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븐 킹 단편집
스티븐 킹 지음, 김현우 옮김/황금가지

이번 감상은 조금 다른 시각에서 적어 보려 합니다. 이유라면 일단 이 단편집에 스무 편이나 되는 단편이 수록되었기 때문에 그 단편들에 대한 감상을 하나 하나 적기 힘들다는 게 첫 번째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사실은 이게 진짜 이유입니다만, 책의 내용이나 전개에 대해 논하기보다는 책을 읽고 얻은 감상 그 자체를 말해 보고 싶습니다. 그 감상이란 물론, 이 포스트의 부제로 적은 나는 어디에서 공포를 느끼는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 단편집에 실린 각각의 단편들은 우리가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어떤 종류의 두려움들에 대해 짚어 나갑니다. 그것은 때로는 영적이기도 하고 물리적이기도 하며, 혹은 관계적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런 종류의 책을 굳이 사람들이 읽는 이유에 대한 답은 대체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굳이 이러한 공포를 구체화시켜 확인하고, 그것이 소설이나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의 일상은 안전하다고 재확인합니다. 다시 말해, 두려움과 맞닥뜨림으로써 두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곤 합니다.

다만 이번 감상에서는 그러한 작용에 대한 이야기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이번에 신경쓰고자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어디에서 공포를 느끼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마다 공포를 느끼는 부분은 다릅니다. 그리고 같은 사람이라도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예전에는 무서웠던 것들이 무서워지지 않기도 합니다. 사실 저는 어릴 때는 <에일리언>이 무서웠는데, 이제 이십 대 중반이 된 지금 그 영화를 다시 보면 전혀 무섭지 않고 그저 흥미로운 SF 영화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왜 에일리언이 무서웠는데 지금은 무섭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한, 이 <스티븐 킹 단편집>을 읽으며 어떤 단편은 오싹함을 느꼈는데 어떤 단편은 그저 흥미롭기만 했을 뿐 전혀 오싹하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여러분들은 이미 답을 알고 계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거나 말을 돌려 하는 것은 제 취향이 아니니, 바로 바로 한 번 짚어 나가겠습니다. 우선 흥미롭기는 해도 오싹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떤 이야기인지 한 번 짚어보죠.

간단히 말하면,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분명히 없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이 단편집에 실린 단편 중에서는 <트럭>이 그 좋은 예입니다. 여기에서는 무생물이고 의지가 없을 터인 트럭이 자아를 가지고 인간들을 위협하는 상황이 그려지고 있는데, 이것은 분명 흥미롭기는 해도 결코 공포스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트럭의 구조상 자아가 생기는 것이 가능할 리 없으며 인간도 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무기물이 소재인 거의 모든 작품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데, 기계는 자아를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겪어온 그 어떤 삶 속에서도 기계가 자기 의지를 가진 일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저에게는 결코 공포가 될 수 없습니다.

<트럭>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단편인 <맹글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는 기계를 기반으로 하여 영적인 공포가 부여되지만, 그 기반이 기계이기 때문에 공포스럽지 못합니다. 우화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즐기는 것은 가능하나, 현실적인 공포로 와닿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상으로 공포에 떨기에는 그것에 대해 이미 (그것이 현실적인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그 실체가 드러난 대상에 대해서는 큰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다. 많은 공포 영화에서 상대의 실체가 드러난 후보다 실체가 드러나기 전이 오히려 더 공포스럽다는 일은 많은 분들이 경험하셨을 줄로 압니다. (여담: 이게 제가 끝까지 상대의 실체가 드러나지 않는 <블레어 윗치>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입니다)

어쩌면 제가 기계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에서 영적인 존재들에 대한 공포를 느끼지 않는 분들이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적인 존재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 방법은 통상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는 것,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영적인 존재는 실존하지만 내게 해를 끼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후자인데, 그래서 이 단편집 안에서 소재가 영적인 존재들인 <예루살렘 롯>이나 <옥수수 밭의 아이들> 같은 경우는 약간의 오싹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스티븐 킹이 단편 내에서 펼쳐내는 세계관과 제 세계관은 다른데, 이 단편 내에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영적인 존재에게 무참하게 당하고 맙니다. 이 점에서 저는 관점이 다른데, 그 정도로까지 대항할 수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실존에 대해 오싹함을 느끼더라도 진정한 의미에서 공포를 느끼지는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공포를 느끼는지 좀 더 정리가 된 듯 싶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단순한 물리적인 폭력은 어떨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의 <일방통행>이라는 단편을 이야기해 보는 게 적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단편은 철저하게 물리적입니다. 주인공은 하루 종일 일이 잘 안 풀렸고, 결국 짜증 끝에 차를 몰다가 시비로 인해 살해당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공포를 느꼈을까요? 물론 그렇지 않았습니다. 제가 여기에서 느낀 것은 오로지 짜증이었고 '저런 놈들 응징하기 위해서도 더 강해져야 하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즉 이런 류의 이야기가 제게 공포가 될 수 없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물리적인 시비를 걸어 오는 상대를 상대로는 공포보다 분노가 더 크게 작용합니다. 대항하려는 마음이 더 큰 것이죠.

물리적이라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이 스티븐 킹 단편집에 실린) 단편으로는 <철야 근무>를 들어 볼 수 있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단편에서 공포의 상대로 나오는 것은 쥐떼입니다. 그것도 키가 거의 일 미터나 되는 녀석도 있는, 거대한 녀석들이죠. 쥐떼 좋아하는 분은 없을 거라 생각하는데, 아마 본능적인 혐오감이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십 마리라면 혹시 몰라도 그것이 수백 수천 마리이고, 끊임없이 몰려들어와 나를 물어 뜯고 먹어 치운다고 상상해 보자 조금은 오싹하더군요. 말하자면, 이런 것들을 상대로는 뭘 어떻게 해도 소용이 없을 법했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면 위의 <일방통행>에서는 왜 공포가 되지 않았느냐? 그것 또한 주인공이 무참하게 당했는데. 그건 주인공이 당했지 나도 그렇게 당하리란 생각은 일단 안 들고, 상대가 단순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공포가 못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좀 강하면 이길 수 있을 상대니까요. 하지만 쥐떼가 상대쯤 되면, 기관총으로 갈겨도 그 떼거지를 상대로 뭘 어찌 한답니까.

이만하면 무엇이 공포스러운지는 정리가 된 듯 싶습니다. 결론을 내 보면, (영적이든 물리적이든) 내가 생각하기에 실제 일어날 법하고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으면서 뭘 어떻게 해도 소용 없을 것 같아서 대항하려는 의지가 꺾여 버리면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았습니다만, 저는 요즘 악몽이란 걸 안 꿉니다. 어릴 때 꾸었다면 분명 공포 영화였을 것이 지금은 그냥 액션 영화가 됩니다. 좀비가 나오면 절권도로 상대하고, 악령이 나오면 기독교적으로 물리치고, 에일리언이 나오면 어이쿠 마침 이런 곳에 기관총이, 이런 식이다보니 공포가 될래야 될 수가 없겠지요. 하긴 지난 밤에는 덩치가 삼 미터쯤 되는 식인 상어가 나와서 아무리 저라도 고전했습니다만, 어찌 어찌 부비 트랩을 잘 설치해서 결국 쓰러뜨렸더랬습니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으냐? 요컨대 대항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고, 마음이 꺾이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결코 공포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실로 Neissy다운 결론이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습니다만, 결국 제 감상으로서는 이런 결론이 가장 적합하지 싶네요.

뭐 그건 그렇고 이 <스티븐 킹 단편집>은 확실히 재미있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공포를 느끼냐 느끼지 않느냐를 차치하고서라도, 소재나 문장력이 훌륭하기 때문에 꽤 즐겁게 읽을 수 있지요. 무엇보다 해설 합쳐 580페이지나 되는데도 만 이천원이라는 합리적인 가격도 만족감에 일익을 담당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Posted by Neiss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