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신한 설정이 아니다. 좋은 문체도 아니다. 탁월한 묘사력도, 생동감 있는 인물조차도 1순위는 아니다. 글을 쓸 때 정말 필요한 것은, 그 글이 보여주는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감동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로지 작가 자신의 내면, 삶, 인생을 보는 시각으로부터만 나온다. 그것이 재료다. 처음에 열거한 모든 것들은 그저 양념이다. 재료를 맛나게 만들어주는 역할이다. 양념이 쓰레기 수준이라면 좋은 재료가 망가질 수 있으나 그렇다해도 그것은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재료 자체가 쓰레기라면 아무리 양념을 퍼부어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때 돌았던 이야기처럼, 똥맛 카레는 먹을 수 있어도 카레맛 똥은 먹을 수 없다.
좋다. 나는 지금 플롯에 매달리고 있다. 좀 더 좋은 설정을 가지고, 교묘한 짜임새와 제법 괜찮은 반전을 내어보려하고 있다. 물론 나 자신이 알고 있다. 그것은 양념이다. 잘 못 만드는 양념으로 괜히 재료를 버리는 것보다는 그보다는 덜 고급스럽더라도 내가 잘 만드는 양념으로 재료를 잘 살려내는 것이 낫다. 어쩌면 나는 어깨에 너무 힘이 들어갔는지 모른다. 사실 언제나 그렇다. 어깨에 힘을 뺐다고 생각해도, '어깨에 힘을 빼야지'라고 생각할 때는 항상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탐정은 죽지 않는다>가 별로 팔리지야 않았지만 평은 좋았기에 그 이상을 보여주겠다고 너무 힘을 넣고 있다. 그 결과 1년이 지나 11월 중순이 다 되도록 플롯을 완성하지 못했다. 좀 더······ 내가 잘 쓸 수 있는 방식으로 가보는 게 좋을듯싶다. 하루이틀을 끙끙대는 정도가 아니라 몇 개월을 끙끙대는 것이라면 이건 내 능력 이상의 물건을 내가 시도하려 한다는 뜻이다. 적어도, 지금 수준에서는 도전하기 좀 벅찼다는 뜻이겠지. 앞차기가 안되는 사람이 날아차기가 될 리 있나.
나는 내 글이 '장르'문학보다는 장르'문학'으로 받아지길 바란다. 지금 읽고 십 년 뒤에 읽으면 '이거 그땐 참 재미있었는데······'라는 반응이 나오는 게 아니라 '지금 읽어도 좋네'라는 반응이 나오길 원한다. 그런 글을 원한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하지 않은가 싶다. 안 되는 반전에 목매달 게 아니다. 애당초 나 자신이 반전이 쩔어주는 걸 봐도 '흠 그렇군' 하고 마는 사람인데.
······뭐 이러니저러니 말했지만 적들에게 너무 빈틈이 없게 만들어놔서 고생인게지. 좀 더 빈틈을 만들어서 수월하게 파고들어갈 수 있도록 해봐야겠다. 증거가 나올 구석을 너무 없애버렸어, 아무리 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