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관
존 딕슨 카 지음, 김민영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한 달 전쯤 감상을 올렸던 '황제의 코담뱃갑'을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 네, 존 딕슨 카, 바로 그 작가입니다. 사실 이 '세 개의 관'까지 살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황제의 코담뱃갑 리플에 세 개의 관의 트릭이 기발함으로는 압도적이라는 말이 있어서 (물론 글 전체적인 완성도는 좀 떨어진다는 말도 있긴 했습니다만) 구입했지요.

뭐, 각설하고, 이 작품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밀실살인이 등장합니다. 한 가지는 완전히 닫혀진 공간에서 일어난 밀실살인이고 또 한 가지는 완전히 열린 공간에서 일어난 밀실살인입니다. 전자의 경우 외부로 통하는 출구는 세 개가 있는데, 문은 계속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고 굴뚝 밖으로는 발자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으며 (이 때 눈이 내렸기 때문에 공기보다 가볍지 않은 이상 그 위를 지나갔다면 발자국이 남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너무 높고 또 붙잡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희생자 이후에 또 한 명의 희생자가 나옵니다. 그가 죽는 모습을 세 사람이 보았는데, 아무도 근처에 없는 거리 한복판, 눈 쌓인 거리에서 죽었으며 그는 등에 총을 맞았기 때문에 자살일 리도 없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코트에 뚫린 구멍이 검게 타 있었으므로 총을 바짝 대고 쐈거나 혹은 고작해야 5~7cm정도 떨어진 곳에서 쏘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근처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음을 세 명이나 되는 믿을 만한 증인이 증언합니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요. 진상은 마지막 장에서 밝혀집니다. (응?)

위에서 언급한 PaleSara의 리플, 압도적으로 기발한 트릭이지만 좀 기계적으로 복잡하고 전체적으로 완성도도 떨어진다.. 라는 걸 여기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만, 일단 다 읽고 나서 평가하자면 저로서는 이 트릭이 딱히 복잡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납득할 만한 수순이랄까요? 게다가 이 소설 역시 독자에게 '모든 자료'를 공개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조금 신경만 쓴다면 추리자가 아는 것을 독자 역시 알아낼 수 있습니다. 물론 저는 그냥 읽었지만요. (...)

여담으로 감명깊었던 것은 소설 후반부의 '밀실 강의'를 할 때 펠 박사가 한 말입니다. 247페이지의 내용을 한 번 그대로 옮겨 와 보겠습니다.


"이제부터 강의를 좀 하고 싶소." 박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미스터리소설에서 '밀폐된 방'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상태의 일반적인 구조와 그 발전에 대한 것이오. 흠! 반대하는 사람은 이 장을 건너뛰면 돼요. 흠! 우선 첫째로 신사 여러분! 나는 지난 40년 동안 자극적인 소설로 내 정신을 향상시켜왔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데······."

"그런데 불가능한 상태를 분석하려는 거라면서" 하고 페티스가 끼어들었다. "왜 하필 미스터리소설을 논하시는 겁니까?"

"왜냐하면" 하고 박사는 거침없이 말했다. "우리는 미스터리소설 속에 있는 인물이며, 그렇지 않은 척하며 독자들을 무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오. 온갖 구실을 짜내어 미스터리소설의 논의에 끌어들이는 건 그만 둡시다. 그보다는 책 속의 인물들이 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연구를 솔직하게 자랑하는 건 어떻겠소? ····· (이하생략)"


.. 만화나 라이트 노블 류에서는 가끔 봐 오긴 했습니다만 추리소설에서 이렇게나 당당하게 등장인물이 '우리는 가공의 인물이오' 하고 외치는 걸 보는 게 처음이어서 황당했습니다. 이건 뭐야 싶었다기보단 그럴싸한데?! 의 느낌의 황당함이었습니다만. 한편으로 당황스러우면서 한편으로 신선했습니다.

저 '밀실 강의' 자체는 여러 추리소설에서 나온 밀실들을 한데 모아 잘 정리한 꽤 괜찮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우리는 미스터리소설 속의 인물이다'라는 펠 박사의 말과 더불어 소설 내에 들어가기에는 어째 좀 이질적이다 싶은, 말하자면 '이건 펠 박사의 말이다'라기보다 '이건 존 딕슨 카의 말이다'라는 느낌이 상당히 강한 부분이 있어서 그게 조금 아쉽긴 했습니다만.

재미 자체로 따지자면 황제의 코담뱃갑과 비슷한 수준인데, 확실히 전체적 완성도로서는 황제의 코담뱃갑보다는 떨어지는 느낌입니다. 바로 위 문단에서 말한 문제를 포함해, 조금 덜 다듬어진 느낌이 없지 않아 있달까요. (심각한 수준은 아니고 그냥 조금 뭔가 아쉽다 정도입니다만) 더불어 아무래도 이건 뭔가 번역 수준이 좀 낮다 싶은 부분도 있긴 했습니다만 (침묵), 뭐 그건 넘어가죠.

여하간 저는 이제 챈들러를 마저 읽어 볼 생각입니다. 그 후에는 미야베로 넘어가보고, 다시 그 뒤에 뭔가 찾아볼 생각입니다. 존 딕슨 카의 다른 작품을 찾아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죠. (뭐, 가장 평이 좋은 두 개를 읽어버렸으니 다른 건 이보다는 아무래도 떨어지지 않을까 싶긴 합니다만)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