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오리지널/신변잡기 2008. 3. 11. 18:51
어머니가위를갈아드렸습니다.

올바른 띄어쓰기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는 한 문장으로 오늘의 포스팅을 개시합니다. (히죽) 물론 저 문장을 올바로 읽는 방법은 '어머니 가위를 갈아 드렸습니다'입니다.

어머니에게는 이십오 년 이상 된 가위가 있습니다. 잠자리표 가위라고, 당시에 꽤 고급인 가위였던 모양입니다. 이 가위는 썩 잘 드는데, 얼마나 잘 들었는가 하면 제가 초등학교 시절에는 이걸로 머리도 깎았습니다. 주 용도는 어느 쪽이냐 하면 재단용인데, 종이를 자르거나 천을 자르는 일에 주로 사용하십니다. (어머니는 옷을 만들 줄 아시기 때문에, 본인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으십니다)

이십 오 년이니 이 가위는 썩 오래 되었죠. 그 동안 이 가위를 간 건 두 번 정도라고 하덥니다. 오늘 또 문득 보니 가위가 날이 죽어서 그다지 잘 들지 않는 모양이더군요. 2년 전에 가는 데에 맡겼는데 만 원 들었다고 하는데, 사실 만 원이 적은 돈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것 참, 다행이게도 요 일이 년 사이 저는 집안에 있는 식칼 등을 갈면서 날 살리는 스킬을 대충 익혔습니다. 어떤 느낌이냐면 연필심 살리는 것과 비슷해요.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보다는 못하겠지만 그럭저럭 집안일에 도움이 될 정도는 하죠.


네, 갈았습니다. 이런 가위죠.


가는 것 자체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만, 날이 짧아지다 보니 이게 끄트머리 아귀가 서로 안 닿더군요. 워낙 오래 써 오던 가위다 보니 이도 한 번 빠졌고, 그래서 예전에 갈 때 날이 상당히 깎였던 듯했습니다. 원래는 저것보다 일 센티미터 정도는 더 길었어야 한 것 같더군요. 어쨌거나 날을 살린 것까지는 좋은데, 가위란 물건은 끝까지 깨끗하게 잘리지 않으면 기분이 나쁘지 않습니까. (사실 애당초 어머님의 부탁이, 끝 날을 잘 살려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종이나 천을 자르는 가위인데. 나름의 장인정신이, 끝이 맞물리지 않는 채로는 놔두게 두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손을 봤습니다. 가위 손잡이에 달린, (뭐라고 하는지 정식 명칭을 잘 모르겠는데) 저 위쪽 손잡이 밑에 ㅣ형태로 달려서 손잡이가 딱 붙지 않게 만드는 물건을 갈아서, 끄트머리가 더 붙도록 만들어 봤죠. 그러고 나니 이제 아귀는 맞는데 가위란 게 또 그것만으로 잘리지는 않죠. 가위날이란 게 (위에서 보았을 때) II 형태로 붙은 게 아니라 실은 () 이런 형태가 되어서 끄트머리가 잘카닥 하고 맞물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벤치를 집어들고 가위날 휘게 만들기. 어머니는 제가 쵸큼 (많이는 아니고 쵸금) 못미더운지 가위 망가뜨리는 것 아니냐며 우려를 표명하셨으나 성공. (실은 처음에 휘게 만들었을 때는 잘랐을 때 조금 휘게 잘라져서 다시 한 번 조정했다는 건 비밀)

어쨌거나 그리하여, 날이 조금 안 들었던 가위는 다시 슥슥 잘 드는 가위가 되었습니다. 사과도 깎을 수 있을 만큼 날을 살려놨거든요. (히죽) 어쨌거나 쓸 수 있을 때까지는 쓸 수 있도록 계속 갈아 드릴 겁니다. 어머니와 대화 중에 "이제 이렇게 계속 하다보면 이 사이즈에 날만 쪽가위" 된다고 농담스레 말하긴 했습니다만, 어머님 말마따나 "그렇게 되면 그게 수명" 인 셈이겠지요.

뭐랄까, 요즘은 뭔가 물건을 오래 쓴다는 게 좋더군요. 그만큼 애착이 생기고, 추억이 생기고, 조금 불편하다고 금방금방 물건을 바꾸는 것으로는 결코 느끼지 못할 감각이죠. 기스 하나에 추억 하나, 네, 뭐 그런 겁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