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사라보세
Zal.Sa.Ra.Bo.Se.

-의미불명패러디난무엽기발랄실험소설-

제 1장. 용사여 깨어나라 …… (5)

“눈을 뜨세요, 용사님.”

상냥한 목소리가 용사의 몸을 감쌌다. 따스한 빛에 휘감긴 용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고 감겨 있던 그의 눈이 뜨였다. 그 입술이 부들거리더니 갑자기 열리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건 미친 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요.”

도망가려는 가르마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올리며 샤이륑이 발랄하게 말했다.

“당신이 용사로 선택된 이상 당신에게 되돌아가는 선택지 따윈 존재하지 않는답니다. 용사의 길이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죠!”
“이게 어딜 봐서 용사의 길이야! 괴롭히려는 거지, 이 소설 그냥 날 괴롭히려는 것뿐이지?”

허공에 붙들려 다리만 버둥거리며 가르마가 울부짖었다. 샤이륑이 안타깝게 혀를 차며 답했다.

“그야 당신이 레벨이 낮아서 그런 거죠. 원래 어디건간에 쪼렙은 별 수 없는 법이에요. 하지만 안심하세요. 당신이 용사인 이상, 남들은 레벨이 안 올라가는데 당신 혼자 레벨이 올라가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마왕과도 맞짱 뜰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그 언젠가가 언제냐고요!?”

가르마가 징징댔고 샤이륑은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할 수 없네요. 일단 정말 레벨 낮은 몬스터부터 상대해보기로 해요.”
“아, 마침 좋은 몬스터가 저기 지나가네요.”

히로인 비엘이 눈을 빛내며 초원 저편을 가리켰다. 그 손가락을 따라 샤이륑과 가르마의 시선도 이동했는데, 그러자 그곳에서 붉은 빛의 젤리 같은 물체가 꾸물거리며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저건 슬라…….”
“아니에요.”

히로인이 히로인다운 상냥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슬라임이 아니라고요?” 가르마가 의아해하며 묻자 히로인이 방긋 웃었다.

“네, 저것은 레벨 0의 몬스터, 고추장입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추장이 왜 초원을 기어가는데? 아니 그보다 왜 고추장이 몬스터야!”

그리고 이런 세계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식을 가지고 있는 가르마의 절규.

“그 점에 대해서는, 작가도 많이 고민했답니다.”

거기에 답변하는 히로인. 그녀가 이어 말했다.

“이건 뭐랄까, 이른바 판타지의 로컬라이징, 한국적인 세계관을 만들어가기 위한 아름다운 고뇌인 것이지요.”
“이름만 바꾼다고 다 로컬라이징이냐!”

가르마가 당연한 반박을 했지만 모두 부질없는 노릇이었다. “닥치고 가서 싸우기나 하세요.” 샤이륑에 의해 허공을 날아 고추장과 맞붙음당했고, 초원 저편에서는 곰과 고추장의 혈투가 펼쳐졌다.

“으악 질퍽해.”
“아오 눈! 내 눈! 악 매워!”

그렇게 (말 그대로) 눈물나는 사투를 벌이는 가르마를 안쓰러운 듯 바라보며, 히로인과 샤이륑은 풀밭 위에 앉아 한가로이 앞으로의 전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히로인.”
“네.”
“정말로, 이렇게 레벨업이 더디면 이 소설 대체 몇 편까지 가야 끝이 나는 걸까요?”
“그건 아마 작가도 생각 안 했을걸요.”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라는 거잖아요.”
“아하.”

그 즈음에서 저편에서 들려오는 가르마의 목소리: “하하하하! 이겼다! 내가 고추장을 상대로 이겼어!”

히로인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고 긴 생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히로인이 초원 위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윈도우 바탕화면으로 해도 좋을 법한 그림이었다. 히로인이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게 조금 아쉽지만, 그건 그런대로 수요가 있으니까. 아무튼.

“그럼 역시 그것밖에 없으려나요.”
“뭔데요?”
“캐시템.”
“오.”
“아마 경험치 늘려주는 템이 있을법한데.”
“경험치 좀 많이 줘도 어째 저건 망캐의 기미가 보이는데.”
“그래도 일단 좀 키워나보고 결정하죠. 아직 1렙인데.”
“그것도 그러네.”

그리고 그 즈음에서 다시 들려오는 가르마의 목소리: “살려줘. 히로인씨, 샤이륑씨, 누가 나좀 살려줘요. 이놈이 초고추장으로 변신했어요! 매운데 시기까지 해!”

“아무튼.” 가르마의 목소리를 깔끔하게 무시하며 히로인이 말했다. “뭔가 대책이 필요하긴 해요. 저 인간 너무 약해.”

“현실세계의 인간이 판타지로 오면 솔직히 저 정도로 약할걸요.”
“에이 그래도 저건 좀 심해요.”
“처음에 약해야 나중에 강해졌을 때 희열도 큰 법이긴 한데.”
“강해지긴 할지, 저 캐릭터가.”

그렇게 매도당하는 사이, 어쨌거나 우리의 가르마는 초고추장을 쓰러뜨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뜨는 메시지:

초고추장이 사망했다.
가르마는 2 경험치를 얻었다!
가르마는 2 레벨이 되었다!

“오오.”

히로인과 샤이륑이 입을 한데 모아 감탄했다. 그래, 뭔가 발전이 있긴 있구나.

“아.”

그 때 샤이륑이 무언가 생각난 듯 눈썹을 들어올렸다. 히로인이 그녀를 돌아보자 샤이륑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저 인간 키우는 데 좋은 방법이 생각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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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올립니다. 머리 식히는 데 좋은 글이에요.

Neissy였습니다.

Posted by Neissy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1. 루이첼트 2010.07.09 23:11

    이건 미친짓이야. 난 여기서 나가야겠어.

    장비를 정지합니다.
    정지합니다.
    정지하겠습니다.

    안되잖아?!




    플롯을 짜다 지친 네이시군의 잠깐의 외도였습니다. (...)

  2. 허, 이것은........

  3. 고추장이 가르마와 싸우다가 레벨업해서 초고추장이 되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