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자단의 엽문 시리즈에 대해서는 사실 개인적으로 여러 감정이 교차합니다. 이 시리즈, 특히 <엽문 1>은 이소룡과 절권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춘권에 관심이 있던 제게 '영춘권이 멋있다!'고 느끼게 해준 중요한 작품이었습니다. 그 이후 저는 실제로 영춘권을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즐겁게 계속하고 있죠. 이런저런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다 이야기하려면 너무 길어지니 그냥 잡담처럼 두서 없는 감상이나 적어 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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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자단의 영춘권이 현재의 영춘권 인기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저 자신 역시 <엽문 1>에서의 연환충권에 반한 적이 있지요. 다만 엽문 시리즈에 대해서라면 솔직히 1과 2 이후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무술감독이 홍금보에서 원화평으로 바뀐 3의 영춘권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원화평의 액션은 무술들이 보다 아름다운 합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는 있지만 심플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 영춘권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1과 2에서는 그래도 영춘권을 이해하고 흐름을 짰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있는데, 3부터는 단지 영춘권의 겉으로 보이는 동작만을 가져와 찍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렇다지만, 4는 그래도 좀 괜찮았습니다. '영춘권이 나오는 무술 영화'라고 할 때, 사람들이 '영화에 나오는 영춘권에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부분을 고민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견자단이 (이 영화를 끝으로 무술 배우를 은퇴할 만큼)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화려한 움직임이 어려워서였을 수도 있겠죠. 어느 쪽이건, 전 4가 3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3보다 못한 4였으면 차라리 나오지 않았으면 좋았으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개인적인 선호도는 대충 이렇습니다. 1>>>>>2>>>>>>>>>>>>>>>>4>>>>>>>>3>>(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엽문 외전 장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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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는 뭐.. 엽문이 미국에 간 게 거짓이라는 지적이 있습니다만, 애초에 1에서부터 엽문이 군대와 충돌한 적도, 장군을 때려눕힌 적도 없었는걸요. 엽문 시리즈는 엽문이 실존인물이고 영춘권의 고수이다, 라는 기본 설정 말고는 인물들 간의 인간관계가 모조리 재창작이라고 보시면 무방합니다. 거의 대체역사물이죠.

그러니까 전 이 시리즈에서는 얼마나 관객으로서 마지막 결투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지에만 신경씁니다. 그 점에서 이민자로서의 고통을 보여준 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적으로 그림이 나올 법한 상대 무술로 극진 가라데가 가장 보기 좋다고는 해도, 일본무술을 배운 인종차별주의자 백인 해병 가라데가가 중국무술과 중국인을 극혐해서 싸우게 된다는 전개는 솔직히 좀 무리수가 있지 않은가 싶었습니다. 그렇게 유색인종과 유색인종의 무술이 싫으면 일단 가라데부터 극혐해야 하지 않나요. 2차 대전 중의 태평양 전쟁을 생각하면 일본인을 훨씬 멸시해야 말이 된다 싶은데요. 물론 류쿠 왕국의 무술이었던 가라데를 엄밀한 의미에서 '일본인의 무술'이라고 해도 좋으냐 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요.

상대 악역에 대한 적합한 분노 게이지를 모았다가 속시원하게 터뜨린다는 맛은 역시 1이 최고였고, 2가 그 다음으로 무난했고, 3은 최악이었고, 이번의 4는 2와 3의 사이 정도가 아닌가 싶습니다. 말하고 보니 각 영화에 대한 제 선호도와도 일치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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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국곤의 절권도도 나름 괜찮았어요. 이 사람 열심히 연습했군, 이라는 생각이랄까요. 물론 이소룡을 생각하고 진국곤을 보면 미흡해 보이는 게 많이 보이지만, 그런 거 엄격히 따지기에는 애초에 견자단의 영춘권도 완벽해서 보는 거 아니라서요. (....)

극중 나름 활약한 무술인 형의권이나 태극권도 꽤 멋지게 나왔다고 생각하는데, 전 영춘권사지 형의권사나 태극권사가 아니라서 그 무술들의 실제 수련자에게 영화 속의 무술이 어떻게 보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불만족스럽다거나 허황되어 보이는 점이 아마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안심하세요, 위에서도 말했지만 영춘권사에게는 견자단의 영춘권도 솔직히 영춘권 원리에 맞지 않는 부분이 한둘이 아닙니다. (.....) 어쨌거나 영화상으로 멋지게 표현되었으면 만족하는 거죠, 뭐. 형의권이나 태극권이 아무리 멋지게 나왔어도 결국 패배하지 않았느냐고 아쉬울 수는 있지만, 그러면 뭐 엽문이 나올 구석이 없으니까.. 어쨌든 상대 피지컬이 워낙 좋게 나와서, 패배했더라도 그 무술이 약하다는 생각은 안 듭니다.

..라고 말하기엔 그냥 승패만 보고 무술이 약하니 어쩌니 떠드는 사람들도 꽤 많으니 역시 아쉬울 수도 있긴 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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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보스로 나온 콜린 말인데, 잠깐 <엽문 4>의 다른 감상을 보다가 콜린 역을 맡은 배우인 크리스 콜린스가 실제로 영춘권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엽문 4>와 관련된 인터뷰와 이 사람이 영춘권을 하는 영상이 소개되어 있더군요. 영문 인터뷰 (https://kungfukingdom.com/ip-man-4-the-finale-interview-with-chris-collins/)에 따르면 이 사람은 젊을 때 70대의 영춘권사를 만나 영춘권을 접했는데, 그게 인상적이어서 영춘권을 배우기로 결정, "결국 홍콩에 도착해서 모든 영춘권 도장을 검색했는데 가장 좋은 학교를 찾았으며 지난 22년 동안 그 곳에 있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 '음 그럼 제대로 영춘권 배운 건가?' 하고 영상을 봤는데..


...움직임이 이거 진짜로 영춘권을 잘하는 사람이더라고요. 견자단보다 이 사람이 훨씬 영춘권 잘하는데? 싶었어요. 게다가 보고 있으려니 어딘가 우리 파 영춘권 비슷해 보이는 동작도 보여서, 좀 더 알아봤더니...

우리 파 영춘권.. 그것도 홍콩 본부에서 22년을 배운 사람이더랍니다. 지금은 독립해서 자기 액션 스쿨 (영화 쪽으로 나가는 게 이분의 지향이었던 모양입니다)을 갖고 있긴 하지만, 독립하고 나서도 여전히 움직임이 우리 파 영춘권의 움직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잘해요. 진짜로 영춘권 잘하시는 분입니다. 이런 기술을 갖고 그런 식으로 얻어맞다니 (....).

영상들을 좀 찾아봤다가 좀 더 지나서 깨달았는데, 양정 시조의 책에도 이 사람이 나왔고, 예전에 본 영춘권 다큐에도 등장해서 영춘권의 다른 활용법을 보여주었던 분이었더군요. 인상이 달라져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 다큐죠. 중국무술 덕후라면 이 다큐를 아시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분을 알게 된 건 <엽문 4>가 제게 준 뜻밖의 소득인데, 앞으로 크리스 콜린스의 이름을 기억해두려고 합니다. 순수하게 영춘권만 배운 분은 아니라서 다른 무술도 할 줄 아시는데다, 다른 영화에 나온다고 해도 솔직히 영춘권 영화 유행은 다 지났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이분이 영화에서 영춘권을 하는 걸 보기는 힘들 거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주목해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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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콜린스 소개로 끝나버리면 좀 이상하니까 <엽문 4> 최종평으로 마무리합니다. 시리즈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잘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3이 실망스러워서 4를 또 낸다는 소식에 '차라리 안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3보다 나은 4라서 다행입니다. 오히려 4가 나와서 깔끔하게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엽문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은 충분히 볼 가치가 있다고 봐요. 1이나 2보다 낫지는 않다고 생각하니 그 점은 감안하시고요.

여담- 깔끔한 마무리에 더해서, 개인적으로는 요나 역의 Vanda Margraf와 콜린 역의 Chris Collins라는 좋은 배우를 발견해서 즐거웠습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