왓치맨 Watchmen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이 <왓치맨>은 그래픽노블이라고 분류되어 있습니다만, 쉽게 말해 그냥 만화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만화라고 하면 없어 보이니까 그래픽노블이라고 있어 보이게 명칭을 또 붙인 것에 지나지 않아요. 어쨌거나 만화라고 하면 싸구려처럼 선입관을 가지는 건 물 건너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입니다. 하지만 본 감상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처럼이니 소설과 만화의 차이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고 넘어가봅시다.

 소설과 만화의 차이? 소설에서 상황과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만화에서는 그것을 그림으로 연출합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소설에서 글로 쓸 것을 만화에서는 그림으로 그려내어 표현한다는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간혹 이 부분을 오해하여, 만화가 소설보다 더 저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심지어 만화책이 책에 포함될 수 있느냐 하는 논의를 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그림을 그려서 그 그림을 보는 사람에게 어떤 상황을 전달하고 그 그림들의 연속으로 상황을 전개시켜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만화가 소설보다 저급하다고 생각되는 큰 이유는 만화에서 제공하는 논의와 인간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보다 얕기 쉽기 때문이겠습니다만, 그것은 만화와 소설의 차이라기보다는 많은 만화가들이 그림을 잘 그리는 데만 치중해서 막상 작품 전체로 전달하려는 메시지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기 때문이라 보는 쪽이 옳겠습니다. 실제로 많은 만화가들이 공부를 소홀히 하곤 하죠. 그러나 그것은 비단 만화뿐 아니라 소설에서도 얼마든지 일어나는 문제로, (특히 장르문학계에서는) '나는 글만 잘 쓰면 돼'라고 생각하며 공부를 우습게 여기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서는 글을 잘 쓸 수는 없지요. 살아가며 얻는 모든 경험들이 작가에게 양분이 되어준다는 사실을 잘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러다보니, '뭐 이렇게 생각 없이 썼어?' 싶은 물건이 소설계 쪽에도 얼마든지 나와 있습니다. 이런 '얕음'이 만화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이죠. 말을 돌려서, 어떠한 장르이건간에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작품과 동시에, 인간에 대해 심도 있게 되새겨볼만한 작품도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가볍게 쓰는 (혹은 그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진지하게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죠. 장르의 발전에는 그러한 심도와 다양성이 필요합니다.

 자, 그래서, <왓치맨> 감상 전에 웬 서론이 이렇게 기냐······. 굉장히 거창하게 말하는데, <왓치맨>이 그러면 인간에 대해 심도 있게 탐구하는 깊이 있는 만화란 말이냐? 하고 물으실 것 같아서 답변을 해보죠.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해서 또 너무 기대하진 마세요." 참 제가 생각하기에도 애매한 답변이로군요. 분명 나름의 깊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치게 기대하다가는 또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히어로물이라는 데에 기인합니다. 이를테면 <다크 나이트> 를 생각해봅시다. 그건 할리우드 히어로 영화로서는 매우 깊이 있는 영화였습니다. 히어로물 내에서 히어로가 가질 수 있는 고뇌에 대하여 잘 성찰한, 무척 깊이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죠. 하지만 히어로물로서 깊이 있다는 말을 오해하여, '영화'라는 장르 내에서 인간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성찰의 최대한도가 있겠거니 하고 기대하고 그 영화를 봤다가는 아마 실망할 겁니다. '뭐야, 대단하다더니 겨우 이거야?' 요는 시각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왓치맨>의 경우, 기본적으로 히어로물 내에서 그 장르의 깊이를 최대한 이끌어내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깊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 작품의 경우에는 히어로물의 도식 내에서 접근해 들어갈 필요가 있죠. 깊이가 있긴 한데 히어로물 좋아하시는 분만 제대로 감명을 받으시리라는 뜻입니다. 다른 분들은······ 흠, 글쎄요, 히어로물을 우선 좋아해 보시는 게 어떨까요?

 <왓치맨>을 그래픽 노블이라고 표현할 수 있게 해 주는 요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 (이건 <왓치맨>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서양 만화에 해당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그림이 '문장 대신에 상황을 보여주는' 도구라는 전제를 가진 듯이 보입니다. 대사와 지문이 많으며, 그림 하나하나가 일본 만화 (물론 일본 만화라고 한 마디로 말해도 굉장히 종류가 많습니다만, 통칭 일본 만화 하면 생각나는 느낌)처 럼 역동적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역동적이지 않다고 해서 구도나 연출이 역동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고, 인물의 동작이 일본 만화의 그것처럼 역동적이기보다는 사진을 찍어서 그 한순간에다 지문과 대사를 그려넣은 듯이 보인다는 뜻입니다. ② 더불어 한 에피소드가 끝나고 나면 회고록이나 기록물처럼 메타픽션이 삽입됩니다. 이것은 그림을 말 그대로 삽화 (작품 세계 내에서는 '사진'으로 보이겠습니다만)처럼 집어넣은 글로서, 이 부분에 한정해서는 만화라고 일컫기 어렵게 됩니다.

 위에서는 히어로물 내에서 깊이 있는 만화라고 말하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만화에 비해서도 꽤 머리를 쓰며 읽 어야 하는 만화에 속하긴 합니다. 밀도가 높거든요. 제 동생 같은 경우는 1권을 읽어보겠다며 가져가더니 다 읽고 나서는 머리 아프다며 그냥 다 넘기고 2권 끝부분만 읽어버리더군요. 그래도 끝은 궁금해서. ······라는 건 그렇다치고, 어쨌든 히어로물이긴 합니다만 여기에 나오는 히어로들은 닥터 맨햍-은 (본토발음) 빼고는 다 인간적인 히어로들입니다. 능력적으로 보통의 일반인보다 그리 뛰어날 것이 없죠. 비관적으로 말하자면, 나이가 들어서도 영웅 놀이를 버리지 못하고 히어로 복장을 갖춘 철없는 어른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상징물에 불과하죠. 그런 만큼 국가에 본격적으로 귀속됩니다. 국가 무력으로 활용되고, 그 활용도가 사라지자 법으로 히어로 활동을 금지당합니다. <왓치맨>은 그런 일이 일어난 다음부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기본적인 전제만 보아도, 이야기가 절대로 밝을 수 없다는 점은 잘 이해되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이 어두움은, 전제가 암울한 것뿐 아니라 캐릭터들 자신에 힘이 없다는 것에도 이유가 있습니다. 위에서 설명했습니다만 실제로 그들은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조금 더 강하긴 합니다만, 지극히 인간적인 강함이죠. 그들은 마치 민간인처럼 보입니다. 다른 히어로물에서 그들 (즉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등등)이 가지는 강철 같은 의지가 없습니다. 그들은 더 큰 힘에 휘둘리고, 그 무엇도 제대로 바꾸지 못합니다. 물론 다른 많은 히어로들도 기껏해야 그들 주변의 몇 가지 상황을 바꾸고 말기는 합니다만 <왓치맨>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합니다. <왓치맨>의 히어로들 중 가장 강철 같은 의지를 지닌 로어셰크의 경우, 그가 이 세계에 일어나는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는 누구보다 강하기에 이 작품 속에서 빛나지만, 그가 가진 힘이 고작 민간인 수준이라는 데에서 비극이 일어납니다. 반면, 이 작품 속에서 정말 히어로다운 힘을 가진ㅡ 세계를 바꿀 수도 있는 힘을 가진 닥터 맨해튼은, 불행히도 이 작품 속에서 가장 인격이 인간적이지 못합니다, 결과, 사람들이 히어로에게 기대하는 인간적인 가치기준은 그에게 아무 의미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사실 그는 히어로라기보다는 병기에 가까운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끝은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로어셰크. 로르샤흐 가면을 쓰고 있으면 제법 멋있습니다


  우리가 히어로물을 보며 기대할 수 있는 몇 가지ㅡ 강철 같은 의지로 세계를 위기에서 구원하는 히어로의 멋진 모습. 거대한 힘으로 악을 무찌르는 영웅담. <왓치맨>에는 그 중 어느 것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의지를 지닌 존재는 힘이 없고, 힘을 가진 존재는 의지가 없습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히어로는 어디에도 없음을 이 만화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딱히 역설하지 않아도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긴 합니다만서도, 어쨌거나 히어로물 만화라고 나온 작품에서조차 지나치게 리얼하게 힘이 없는 히어로 (라고 쓰고 히어로 코스프레를 한 힘 없는 민간인이라고 읽습니다)를 보는 것도 참 애매한 기분입니다. '실제로 누군가 히어로라고 나서봐야 이런 식이겠지' 라는 기분이죠. 이용당하고, 힘이 없고.

  작품 자체는 오래 되었습니다. 1986년에 나온 작품이니까요. 사실 이 메시지는 20년 동안 다른 히어로물에서도 많이 차용해 가져갔기 때문에 지금 시점에서는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겠습니다만, 그렇다 해도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우리 나라에는 어차피 제대로 된 히어로물이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충격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역으로 말해 제대로 된 히어로물이 들어온 적이 없기 때문에 또 그리 충격적일 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히어로물 보고 한참 열광을 해봤어야 충격을 받든 말든). 어쨌거나 제법 괜찮은 만화입니다. 관심이 있다면 한 번 읽어 보세요.


 덧. 그림은 20년 전의 것이니 너무 기대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그림도 좋아합니다만.
 덧2. 이거 제본을 어떻게 한 건지 책장이 너무 쉽게 떨어져 나갑니다. 조심해서 보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