이런 방법으로도 한 번 나눠봅시다. 하나는 책을 읽을 때 남은 분량이 줄어갈수록 아쉬워지는 책, 또 다른 하나는 책을 읽을 때 남은 분량을 보고 아직도 이만큼 남았나 싶어 암담해지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 <18초>는, 불행히도 후자였습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해보죠. 책 뒤에 있는 소개를 그대로 옮깁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고, 그와 맞바꾸듯 죽은 사람의 마지막 기억 18초간을 엿볼 수 있게 된 여인 셰리 무어. 아름다운 외모와 신비한 초능력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경찰 수사에 협조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얼 사이크스. 교묘히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대형 교통사고의 우컨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29년을 복역한 연쇄 살인범. 상반된 삶을 살았던 둘의 인생은 그들이 정착한 뉴저지의 관광도시 와일드우드에서 교차되기 시작한다. 십대 소녀 연속 실종 사건이 전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다."
소재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봅니다.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요. 아마 이 스토리를 보고, 저 같은 독자라면 이런 줄거리를 생각할 겁니다. '아, 셰리 무어를 중점으로 서술되면서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단서를 찾아 나가고, 그렇게 문제가 이어지는 와중에 살인마의 문제가 교차되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마지막에는 살인마에게 생명 위협 좀 받지만 어떻게 잘 해결되겠구나.' 이게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작가에게 이런 내용을 참 재미 없게 써내는 훌륭한 재능이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모든 글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그 자기 주관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근거 있어 보이게 포장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가 글을 쓰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같은 경우도 저는 '이거 재미 없었어요'라고 한 마디로 압축될 것을 '대체 왜 재미가 없었느냐?'를 있어 보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이 작가는 효과적으로 소설을 써서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왜 재미가 없었느냐, 등장인물의 고통이 와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 이입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어쩌면 이 작가가 경찰 출신 작가이기 때문에, 사건 일지를 써내듯 글을 쓰는 데 익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이라기보다는 각기 조금씩 떨어지며, 개개의 사건 파일을 소설로 구성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인 듯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이라면 리얼리티가 있어서 사실 자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소설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캐릭터에게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해 줘야죠.
문제는 등장하는 캐릭터가 너무 많으며, 그 캐릭터의 상당수가 일회용이라는 점입니다. 그 일회용 캐릭터에 대한 서술은, 물론 그 캐릭터들에 대한 각각의 설명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들을 설명하느라 정작 주역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할 지면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입니다. 보통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서 한둘 정도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건을 보는데, 이 소설은 캐릭터가 너무 많이 나오며 시점 전환도 잦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셰리 무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특히 중후반에서는) 소설 전체로 볼 때 1/10 정도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대체 누구의 시선에서 사건을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녀의 비중이 적다는 문제는, 그녀의 능력이 소설 내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도 의외로 지나치게 낮다는 점과도 함께 합니다. 소설의 초반에서 그녀는 죽은 자의 기억 18초를 보는 능력으로 사건 하나를 해결하며, 마치 앞으로도 이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 나갈 듯하게 그려놓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녀의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서는 다른 주인공들 (이를테면, 경사인 켈리 린치 오쇼네시 같은 인물)이 찾으며, 셰리가 하는 일은 거기에다 그들에게 심적 확신을 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셰리가 본 어떤 것을 통해 단서를 찾아내는 일은 없으며, 또한 그녀의 능력 때문에 곤란을 받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냥 곁다리입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
작가: 제가 이번에 경찰 생활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하나 써봤는데요.
출판사: 흠, 괜찮긴 한데 좀 밋밋한데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팔립니다. 뭔가 주인공을 하나 추가해서 특별한 능력을 넣으면 어떨까요? 우리도 뭔가 광고할만한 게 있어야 하니까.
(협의 후)
출판사: 자, 죽은 사람의 기억 18초를 보는 사람으로 하죠. 미인에 맹인 여성이면 독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작가: 알겠습니다. 추가해보죠.
실제로 이 정도기야 했겠습니까만 거의 이렇게 느껴질 정도로 주인공의 비중이 약합니다. 요는 이 작가가 너무 많은 캐릭터들을 다 보여주려 했고, 그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혼란스러워졌다는 겁니다. 어쩌면 작가는 애초부터 셰리 무어의 존재는 양념 정도로만 생각했고, 사실은 켈리 경사를 활용해서 진실에 접근해가는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또 약간의 문제가 있는데, 이 소설은 진실을 추적하는 맛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살인마의 정체가 나와 버리거든요. 게다가 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시점 전환으로 다 나와버리죠.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때때로 악재가 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차피 다 알기 때문에 켈리 경사가 사건을 파헤치든 어쩌든 그녀의 마음에 별로 공감하지 못하며, 뭔가 놀라운 능력으로 사건을 풀어나가주길 기대했던 셰리 무어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으니 통 흥미가 안 생기죠.
그러면 살인범 그 자체는 어떨까요? 역시 별 매력이 없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처음부터 나오기에 '아니, 이렇게 다 보여줄 거면 설마 뭔가 반전이 있겠지. 이렇게 일을 꾸미면서 뭔가 뒤에 더 있기라도 하거나 해야 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 없습니다. 이놈은 그냥 막나가는 살인마입니다. 미학도 슬픈 과거도 없으며 그냥 자기만 아는 변질자입니다. 그는 셰리 무어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재에 불과······ 해야 했겠지만 정작 셰리 무어도 별 비중이 없어서.
그리하여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분량이 긴 것이 오히려 독이었습니다. 이게 500페이지가 좀 안 되는데, 처음 100페이지를 읽는 데 두 주 이상 걸리고 (몰입이 안 되어서), 결국 포기하고 마지막 350페이지는 40분만에 읽어버렸습니다. 어떤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글이 좀 재미있게 읽히는데, 도저히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사건 파일식 르포르타주라고 보기에는 또 문장이 별로 담담하지도 않고요. 전지적 작가 시점에 더불어 작가가 종종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부분도 제법 있습니다. 어쨌든 몰입을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아무래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소설에 도무지 몰입이 안 되어서요.
그런 이유로 여러분들께는 별로 추천은 못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 책 제가 골라서 선물받은 건데, 이게 폭탄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까야 제맛······ ······이랄까 도무지 칭찬을 할 수가 없어서요. 넵, 본격 <18초> 까는 글 여기에서 끝냅니다.
조지 D. 슈먼 지음, 이강표 옮김/황금가지
상투적입니다만, 세상에는 책을 나누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뭐 이 방법만 있는 건 아닙니다만 이런 방법으로도 한 번 나눠봅시다. 하나는 책을 읽을 때 남은 분량이 줄어갈수록 아쉬워지는 책, 또 다른 하나는 책을 읽을 때 남은 분량을 보고 아직도 이만큼 남았나 싶어 암담해지는 책입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 <18초>는, 불행히도 후자였습니다.
간단하게 소개를 해보죠. 책 뒤에 있는 소개를 그대로 옮깁니다. "어릴 때 사고를 당해 시력을 잃고, 그와 맞바꾸듯 죽은 사람의 마지막 기억 18초간을 엿볼 수 있게 된 여인 셰리 무어. 아름다운 외모와 신비한 초능력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녀는 자신의 특기를 살려 경찰 수사에 협조할 결심을 한다. 그리고 얼 사이크스. 교묘히 경찰의 추적을 피하다 대형 교통사고의 우컨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29년을 복역한 연쇄 살인범. 상반된 삶을 살았던 둘의 인생은 그들이 정착한 뉴저지의 관광도시 와일드우드에서 교차되기 시작한다. 십대 소녀 연속 실종 사건이 전 도시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것이다."
소재는 꽤 괜찮은 편이라고 봅니다. 잘 살려내기만 한다면요. 아마 이 스토리를 보고, 저 같은 독자라면 이런 줄거리를 생각할 겁니다. '아, 셰리 무어를 중점으로 서술되면서 죽은 사람들의 기억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 단서를 찾아 나가고, 그렇게 문제가 이어지는 와중에 살인마의 문제가 교차되면서 절정으로 치닫고 마지막에는 살인마에게 생명 위협 좀 받지만 어떻게 잘 해결되겠구나.' 이게 그리 틀린 추측은 아니었습니다만, 이 작가에게 이런 내용을 참 재미 없게 써내는 훌륭한 재능이 있어서 문제였습니다.
모든 글은 기본적으로 주관적입니다. 그 자기 주관을 얼마나 그럴듯하게 근거 있어 보이게 포장해서 읽는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느냐가 글을 쓰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지금 같은 경우도 저는 '이거 재미 없었어요'라고 한 마디로 압축될 것을 '대체 왜 재미가 없었느냐?'를 있어 보이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 이 작가는 효과적으로 소설을 써서 독자들에게 전달하지 못했습니다. 왜 재미가 없었느냐, 등장인물의 고통이 와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감정 이입을 하기가 어려웠어요.
어쩌면 이 작가가 경찰 출신 작가이기 때문에, 사건 일지를 써내듯 글을 쓰는 데 익숙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소설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은 서로 유기적이라기보다는 각기 조금씩 떨어지며, 개개의 사건 파일을 소설로 구성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인 듯한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약 실화를 바탕으로 한 글이라면 리얼리티가 있어서 사실 자체를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을지 모르지만, 소설이라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좀 더 캐릭터에게 독자가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해 줘야죠.
문제는 등장하는 캐릭터가 너무 많으며, 그 캐릭터의 상당수가 일회용이라는 점입니다. 그 일회용 캐릭터에 대한 서술은, 물론 그 캐릭터들에 대한 각각의 설명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그들을 설명하느라 정작 주역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할 지면을 주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입니다. 보통 독자는 소설에 나오는 캐릭터 중에서 한둘 정도에 감정을 이입하고 그들의 시각에서 사건을 보는데, 이 소설은 캐릭터가 너무 많이 나오며 시점 전환도 잦습니다. 가장 중심이 되는 인물은 셰리 무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녀는 (특히 중후반에서는) 소설 전체로 볼 때 1/10 정도밖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대체 누구의 시선에서 사건을 보아야 할지 혼란스러워집니다.
그녀의 비중이 적다는 문제는, 그녀의 능력이 소설 내에서 차지하는 중요도도 의외로 지나치게 낮다는 점과도 함께 합니다. 소설의 초반에서 그녀는 죽은 자의 기억 18초를 보는 능력으로 사건 하나를 해결하며, 마치 앞으로도 이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 나갈 듯하게 그려놓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녀의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단서는 다른 주인공들 (이를테면, 경사인 켈리 린치 오쇼네시 같은 인물)이 찾으며, 셰리가 하는 일은 거기에다 그들에게 심적 확신을 더해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셰리가 본 어떤 것을 통해 단서를 찾아내는 일은 없으며, 또한 그녀의 능력 때문에 곤란을 받거나 특별한 이벤트가 일어나지도 않습니다. 그냥 곁다리입니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이런 느낌입니다 →
작가: 제가 이번에 경찰 생활을 바탕으로 한 소설을 하나 써봤는데요.
출판사: 흠, 괜찮긴 한데 좀 밋밋한데요. 뭔가 특별한 게 있어야 팔립니다. 뭔가 주인공을 하나 추가해서 특별한 능력을 넣으면 어떨까요? 우리도 뭔가 광고할만한 게 있어야 하니까.
(협의 후)
출판사: 자, 죽은 사람의 기억 18초를 보는 사람으로 하죠. 미인에 맹인 여성이면 독자들이 좋아할 겁니다.
작가: 알겠습니다. 추가해보죠.
실제로 이 정도기야 했겠습니까만 거의 이렇게 느껴질 정도로 주인공의 비중이 약합니다. 요는 이 작가가 너무 많은 캐릭터들을 다 보여주려 했고, 그 때문에 오히려 독자가 혼란스러워졌다는 겁니다. 어쩌면 작가는 애초부터 셰리 무어의 존재는 양념 정도로만 생각했고, 사실은 켈리 경사를 활용해서 진실에 접근해가는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또 약간의 문제가 있는데, 이 소설은 진실을 추적하는 맛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살인마의 정체가 나와 버리거든요. 게다가 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시점 전환으로 다 나와버리죠. 전지적 작가 시점이란 때때로 악재가 되기도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어차피 다 알기 때문에 켈리 경사가 사건을 파헤치든 어쩌든 그녀의 마음에 별로 공감하지 못하며, 뭔가 놀라운 능력으로 사건을 풀어나가주길 기대했던 셰리 무어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으니 통 흥미가 안 생기죠.
그러면 살인범 그 자체는 어떨까요? 역시 별 매력이 없습니다. 너무 당당하게 처음부터 나오기에 '아니, 이렇게 다 보여줄 거면 설마 뭔가 반전이 있겠지. 이렇게 일을 꾸미면서 뭔가 뒤에 더 있기라도 하거나 해야 하지 않아?'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거 없습니다. 이놈은 그냥 막나가는 살인마입니다. 미학도 슬픈 과거도 없으며 그냥 자기만 아는 변질자입니다. 그는 셰리 무어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소재에 불과······ 해야 했겠지만 정작 셰리 무어도 별 비중이 없어서.
그리하여 이 모든 일들의 결과로, 분량이 긴 것이 오히려 독이었습니다. 이게 500페이지가 좀 안 되는데, 처음 100페이지를 읽는 데 두 주 이상 걸리고 (몰입이 안 되어서), 결국 포기하고 마지막 350페이지는 40분만에 읽어버렸습니다. 어떤 캐릭터에게 감정을 이입해야 글이 좀 재미있게 읽히는데, 도저히 누군가에게 감정을 이입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사건 파일식 르포르타주라고 보기에는 또 문장이 별로 담담하지도 않고요. 전지적 작가 시점에 더불어 작가가 종종 독자에게 말을 걸어오는 듯한 부분도 제법 있습니다. 어쨌든 몰입을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입니다만, ······아무래도,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이 소설에 도무지 몰입이 안 되어서요.
그런 이유로 여러분들께는 별로 추천은 못 드리겠습니다. 사실 저도 이 책 제가 골라서 선물받은 건데, 이게 폭탄이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이런 건 까야 제맛······ ······이랄까 도무지 칭찬을 할 수가 없어서요. 넵, 본격 <18초> 까는 글 여기에서 끝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