둠즈데이 북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좀 더 유쾌한 소설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갈 수 있는 글은 아니더군요. 읽히기야 쉽게 읽힙니다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무겁습니다. 일단 간략하게 설명해 볼까요, <둠즈데이 북>은 SF이고, 일종의 차원이동물입니다. 이 책을 읽은 제 지인치고 나쁘게 평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책값이 생각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구입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값이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시점은 두 가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2054년의 영국에서 14세기로 시간 여행을 해 들어간 다음부터 그 과거에 들어간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점이 교차하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에다 주인공 키브린이 녹음하는 기록인 '둠즈데이 북'으로서의 시점이 하나 더해지기 때문에 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의 전개도 중요합니다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키브린의 시점, 또한 그녀가 말하는 시점 -둠즈데이 북-에 담겨 있고, 2054년의 영국에서의 시점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보여집니다. 이 셋이 필요에 따라 서로 교차해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적절한 시점에서 이야기가 바뀌는데다 전개하는 방식 역시 능숙하므로 8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 말해 보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시간 여행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시간 여행에 대해 퍽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을 위해 과거와 동조화 작업을 한 네트를 열고 강하해 들어가는데, 과거와 현대의 인과 관계를 바꿀 만한 물건은 네트에 통과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방사능, 독, 병원균 등입니다.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들어가면 시공간 모순이 일어나기 때문에 네트가 열리지 않지요. 비슷한 원리에서 시간 여행을 할 때 시간 편차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과거와 미래의 인과 관계를 바꿀 만한 만남이 생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계산한 시간과 다른 시간에 시간 여행자가 도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의 인간이 과거로 강하하는 상황을 과거의 인간이 보게 되어서 무언가 역사에 변형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원하는 시공간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시간 여행자는 어떻든간에 과거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철저한 관찰자로만이 활동 가능합니다. 단, 그렇다고 해서 과거라는 이름의 필름을 돌리고 그것을 보고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시간 여행자는 분명히 과거로 들어간 것이며, 과거의 인간들과 대화할 수 있고 작은 의미로서는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이 점은 애매해지는데, 어차피 시간 여행이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 (언젠가는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뭐, 전 안 믿습니다) 이런 설정이 되어 있다고만 알아 두시면 될 듯합니다. 요는, 시간 여행자는 과거에 일어나기로 된 일은 어쨌든 바꿀 수 없다는 겁니다. 어째 이렇게 말하니 영화 <데스티네이션 (Final Destination)>이 생각나는군요.
이제 위에서 말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 한 가지 테마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시간 여행자가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그대로 놓아둘 수 없어서 바꾸고 싶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주인공인 키브린에게 일어납니다. 그녀는 닥쳐오는 위험에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모종의 문제가 생겨서, 그 세계에서 과연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해집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과거에 일어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텐데도, 바꾸고자 하죠. 생각해 볼 만한 소재입니다.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거기에 대항하느냐 순응하느냐.
그리고 그녀가 떨어진 중세에서, 중요한 중심 인물 중의 한 명이 로슈 신부입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키브린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신을 믿으며 어떠한 운명에 떨어져도 운명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돌아갈 진짜 세계가 있으므로, 마치 시간 여행을 온 키브린이 나그네와 같이 중세를 바라보듯 그가 사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현실을 방관하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돕습니다. 사실 이 남자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 소설이 신에 대해 꽤나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단언했을 터입니다만 (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어지간히 찌질하게 구는 인간들이 나오다 보니), 이 남자가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이 정말이지 멋있기 때문에 (성자라는 호칭은 이런 사람에게 붙여야 합니다) 그 부분은 좀 애매해져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는 신론은 기독신학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며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비유가 꽤 들어 있습니다만 (ex: 현대의 던워디 교수가 과거로 들어가 있는 키브린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네트에 문제가 생겨 구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이유에 동일시하는 장면. 그건 아니거든요. 구하지 못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서 그 죽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소설 속의 캐릭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운명에 대항하느냐 순응하느냐- 에 대한 질문은, 어쩌면 로슈 신부에게 이미 답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대항한다고도 순응한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살아가면서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일지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읽어낸 대답이며 제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의 답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또 다른 답을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이 점이 이 책의 멋진 점입니다. 캐릭터들이 기뻐하고 분노하며 슬퍼하거나 즐거워하면서, 분명 작가가 의도한 어떤 일들을 향해 이야기가 흘러갑니다만 '작가는 이런 주장을 독자에게 전하려 든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키브린에게 감정이나 시점을 이입하기가 가장 쉬울 터입니다만, 제 경우는 로슈 신부 쪽을 놓칠 수 없더군요. 독자는 어떠한 입장으로도 글을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고 감상을 마치죠.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떠올리게 되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 상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입니다. 중세는 암흑기였고, 그들은 무지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미신적인 행위에 의존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중세에 들어가 그들과 생활하는 키브린은 그들이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체감합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이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태껏 인간들이 시행착오를 겪어 오며 얻어낸 결과를 배워 사용하고 그것을 마치 우리가 잘나서 얻은 것인마냥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당장 속칭 원시시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보다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불을 피우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산 (혹은 수렵)해야 한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어딘가 아파도 나는 그것이 왜 아픈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해야 낫는지 모를 겁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유산이며, 그 유산을 이어받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만 나오는 것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과거 사람들이 무지했고 어리석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같은 말을 조금 다르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종종 '그 녀석은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으며 어떤 고통을 안고 있는지 정말 안다면 우리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결코 그리 쉽게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둠즈데이 북>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소설입니다. 한 번 쯤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군요.
코니 윌리스 지음, 최용준 옮김/열린책들
좀 더 유쾌한 소설일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다지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 갈 수 있는 글은 아니더군요. 읽히기야 쉽게 읽힙니다만 담고 있는 내용은 무겁습니다. 일단 간략하게 설명해 볼까요, <둠즈데이 북>은 SF이고, 일종의 차원이동물입니다. 이 책을 읽은 제 지인치고 나쁘게 평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책값이 생각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으로 구입했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책값이 아깝지 않은 소설입니다.
시점은 두 가지,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2054년의 영국에서 14세기로 시간 여행을 해 들어간 다음부터 그 과거에 들어간 주인공과 그 주인공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점이 교차하기 때문인데, 이 두 가지에다 주인공 키브린이 녹음하는 기록인 '둠즈데이 북'으로서의 시점이 하나 더해지기 때문에 셋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쪽에서의 전개도 중요합니다만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들은 키브린의 시점, 또한 그녀가 말하는 시점 -둠즈데이 북-에 담겨 있고, 2054년의 영국에서의 시점은 이야기의 전개를 위해 필요한 요소라고 보여집니다. 이 셋이 필요에 따라 서로 교차해 가며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적절한 시점에서 이야기가 바뀌는데다 전개하는 방식 역시 능숙하므로 800페이지를 넘는 두꺼운 책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담고 있는 내용들에 대해 말해 보죠.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역시 시간 여행입니다. 이 소설에서는 시간 여행에 대해 퍽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고 있습니다. 시간 여행을 위해 과거와 동조화 작업을 한 네트를 열고 강하해 들어가는데, 과거와 현대의 인과 관계를 바꿀 만한 물건은 네트에 통과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방사능, 독, 병원균 등입니다. 그 시대에 있을 수 없는 것이 들어가면 시공간 모순이 일어나기 때문에 네트가 열리지 않지요. 비슷한 원리에서 시간 여행을 할 때 시간 편차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과거와 미래의 인과 관계를 바꿀 만한 만남이 생기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계산한 시간과 다른 시간에 시간 여행자가 도착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현대의 인간이 과거로 강하하는 상황을 과거의 인간이 보게 되어서 무언가 역사에 변형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원하는 시공간에 정확하게 도착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시간 여행자는 어떻든간에 과거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운명은 정해져 있으며, 철저한 관찰자로만이 활동 가능합니다. 단, 그렇다고 해서 과거라는 이름의 필름을 돌리고 그것을 보고 있기만 한 것도 아닙니다. 시간 여행자는 분명히 과거로 들어간 것이며, 과거의 인간들과 대화할 수 있고 작은 의미로서는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사실 엄격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이 점은 애매해지는데, 어차피 시간 여행이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니 (언젠가는 가능하리라고 믿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뭐, 전 안 믿습니다) 이런 설정이 되어 있다고만 알아 두시면 될 듯합니다. 요는, 시간 여행자는 과거에 일어나기로 된 일은 어쨌든 바꿀 수 없다는 겁니다. 어째 이렇게 말하니 영화 <데스티네이션 (Final Destination)>이 생각나는군요.
이제 위에서 말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 한 가지 테마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한 명의 시간 여행자가 운명을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도저히 그대로 놓아둘 수 없어서 바꾸고 싶다. 바로 이와 같은 일이 주인공인 키브린에게 일어납니다. 그녀는 닥쳐오는 위험에 맞서 싸웁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녀에게는 모종의 문제가 생겨서, 그 세계에서 과연 원래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는지조차 불확실해집니다. 그녀는 도움을 청할 수도 없으며 오로지 그녀가 할 수 있는 만큼의 일만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로서는 과거에 일어난 운명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었을 텐데도, 바꾸고자 하죠. 생각해 볼 만한 소재입니다. 운명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거기에 대항하느냐 순응하느냐.
그리고 그녀가 떨어진 중세에서, 중요한 중심 인물 중의 한 명이 로슈 신부입니다. 신이 없다고 생각하는 키브린과 달리 그는 철저하게 신을 믿으며 어떠한 운명에 떨어져도 운명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돌아갈 진짜 세계가 있으므로, 마치 시간 여행을 온 키브린이 나그네와 같이 중세를 바라보듯 그가 사는 현실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현실을 방관하지 않고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해 사람들을 사랑하고 돕습니다. 사실 이 남자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 소설이 신에 대해 꽤나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다고 단언했을 터입니다만 (신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어지간히 찌질하게 구는 인간들이 나오다 보니), 이 남자가 보여 주는 삶의 모습이 정말이지 멋있기 때문에 (성자라는 호칭은 이런 사람에게 붙여야 합니다) 그 부분은 좀 애매해져 있습니다. 물론 이 소설에서 말하는 신론은 기독신학적인 것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며 교리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비유가 꽤 들어 있습니다만 (ex: 현대의 던워디 교수가 과거로 들어가 있는 키브린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그렇게 네트에 문제가 생겨 구하지 못하는 것을 하느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한 이유에 동일시하는 장면. 그건 아니거든요. 구하지 못해서 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해결하기 위한 단 한 번의 완전한 제사로서 그 죽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은 소설 속의 캐릭터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해석하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에 크게 문제삼지 않고 넘어갈 수 있습니다. 어쨌든, 운명에 대항하느냐 순응하느냐- 에 대한 질문은, 어쩌면 로슈 신부에게 이미 답이 있는 지도 모릅니다. 대항한다고도 순응한다고도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살아가면서 온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일지 모릅니다.
물론, 이것은 제가 읽어낸 대답이며 제가 바라보는 세계관에서의 답입니다. 아마 다른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또 다른 답을 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은 이 점이 이 책의 멋진 점입니다. 캐릭터들이 기뻐하고 분노하며 슬퍼하거나 즐거워하면서, 분명 작가가 의도한 어떤 일들을 향해 이야기가 흘러갑니다만 '작가는 이런 주장을 독자에게 전하려 든다'는 느낌이 강하지 않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키브린에게 감정이나 시점을 이입하기가 가장 쉬울 터입니다만, 제 경우는 로슈 신부 쪽을 놓칠 수 없더군요. 독자는 어떠한 입장으로도 글을 읽어 나갈 수 있습니다. 판단은 독자에게 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하고 감상을 마치죠. 역지사지라는 말이 있는데 이 소설을 읽다 보면 떠올리게 되는 단어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상대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 상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입니다. 중세는 암흑기였고, 그들은 무지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미신적인 행위에 의존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실제로 중세에 들어가 그들과 생활하는 키브린은 그들이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를 체감합니다. 그들에게는 지식이 없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태껏 인간들이 시행착오를 겪어 오며 얻어낸 결과를 배워 사용하고 그것을 마치 우리가 잘나서 얻은 것인마냥 말할 수 있지만, 우리가 당장 속칭 원시시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들보다 훌륭하게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불을 피우는 것조차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당장 먹을 것을 구하는 것도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산 (혹은 수렵)해야 한다면 쉽지 않을 겁니다. 어딘가 아파도 나는 그것이 왜 아픈지 알 수 없으며 어떻게 해야 낫는지 모를 겁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유산이며, 그 유산을 이어받은 다른 사람들과 협력해야만 나오는 것들입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과거 사람들이 무지했고 어리석었다고 쉽게 말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같은 말을 조금 다르게 적용해 봅시다. 우리는 종종 '그 녀석은 왜 그렇게 사는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아 왔는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으며 어떤 고통을 안고 있는지 정말 안다면 우리는 그 누구에 대해서도 결코 그리 쉽게는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둠즈데이 북>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소설입니다. 한 번 쯤 읽어 볼 가치가 있는 소설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