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직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으리라고 생각지는 않았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녀와 함께 보낸 시간이며, 추억일 뿐이지, 그녀 그 자체가 그립지는 않다고, 그것이 그녀가 아닌 그 누구였다 하더라도 상관없었으리라고.

그러나 이런 생각이 든다. 추억이 있다는 말이란, 그것에 그만큼 시간을 쏟았다는 뜻이며, 시간을 쏟았다는 것은 그 대상에 그만한 애정을 담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시간을 들였을 뿐이며 추억은 그리워하지만 그녀를 그리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일이 적절한가? 이것은 나뉘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물론 그녀가 아닌 그 누구였어도 상관없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내가 그녀에게 시간을 쏟았던 이상, 내 자의로 그녀에게 나를 길들인 이상, 그녀는 다른 누구여도 상관없는 존재가 되지는 않는다. 그녀는 내 안에서 의미를 획득하고, 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나는 그녀를 그리워한다.

이 점은 분명하게 해 두어야 좋으리라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것을 인정했다고 해서 외부적으로 무언가 바뀌지는 않는다. 이것은 희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절망을 의미하는 것 또한 아니다. 다만 인정할 이다. 나는 그녀 자체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예전의 추억들을 그리워하며, 어느 정도 아파하고 있다고. 그리고 또한 동시에 그것은 지나갔으며, 다시 돌아오지 않을 터이며, 나는 언젠가는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길들여지게 되리라고.

지나가 버린 추억에 대한 감상이란 누구나 지니는 법이다. 그리고 추억이 나를 지배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인정한다.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시간, 추억, 그녀 그 자체임을.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지나간 일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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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뭐, 그냥 그렇다고. 되게 센치해 보이지만 딱히 센치하게 쓴 글은 아니다. 굳이 말하라면 있어 보이려고 쓴 글에 가깝다. 위 내용의 그녀는 단수로 이해할 수도 있고 복수로 이해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별로 상관없고, 어느 쪽이든 말이 된다. 뭐 아무려면 어떤가. 나의 이십대 초중반은 실로 여자 문제로 아파해 온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다 피 끓는 젊음의 열기가 문제다. 중반을 막 넘어선 지금은 피가 식었느냐고 물으면 딱히 그렇지도 않지만 열혈바보에서 하드보일드(한 척하는)사나이로 바뀐 듯도 싶다.

어쩌면 그녀가 이 글을 볼 수도 있다, 대체로 안 볼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생각하고, 설령 본다 해도 그게 근일내의 일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인생이란 대체로 장담할 수 없는 일들 뿐이다. 아무튼 혹여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난 그녀도 이 글을 읽고 '너 역시 내 추억이야'라고 그냥 미소지을 수 있다면 좋겠다. 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만 하고 별 일은 없)는 사이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요즘 든다. 나 혼자 괜찮은지도 모르겠지만. (먼산)

그렇다 이거지.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