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에서 글을 본 것도 있고 해서, 평소에 생각하던 걸 이참에 한 번 정리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무술을 배우는 의미를 제 나름대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무술을 배운다고 하면 아무래도 실전성이 언급되기 마련입니다. 뭔가 배우는 건 좋다, 그런데 그거 쓸 수 있어? 취미생활이니 뭐니 해도 사람 잡는 기술 배운다는데 정말로 쓸 수 있는지 궁금해지는 건 당연하죠. 그러니 아무래도 나오는 소리가 '뭐 봤는데 거기선 어느 무술 영 아니더라' 내지는 '아 그거 진짜 죽이더라' 라는 등으로 어떤 무술에 대해 실전성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건데 이게 사실은 쉽게 말하기 정말 어려운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 무술이 생각하는 실전과 룰, 그리고 그에 대한 접근법이 무술마다 다 다르거든요.

1.

 한마디로 실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마다 자기가 겪는 '실제 싸움'이란 게 다 달라요. 혹자에게는 술자리에서 싸움 벌어지는 게 실전이고, 혹자에게는 전쟁터에서 사람 죽이는 게 실전이고, 혹자에게는 발광하는 범인 체포하는 게 실전이고, 혹자에게는 MMA 무대에서 상대방에게 이기는 게 실전입니다. 여기서 어떤 무술이 절대적인 우위를 지닐 수 없는 건, 그때그때 적합한 기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MMA에서 당연하게 여겨지고, 1:1에서는 솔직히 몹시 유효한 그라운드 기술은 떼싸움에선 못 쓰죠. 하나 꺾고 있을 때 누가 와서 찍어버리면 대미지가 너무 크니까. 그래서 그라운드가 쓸모없다는 소리냐면 그건 절대 아닙니다. 유효하거나 아닌 상황이 있다는 소리지.

 무술마다 기술이 다른 건, 무술마다 실전 (대처할 상황)에 대해 다르게 인식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하는데 저기는 저렇게 한다, 그건 무술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고, 그 무술의 기술이 더 유효하게 사용되는 상황이며 장소가 있는 것이지 무조건 이 무술이 저 무술에 비해 압도적인 것이 아닙니다. (커리큘럼이나 대련 시스템 상의 문제는 여기선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MMA 무대에서 승리하는 걸 실전성의 증명으로 여기는 분들이 여전히 많습니다만, 거기서 승리하는 건 그 사람이 거기서 무대와 룰 상에서 가장 적합한 기술과 접근법을 지녔다는 뜻이지, 무술 자체의 우위를 보여주고 그런 게 아니에요. 단지 거기에 적합하게 전문화되고 특화되었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게 MMA 무대에 대한 전문성보다는 거리 격투를 지향하는 중국무술이 그 무대에서 이기기 어려운 이유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실, 무술을 배운다는 건 기술이 아니라, 실전 (그 무술이 생각하는 실전)에 접근하는 컨셉을 배우는 것이죠. 상대가 복수인가 단수인가, 무기를 쓰는가, 급소가격이 허용되는가, 신체 부위 사용이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싸우는 곳은 어디인가? 그 컨셉에 따라, 비슷해 보이는 기술이어도 쓰임새가 달라집니다. 이게 한 무술을 다른 무술과 쉽게 조합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접근 방식 자체가 다른 걸 조합해서 그것들이 잘 이어지게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안이하게 조합했다가 원래 무술보다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서로 다른 컨셉의 무술이 만나 자웅을 겨룬다 (...) 하면, 그 컨셉을 누가 더 효과적으로 사용해 다른 사람의 컨셉을 무력화하느냐ㅡ 좀 쉽게 말하면 누가 더 '자기 방식으로 잘 끌어들이느냐'에 달린 것이고 그건 개인 능력도 능력이지만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MMA 무대를 다시 말하면, 까놓고 말해서 글러브 끼는 시점에서 기술이 벌써 한정됩니다. 글러브와 맨손은 정말 많이 달라요. 맨손으로 먹힐 것이 글러브로 먹히지 않게 됩니다. 물론 글러브 안 끼고 맨손으로 하면 부상이 너무 심각해지니까 스포츠로서 기능할 수가 없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그런 식으로 글러브도 끼고, 너무 심각한 급소도 못 치고 하면 체급 차를 커버할 방도가 없습니다. 이건 제가 제 다니는 도장 파이트클래스에서 체격과 맷집으로 씹고 들어가는 게 가능한 쪽이라서 오히려 더 자신 있게 말하는 겁니다.······ 상대가 맨손이면 그렇게 파고들 수가 없어요. 펀치 몇 대 맞아도 뚫고 들어가는 거, 글러브니 가능한 겁니다. (아 뭐 맨손이라도 안면 타격 안 하면 맷집으로 씹고 들어가기 좀 낫죠) 하지만 역으로, 글러브를 낀 상황이면 그런 전법이 유효하고 또 실제로 잘 쓰입니다. (12. 3. 7 추가- 이 부분은 좀 미묘한 부분이라 리플 보고 추가해둡니다: 주먹이라도 물론, 맞고 당장 뻗어버릴 정도의 대미지가 아닌 한, 계속해서 뚫고 들어갈 수는 있긴 합니다. 사실 영춘권 배울 때도 '상대가 맞더라도 계속 들어오는 상황'을 상정해서 연습하고 있으니 이걸 맨주먹이면 그냥 끝난다고 이해하게 하면 어폐가 있겠죠. 맨주먹일 경우, 이쪽 얼굴 여기저기가 깨질 위험이 크므로 (치아-광대-턱뼈, 기타) 그냥 몇 대 맞아가며 들어가기가 그리 쉽게 사용할만한 전법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펀치 성질이 달라지므로 싸우는 방법이 미묘하게 달라진다는 의미에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무술마다 실전에 대한 지향이 다르다는 의미에서 좀 다른 것도 말해 보면, '실전에선 총이 짱이다'라는 말은 한편으로는 이해됩니다만 솔직히 그렇게 쉽게 말할 소리가 아닙니다. 그야 사람 죽이는 것까지 가는 게 실전의 궁극적 목표라면 틀린 말도 아니겠죠. (한국에서 총 들고 다녀도 되느냐는 건 차치하고) 하지만 실전이라고 해서 사람 죽이는 게 쉽겠습니까? 아무개가 나이프 파이팅을 배웠다고 한들 길거리에서 시비 붙었다고 나이프를 슥 꺼내 들어서 샥샥 베기 쉽나요? 현대를 살아가는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합니다. 눈 찌르는 기술 배웠어도 쉽게 쓸 수 없습니다. 뒷감당이란 걸 아는 사람이라면요. 실전도 실전 나름이고, 사람들의 실전이 꼭 치명적 부상을 입히는 것으로만 귀결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혹 온건하게 해결할 수 없는 막 나가는 싸움이 됐다 해도, 솔직히 사람마다 심리적으로 자기 룰이 있어요: 관절 나가게는 하지 않는다거나, 어디는 때리지만 어디는 안 때린다거나, 대처하게 되는 상황마다 또 달라집니다. 그걸 일괄적으로 '실전에선 총이 짱여!', 이건 실전을 하나로만 한정하는 소리라고 봅니다.

2.

 현대사회에서 무술은 거지반 취미인 건 맞습니다. 한국사회가 개인의 무력에 따라 삶에 문제가 생기는 핵전쟁 이후의 사회 (아 제가 최근에 북두의 권 다시 본 데다 폴아웃3도 좀 해서 ←)도 아니고, 일부러 위험을 방관하지 않고서는 무술을 쓸 일은 거의 없다 봐도 됩니다. 저처럼 술을 안 먹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술자리에서 시비 털릴 일도 없어요······ 앞으로도 아마 쓸 일이 거의 없을 겁니다. 정말 뜻밖의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는 말이죠. 그러나 그 뜻밖의 상황에서도 의연하게 잘 대처하고 싶어서, 어쨌거나 두 번 다시 폭력에 굴하는 일은 없고 싶어서 저는 무술을 배우는 겁니다만서도. (물론 솔직히 제1순위는 이게 재미있고 또 몸도 좋아지는 게 느껴지니까. ㅡ어디 나가서 당장 싸우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사람들은 그래서 무술을 배울 겁니다)

 그래서 무술이란 게 좀 애매하긴 합니다. 실제로 쓸 수 있는 기술이고 써야만 할 상황이면 쓸 수 있도록 수련해야 옳지만, 현대사회는 개인의 무력을 기본적으로는 허용하지 않죠. 그러다 보니 현대사회에서 무술은 그냥 취미일 뿐이잖은가, 우리는 양생을 추구한다 ······라는 쪽도 있는데, 뭐 그것도 일종의 답이긴 합니다. 저 같은 사람은 양생만을 원한다면 무술을 배울 필요는 없다는 주의니까 동감하지는 않지만, 그런 접근도 하나의 방식이라는 건 인정해요. (영춘권도 파마다 그런 비중이 달라서, 사람마다 자기 취향 따라가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요컨대, 위에서 무술에 대해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것'이라고 말했듯 양생이니 실전이니 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사람마다 모두 생각은 다릅니다. 그걸 나만이 옳다고 하거나 저건 틀렸다 잘못됐다 이러니 문제가 생기죠. 저 사람 생각하는 게 나랑 달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고, 저 무술이 내가 좋아하는 무술과 기술 형태나 접근법이 달라도 그건 또 그 나름대로의 권리가 있는 겁니다.

3.

 다만, 무기를 배우는 무술의 실전은 확실히 맨손 무술의 그것과는 좀 적용이 달라지긴 합니다. 쿠크리로 도적떼를 썰고 영웅이 된 비슈누 쉬레스타와 40인의 도적 같은 상황이 아니고서는 검이나 창 같은 무기 배웠다고 그걸로 싸울 일이 뭐 많겠습니까. 검도 배운 사람이 검 대신 막대기를 들고 싸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검'으로 썰고 다니지는 않죠. (라지만 시비상황에서 실제로 진검을 휘두른 사람도 있어서 에러긴 한데 -_-;) 이 경우 배운 걸 실제로 활용하는 게 좀 복잡해지지만, 사실 제가 배우는 영춘권도 배우는 기술 전부를 그대로 실제 상황에서 쓰기 쉽진 않습니다. 아니, 수련과 실전은 다르기 때문에 못 쓰는 거라기보단 (물론 그것도 없지야 않겠습니다만) 눈을 찌르거나 뒷골을 팔꿈치로 내리찍거나 하는 걸 제대로 조절 안 하고 썼다가 끔찍한 결과가 나오면 어떡하느냐 이거죠. 하지만 또 그런 게 필요한 극단적인 상황이 전혀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고, 요는 '그때그때 달라요'에 '원래 무술은 사람 파괴하는 기술입니다, 나머지는 쓰는 사람에게 달렸어요' ······라는 거죠. 어쨌든 진검이나 진짜 창 같은 걸 현대사회에서 취미 이상으로 써먹는 건 참 어려운 이야깁니다만. 그게 취미 이상으로 필요한 상황일 정도면 실로 아포칼립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서도.

 뭐, 우리 파 영춘권 (Wing Tsun)에서 표지, 목인장, 육점반곤, 팔참도는 소념두, 심교보다 상당히 뒤에 배웁니다. 실제로 써먹을 수 있느냐를 상당히 중시하는 우리 파 특성상, 사실상 쓸 일이 거의 없고 교양에 가까운 육점반곤이나 팔참도는 극후반부에 익히고, 목인장도 (사부님 말씀을 따르면 같은 영춘권사끼리 싸울 때 쓰는 기술이라는데) 배워서 쓸 일이 많지 않으니 소념두와 심교로 실력을 배양하고 쓸 수 있게 하는 것이죠 (표지도 좀 나중에 배웁니다. 그건 긴급상황에서 쓰는 고급권법이고, 본래 소념두와 심교만으로 싸우는 게 기본이라더군요). 만약 교양과 취미로서의 영춘권을 더 중시한다면 굳이 이렇게 할 필요는 없을 테고, 실제로 다른 파 영춘권은 그렇게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우리 파 쪽 방식을 좋아하고, 그러니까 계속 배우러 다니는 것이지만요.

4.

 사람은 모두 다릅니다. 같은 무술을 배운 사람들조차 그 사람의 성향에 따라 전법이며 컨셉이 또 바뀌고, 그래서 어느 파 아래로 내려가면 또 어느 파 어느 파로 갈리죠. 생각하는 실전과 그 실전에 대한 대응은 무술마다 모두 다른 것입니다. 그 무술이 단순히 (혹은 사실상) 취미라고 해도 그 취미를 어느 만큼이나 진지하게 하느냐도 또 사람마다 다르죠.

  그건 틀린 것도, 무엇이 무엇보다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닌, 그냥 다른 겁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