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설이다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간단하게 말해두겠습니다만 일단 이 소설은 그다지 제 취향이 아니었습니다. ..라고만 하고 서론을 끝내기엔 아무래도 거시기하니까 책 뒤쪽의 소개글부터 옮겨와 보겠습니다. " 핵전쟁 후, 변종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병으로 인해 세상은 흡혈귀로 뒤덮인다. 그리고 한 남자만이 살아남는다. 낮에는 시체들에 말뚝을 박고, 밤이면 깨어난 흡혈귀들과 죽음을 건 혈투를 벌이는 지구 최후의 남자 로버트 네빌. 지금 그의 전설이 시작된다." "거장 조지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과 '새벽의 저주' 등 현대 좀비 공포물의 모태가 된 기념비적인 작품." 재미있어 보이지요? 사실 재미있습니다. 단지 제 취향이 아니었을 뿐.
일단 이 소설을 읽기 이전에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를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이 소설이 표현하는 세계는 이를테면 흡혈귀들만이 가득한 세계니까요. 확연한 차이점은 여기에서는 흡혈귀를 신화의 영역이 아니라 현실의 영역으로 끌어오려 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컨대 흡혈귀를 전염성이 있는 병원균에 의한 '병'으로 만들어냈다는 거죠. 지금에야 이런, 과학으로 끌어오는 개념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다 싶습니다만, 애당초 이건 50년도 전의 소설인 데다가 이런 SF 스타일 좀비 소설의 효시이니 이 소설이 전설인 겁니다. ..말하는 게 어째 별로 감흥이 없어 보이지요? 사실 그랬습니다.
읽다 보면 이거 쓰느라 작가가 머리 정말 열심히 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당초 존재할 리 없는 흡혈귀를 현실에 '이성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정말이지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납득할 만한 결론을 이끌어냈지요. 이 점에서 이 소설을 높게 평가하시는 분도 아마 꽤 많을 겁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 포인트에는 별로 감흥이 없었달까요. 이유라면, 일단 애당초 흡혈귀란 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존재이니만큼 그 가상의 존재를 억지로 현실에 끌어대어 봐야 깊이 파고들면 결국 어딘가 어귀가 안 맞는 부분이 생긴다는 겁니다. (기독신학 측면에서 바라봐도 뱀파이어란 존재를 끌어들이려면 결국 어귀가 안 맞죠) 게다가 이 소설 내에서도 브램 스토커에 나오는 흡혈귀를 기본으로 하여, 그놈들이 밤에만 돌아다니는 이유라거나 십자가나 마늘에 약한 이유 등을 나름의 과학적 이유로 설명하고 있는데.. ..사실 이게 그렇게까지 완전한 게 못 되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 설명이 불가능한 부분은 이 소설의 새로운 설정으로 대체하기도 하고, 소거해서 아예 나오지도 않게 합니다. 여기의 흡혈귀는 브램 스토커의 흡혈귀와는 다른 존재입니다. 작가가 만들어 낸 또 다른 개념의 흡혈귀랄까요, 어느 정도 타협을 본 느낌입니다. 신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려고 무진장 노력했지만 결국 그 과학적으로 설명된 '신'은 원래의 '신'이 아니라 과학에 의해 체에 걸러져 형태가 달라진 또 다른 '신'이었다, 그런 기분입니다.
물론 노골적으로 일반물리법칙을 무시하는 존재를 그 법칙 내에서 설명하려는 시도가 무의미하다는 건 아닙니다. 그런 시도도 꽤 재미있지요. 하지만 제게 있어서는 이게 그렇게 매력적인 건 아니라는 거죠. 이게 아주 마음에 드실 분도 아마 틀림없이 있겠지만.
또 하나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이야기도 꽤 흥미롭긴 합니다. 자신 외의 모든 이들이 흡혈귀가 된 세상이라면, 흡혈귀가 '정상'일까요 유일하게 인간인 주인공이 '정상'일까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개념에 대한 논의도 재미있죠. 애꾸눈만이 가득한 세계에선 두 눈 멀쩡한 사람이 비정상이 될 수 있듯이. -근데 전 그래도 두 눈 멀쩡한 사람이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도 이 소설하곤 어째 코드가 안 맞는 기분이네요.
책 자체는 두꺼운 편입니다만 실은 '나는 전설이다'는 반쯤에서 끝나고 나머지는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소설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뭐야 속았다!'라는 기분이었지만 이 단편소설들이 퀄리티가 있는 편이라 괜찮네요. 거침없이 일상을 무너뜨리는 호러소설들이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생각이 어째 좀 편집증적인 기질이 있어서 보다가 영 짜증나기도 했습니다만, 솔직히 잘 쓰여지기는 잘 쓰여진 글입니다. (가장 마음에 든 건 고작 두 장짜리 초단편인 '아내의 장례식'이었습니다. 전 좀 간결한 필치를 좋아하는 모양이에요)
여하간 제 취향에는 참 어지간히 안 맞았습니다만 잘 정돈되고 세심하게 쓰여진 재미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잘못 샀다는 기분이 들긴 하지만 돈이 아까운 소설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