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문화
월로우뱅크신학협의회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이 내용은 원래 학교 수업 때문에 책을 읽고 요약 정리 후 감상을 적은 레포트인 관계로 평어체로 적혀 있는데 존대말로 바꾸기도 귀찮고 블로그 포스팅이라도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어차피 평어로 포스팅하는 것도 꽤 있었으니) 도서감상이지만 그냥 이대로 올립니다. 기독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용어의 상당수를 '이 정도 용어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 하에 사용하기 때문에 비기독교인이신 분들은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문화관이 어떠하며 교계 내에서 선교/전도에 대한 견해가 어떠한가를 대략적으로 보고 싶으신 분은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혹시 이 내용들에 관해 질문이 있으시면 리플로 달아 주시면 아는 한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래에서 설명할 내용들은 <복음과 문화>라는 책의 내용으로, 이 책에는 1978년 개최된 윌로우뱅크 신학협의회에서 논의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복음과 문화의 상호 관계성의 문제로부터 타문화권 복음 전달시 겪게 될 문제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나 죄로 인하여 그 형상이 왜곡되었다. 그러므로 자아 중심적이 되었고, 인간 문화의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참되거나 아름답거나 선하지 못하다. 그러나 왜곡되었다고는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통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총체적 삶의 방식이 문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화란 믿음, 가치 기준, 관습, 통합 체계라 할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실재 혹은 궁극적 의미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가치 기준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말한며, 관습이란 행동하고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학습을 뜻한다. 그리고 통합 체계란 이러한 모든 요소, 믿음과 가치 기준과 관습을 드러내는 사회 제도를 아우르는 통합 체계를 뜻한다. 이 모든 요소가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동질감과 안정감을 부여하며 사회에 권위와 영속성을 부여한다.
성서는 성서가 쓰여질 당시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개념을 다소 변형시켜 진리와 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사실이 약간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우선 성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빌어 온 개념을 사용하여 성서를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영감과 모순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성서의 각 책들 사이에는 양식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님이 그들 모두에게 각기 맞는 방법으로 영감을 주셨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과 문화적 배경을 사용하여 각각의 경우에서 같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성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양식과 의미의 차이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 각 문화간의 차이로 본래의 의미를 왜곡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의미 보존을 위해 양식을 변경시켜 의역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주의점은 모든 단어를 의역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십자가, 양, 잔 등의 단어는 그 자체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양식을 그대로 보존시키며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리도록 번역할 필요가 있다. 즉, 성서가 주는 메시지의 본질적 의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스스로 이 성서를 계시를 위한 적절한 전달 수단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인데, 각 세대와 문화에 따라 양식이 변형될 수는 있으나 반드시 그 원초적 의미와 대조하여 성서의 이 규범적인 성질에 충실한가를 검토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성서가 쓰여졌을 때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다른 만큼 어떤 본문들은 문자 그대로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경우는 본문의 내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본문을 우리들 각자의 문화에 알맞게 각색할 필요가 있다.
주의점은, 성서의 지고성과 규범성에 대한 강조는 성령님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의 정경화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성령님의 영감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으나, 모든 사람들의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사역은 현재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보다 밝히 깨달을 수 있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데에 담대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이 문화적 요소는 성서가 쓰여지는 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해석을 하는 데에도 작용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는 데에 어떤 방법의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서 본문을 보고 그 성서가 처음부터 독자의 언어로 쓰였고 독자의 문화나 시대 속에서 쓰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읽히시기를 원하며, 이 방법을 통하여도 구원의 핵심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본문을 그 본문이 쓰였던 원래의 문맥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의도된 참된 의미를 놓치고 다른 뜻으로 대체할 위험이 있다.
다른 방법은 원래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본문이 원어로 무엇을 의미하며 이 부분이 성서의 다른 부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데, 마치 성서가 오로지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만 말씀하였다고 생각하여 현재 우리에게의 실생활 적용을 무시하거나 말씀 순종 없이 학문적으로 지식만을 습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원 맥락을 고려하되 현대 독자들이 처한 상황도 고려하여 성서를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하여야만이 하나님을 더 밝히 알아 나가고 보다 많은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앎과 순종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게 되며 서로의 수준을 증진시킨다.
이러한 성경의 이해는 개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와 현재의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문제임을 주지하자. 설교, QT와 그룹 성경 공부 등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유산을 무시하는 신자들은 영적 기근 상태에 빠질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서적 근거를 참고하여 검토되어야 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서도 위험하다.
성서는 고대 유대와 그리스 로마 시대에 기록되었으므로 오늘날의 종교나 사회 경제 이론, 현대 기술 문명 등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선례나 원리 등을 성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로 복음 전달이 되었으니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전달을 생각하기 앞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고려하자. 일단 복음은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 전체가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구주시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일관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복음을 선포하며, 이 복음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어떤 일목요연한 형식에 짜 맞추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그러나 또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규명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죄의 보편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인한 만민의 주와 구주되심, 회심의 필요성, 성령님의 오심과 그의 변화시키시는 능력, 교회의 교제와 선교 그리고 그리스도 재림의 소망. 특정 문화 속에서 이 복음의 어떠한 부분이 사람들이 반기지 않는 요소라고 하더라도 이 중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편집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임은 편집이 아니라 선포다.
이 선포를 함에 있어 문화적 요인을 무시하면 복음의 전달이 불가능함을 주지하자. 타문화권에서의 선교를 위해, 타문화에 대한 자신의 문화적 교만을 제거하고 그 문화에 적응하고 들어가야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 문화적 침략을 피하고, 복음 그 자체의 핵심과 관계되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저항도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도/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대로 생각하며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 이슬람교와 같은 경우, 그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의 가치를 겸손하게 규명하고 평가해야만 복음 전도의 가능성이 보다 열릴 것이다.
올바른 복음 전도의 모범을 우리는 성육신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신분을 포기하셨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렸던 권리와 특권과 권세를 포기하셨던 것처럼 복음 전도자도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독립심을 포기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자신이 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험이나 슬픔, 한계, 경제적 궁핍이나 고통 등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시험, 위험, 질병, 기후, 고독, 그리고 어쩌면 죽음에까지 던져질 각오를 해야 한다. 마지막은 동화인데, 예수께서 신이심에도 인간과 완전히 동화하여 인간이 느낀 모든 것을 느끼고 같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대상자를 위하여 그럴 필요가 있다. 단, 그분께서 인간과 완전히 동화하셨지만 자신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만은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회심과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선 회심은 회심자의 세계관을 주님 중심으로 개편시키고, 행동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바꿔놓으며, 세상에 대한 변화의 책임을 걸머지게 되는 변화다. 이러한 큰 변화를 겪으며 주의점은 회심자가 본인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문화를 아예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리 많은 것을 부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더라도 회심자는 여전히 동일한 유산과 동일한 가족을 가진 변함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에 대한 균형 잡힌 자기 인식이 자라나야만 한다.
어떠한 문화에서는 특히 악령의 권세가 가시적이다. 회심은 영적 대결을 포함하며, 악령들의 권세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월하며 이 구원이 악한 세력과 죽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임을 깨닫게 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하게 된다.
서구에서는 회심을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구약에 나타난 언약 사상이나 신약에 나타난 가족 단위의 세례를 볼 때 가족 단위나 집단적인 회심이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부족의 추장이나 한 집안의 가장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단위가 모두 영접하게 되는 것과 같다. 명백한 사실은 사람들이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때는 복음이 그들의 문화에 이질감을 주지 않고 매우 적절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 때라는 것이다.
회심은 일회성이라기보다 점진적이다. 회심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전환하는 것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복종할 때까지 계속된다. 회심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그 성품과 생각이 완전히 변화되고 전적으로 새로워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회심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늘 새로운 도전과 결단을 갖고 끊임없이 주께로 돌아가는 여정이요 순례의 길이다.
복음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문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복음이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면 교회도 그래야 한다. 전통적인 접근 방법에서는 피선교지 현장에 세워진 교회는 선교사 본국의 교회를 모본으로 삼았다. 이것은 피선교지의 그리스도인이 서구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생겨난 경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자신들의 주체성을 지닌 교회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토착 교회의 생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개념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 번역 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의미는 변화시키면 아니 되되 형식은 전달을 위해 변형이 가능하다. 즉, 교회는 항상 복음을 증거하며 봉사하는 공동체이지만 그 복음 증거의 방법이나 사회 참여의 진행 등은 교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성서의 원리에 입각하여 각 지역 문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각 교회가 결정할 수 있다. 지역 교회들은 궁극적으로 역사 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역동적인 강권에 의지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를 자신의 문화대로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토착화에서 한 가지 주의점은, 토착화가 지나친 나머지 교회가 자기 자신만의 문화 속으로 은둔하는 것이다. 개개의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일부분이며 상호 간에 교류를 나누면서,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으로서, 권력 구조와 제 3세계에 대한 국가적 착취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착취당하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베푸며, 주님의 이름으로 억압자의 불의에 대항하여 외쳐야 한다.
교회는 종교 혼합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본질상 거짓되거나 악한 요소는 절대 기독교와 융합될 수 없다. 그러나 악이 부수적인 것이라면 그 부분을 제거하고 기독교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적인 요소가 제거되고 진리와 성결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문화라면 교회에서 채택 가능하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이러한 문화가 시험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교회는 문화를 변형시키고 풍요롭게 만들기에 힘쓰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악의 세력이 여전히 날뛰고 있는 중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기도라는 강력한 무기로 싸워 나가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해야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는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기독교는 어느 정도 문화를 파괴하기도 했고 보존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 삶이 어떻게 자기 시대의 문화와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복음은 한 문화가 다른 어떤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어떠한 문화는 기독교 복음과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어떠한 문화는 그저 관습적인 문제이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제 3세계나 서구나 다를 바 없다. 식인 풍습은 가난한 이들을 ‘먹어 치우는’ 사회적 불의와 동일하며 과부를 목 졸라 죽이는 것은 여성 학대와 같다. 유아 살해와 낙태가 다를 바 없으며 부친 살해와 노인 방치가 다르지 않다. 제의적 매춘과 혼음적 성행위가 다를 바 없다. 악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되 근본은 같다. 명백한 악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결하여 근절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악과의 대결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온 교회 차원에서 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는 복음의 영향 하에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실제로 문화는 필요한 변화에 대해서는 외관상 보이는 것처럼 심하게 저항하지 않지만, 변화를 시작하려 할 때에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
우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외부의 압력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필요에서만 온다. 압박을 가함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설득과 입증으로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제 3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특히 그 세계에서 사회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내적인 매개들과 그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올바른 혁신의 절차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관습은 그 문화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설령 바람직하지 못한 관습이라고 해도 건설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무턱된 폐지는 좋지 않으며 적절한 대체가 있어야 한다. 어떤 문화적 관습은 그 문화의 신앙 관습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으며, 더 나은 대안, 즉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받아들여질 때에만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전파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복음의 전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복음 전달자가 맡고 있는 것은, 불신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을 내어놓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큰 문제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이해타산적으로 행동한다. 진리와 관계 없는 부분에서 놀랍도록 완고하며 자신의 방법을 강요한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그 자신이 모범이 되지 못하면서도 그저 복음을 말하기만 하는 것으로 전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얼마나 부끄러운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전도는 자신의 삶으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뒷받침될 때에 비그리스도인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말에 귀기울일 것이다.
정치가 중에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행동으로 증명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 자기 희생적 정신과 겸손, 그러나 동시에 진리 위에 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말이다. 위에서 계속 말해 왔다시피 진리 위에서의 정체성은 결코 자기 독단이나 고집, 오만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정치가를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복음 때문이 아니며, 그들의 언행 불일치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어떤 것임을 스스로의 삶에서 보이지 못한다.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데 누가 그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받아들이겠는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것이 같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문화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강제나 억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이것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삶이라는 설득과 입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그 자신의 선교지이다. 하나님 안에서 축복된 선교를 할 수 있느냐, 아니면 대상자들에게 욕을 먹고 초라하게 선교지에서 쫓겨나느냐는 오로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올바르게 복음 위에 서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타인을 존중하되 오로지 진리의 본질이 흐려질 상황에서만 단호하자.
월로우뱅크신학협의회 / IVP(한국기독학생회출판부)
※ 이 내용은 원래 학교 수업 때문에 책을 읽고 요약 정리 후 감상을 적은 레포트인 관계로 평어체로 적혀 있는데 존대말로 바꾸기도 귀찮고 블로그 포스팅이라도 이건 이것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아 (어차피 평어로 포스팅하는 것도 꽤 있었으니) 도서감상이지만 그냥 이대로 올립니다. 기독신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용어의 상당수를 '이 정도 용어는 이미 알고 있으리라'는 전제 하에 사용하기 때문에 비기독교인이신 분들은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기독교의 문화관이 어떠하며 교계 내에서 선교/전도에 대한 견해가 어떠한가를 대략적으로 보고 싶으신 분은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혹시 이 내용들에 관해 질문이 있으시면 리플로 달아 주시면 아는 한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아래에서 설명할 내용들은 <복음과 문화>라는 책의 내용으로, 이 책에는 1978년 개최된 윌로우뱅크 신학협의회에서 논의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다. 복음과 문화의 상호 관계성의 문제로부터 타문화권 복음 전달시 겪게 될 문제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의 내용을 우선 살펴보도록 하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으나 죄로 인하여 그 형상이 왜곡되었다. 그러므로 자아 중심적이 되었고, 인간 문화의 그 어떤 것도 온전히 참되거나 아름답거나 선하지 못하다. 그러나 왜곡되었다고는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을 통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인간의 창조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반영하고 있다.
이 인간들이 모여 만들어진 총체적 삶의 방식이 문화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문화란 믿음, 가치 기준, 관습, 통합 체계라 할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나 실재 혹은 궁극적 의미에 대한 믿음을 말하고, 가치 기준이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말한며, 관습이란 행동하고 관계 맺고 살아가는 모든 일들에 대한 학습을 뜻한다. 그리고 통합 체계란 이러한 모든 요소, 믿음과 가치 기준과 관습을 드러내는 사회 제도를 아우르는 통합 체계를 뜻한다. 이 모든 요소가 사회를 하나로 결속시키고 동질감과 안정감을 부여하며 사회에 권위와 영속성을 부여한다.
성서는 성서가 쓰여질 당시의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개념을 다소 변형시켜 진리와 선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이 사실이 약간의 문제를 발생시키는데, 우선 성서 기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로부터 빌어 온 개념을 사용하여 성서를 기록한 것이 하나님의 영감과 모순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물론 성서의 각 책들 사이에는 양식에 많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동일한 성령님이 그들 모두에게 각기 맞는 방법으로 영감을 주셨고, 그들의 지식과 경험과 문화적 배경을 사용하여 각각의 경우에서 같은 결과를 이끌어냈다. 따라서 성서는 인간의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한 성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양식과 의미의 차이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양식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경우 각 문화간의 차이로 본래의 의미를 왜곡할 가능성이 존재한다. 따라서 의미 보존을 위해 양식을 변경시켜 의역하는 일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주의점은 모든 단어를 의역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십자가, 양, 잔 등의 단어는 그 자체로 상징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양식을 그대로 보존시키며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리도록 번역할 필요가 있다. 즉, 성서가 주는 메시지의 본질적 의미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보존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 스스로 이 성서를 계시를 위한 적절한 전달 수단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인데, 각 세대와 문화에 따라 양식이 변형될 수는 있으나 반드시 그 원초적 의미와 대조하여 성서의 이 규범적인 성질에 충실한가를 검토해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성서가 쓰여졌을 때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다른 만큼 어떤 본문들은 문자 그대로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무책임하게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 경우는 본문의 내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그 본문을 우리들 각자의 문화에 알맞게 각색할 필요가 있다.
주의점은, 성서의 지고성과 규범성에 대한 강조는 성령님의 역사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성경의 정경화가 완성되었다는 의미에서 성령님의 영감의 사역은 다 이루어졌으나, 모든 사람들의 회심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령님의 조명하시는 사역은 현재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보다 밝히 깨달을 수 있고 그 뜻을 따라 행하는 데에 담대할 수 있도록 끊임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이 문화적 요소는 성서가 쓰여지는 데에서뿐 아니라 우리가 해석을 하는 데에도 작용하는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 하는 데에 어떤 방법의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성서 본문을 보고 그 성서가 처음부터 독자의 언어로 쓰였고 독자의 문화나 시대 속에서 쓰인 것처럼 생각하고 그 본문을 해석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말씀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읽히시기를 원하며, 이 방법을 통하여도 구원의 핵심적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방법은 본문을 그 본문이 쓰였던 원래의 문맥에서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원래 의도된 참된 의미를 놓치고 다른 뜻으로 대체할 위험이 있다.
다른 방법은 원래의 역사적 맥락과 문화적 맥락을 진지하게 고려하여 본문이 원어로 무엇을 의미하며 이 부분이 성서의 다른 부분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킬 수 있는데, 마치 성서가 오로지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만 말씀하였다고 생각하여 현재 우리에게의 실생활 적용을 무시하거나 말씀 순종 없이 학문적으로 지식만을 습득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즉, 원 맥락을 고려하되 현대 독자들이 처한 상황도 고려하여 성서를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필요가 있다. 이러하여야만이 하나님을 더 밝히 알아 나가고 보다 많은 순종을 할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앎과 순종은 서로 상호 작용을 하게 되며 서로의 수준을 증진시킨다.
이러한 성경의 이해는 개개인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며 과거와 현재의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문제임을 주지하자. 설교, QT와 그룹 성경 공부 등을 통하여 우리 각자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 있다. 이러한 공동체의 유산을 무시하는 신자들은 영적 기근 상태에 빠질 위험을 각오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성서적 근거를 참고하여 검토되어야 하며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어서도 위험하다.
성서는 고대 유대와 그리스 로마 시대에 기록되었으므로 오늘날의 종교나 사회 경제 이론, 현대 기술 문명 등에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선례나 원리 등을 성서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로 복음 전달이 되었으니 이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해야 한다. 그러나 복음의 전달을 생각하기 앞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고려하자. 일단 복음은 성경 안에서 발견되며, 어떤 의미에서는 성경 전체가 복음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며 구주시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함으로써 사람들이 그 분을 믿도록 설득하는 것이 성경 전체를 통해 나타나는 일관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복음을 선포하며, 이 복음은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어떤 일목요연한 형식에 짜 맞추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그러나 또한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는 규명할 필요가 있다. 복음의 핵심은 이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죄의 보편성,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부활로 인한 만민의 주와 구주되심, 회심의 필요성, 성령님의 오심과 그의 변화시키시는 능력, 교회의 교제와 선교 그리고 그리스도 재림의 소망. 특정 문화 속에서 이 복음의 어떠한 부분이 사람들이 반기지 않는 요소라고 하더라도 이 중 어떤 것도 우리 마음대로 편집하여서는 안 된다. 우리의 책임은 편집이 아니라 선포다.
이 선포를 함에 있어 문화적 요인을 무시하면 복음의 전달이 불가능함을 주지하자. 타문화권에서의 선교를 위해, 타문화에 대한 자신의 문화적 교만을 제거하고 그 문화에 적응하고 들어가야 효과적인 복음 전달이 가능하다. 문화적 침략을 피하고, 복음 그 자체의 핵심과 관계되어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그 어떠한 저항도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전도/선교를 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생각대로 생각하며 그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의 짐을 함께 져야 한다. 이슬람교와 같은 경우, 그들과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의 가치를 겸손하게 규명하고 평가해야만 복음 전도의 가능성이 보다 열릴 것이다.
올바른 복음 전도의 모범을 우리는 성육신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선 신분을 포기하셨다.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누렸던 권리와 특권과 권세를 포기하셨던 것처럼 복음 전도자도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독립심을 포기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청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을 자신이 하려 들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시험이나 슬픔, 한계, 경제적 궁핍이나 고통 등에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시험, 위험, 질병, 기후, 고독, 그리고 어쩌면 죽음에까지 던져질 각오를 해야 한다. 마지막은 동화인데, 예수께서 신이심에도 인간과 완전히 동화하여 인간이 느낀 모든 것을 느끼고 같이 하신 것처럼 우리도 대상자를 위하여 그럴 필요가 있다. 단, 그분께서 인간과 완전히 동화하셨지만 자신의 정체성만은 잃지 않으신 것처럼 우리도 복음에 대하여만은 정체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이제는 회심과 문화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우선 회심은 회심자의 세계관을 주님 중심으로 개편시키고, 행동을 그리스도에 대한 순종으로 바꿔놓으며, 세상에 대한 변화의 책임을 걸머지게 되는 변화다. 이러한 큰 변화를 겪으며 주의점은 회심자가 본인이 그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문화를 아예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아무리 많은 것을 부인할 필요를 느낀다 하더라도 회심자는 여전히 동일한 유산과 동일한 가족을 가진 변함없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와 문화 양자에 대한 균형 잡힌 자기 인식이 자라나야만 한다.
어떠한 문화에서는 특히 악령의 권세가 가시적이다. 회심은 영적 대결을 포함하며, 악령들의 권세보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월하며 이 구원이 악한 세력과 죽음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임을 깨닫게 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충성하게 된다.
서구에서는 회심을 개인적인 체험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구약에 나타난 언약 사상이나 신약에 나타난 가족 단위의 세례를 볼 때 가족 단위나 집단적인 회심이 분명 존재할 수 있다. 부족의 추장이나 한 집안의 가장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 단위가 모두 영접하게 되는 것과 같다. 명백한 사실은 사람들이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때는 복음이 그들의 문화에 이질감을 주지 않고 매우 적절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는 때라는 것이다.
회심은 일회성이라기보다 점진적이다. 회심이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전환하는 것으로서, 삶의 모든 영역이 점진적으로 그리스도의 주권에 철저히 복종할 때까지 계속된다. 회심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형상대로 그 성품과 생각이 완전히 변화되고 전적으로 새로워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회심이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늘 새로운 도전과 결단을 갖고 끊임없이 주께로 돌아가는 여정이요 순례의 길이다.
복음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과정과 마찬가지로 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도 문화의 문제는 중요하다. 복음이 문화적 상황에 맞게 적용되어야 한다면 교회도 그래야 한다. 전통적인 접근 방법에서는 피선교지 현장에 세워진 교회는 선교사 본국의 교회를 모본으로 삼았다. 이것은 피선교지의 그리스도인이 서구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며 생겨난 경향이기도 하다. 그러나 각자 자신들의 문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자신들의 주체성을 지닌 교회를 발견하고 표현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토착 교회의 생활에 대한 좀 더 근본적인 개념이 개발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성서 번역 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의미는 변화시키면 아니 되되 형식은 전달을 위해 변형이 가능하다. 즉, 교회는 항상 복음을 증거하며 봉사하는 공동체이지만 그 복음 증거의 방법이나 사회 참여의 진행 등은 교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교회의 모든 일들은 성서의 원리에 입각하여 각 지역 문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각 교회가 결정할 수 있다. 지역 교회들은 궁극적으로 역사 속에 살아 계시는 주님의 역동적인 강권에 의지해야 한다. 선교사들은 지역 교회를 자신의 문화대로 통제하려 해서는 안 된다. 토착화에서 한 가지 주의점은, 토착화가 지나친 나머지 교회가 자기 자신만의 문화 속으로 은둔하는 것이다. 개개의 교회는 우주적 교회의 일부분이며 상호 간에 교류를 나누면서, 문화적 다양성 속에서 역사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예배하여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책임으로서, 권력 구조와 제 3세계에 대한 국가적 착취에 대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착취당하는 이들에게 사랑으로 기도해 주고 베푸며, 주님의 이름으로 억압자의 불의에 대항하여 외쳐야 한다.
교회는 종교 혼합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본질상 거짓되거나 악한 요소는 절대 기독교와 융합될 수 없다. 그러나 악이 부수적인 것이라면 그 부분을 제거하고 기독교에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악마적인 요소가 제거되고 진리와 성결 안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문화라면 교회에서 채택 가능하다. 그러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에게 이러한 문화가 시험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교회는 문화를 변형시키고 풍요롭게 만들기에 힘쓰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만 한다. 악의 세력이 여전히 날뛰고 있는 중에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의 기도라는 강력한 무기로 싸워 나가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도록 해야 하겠다.
이제 마지막으로 문화와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동과의 관계를 살펴보자.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주신 새로운 생명은 새로운 생활 양식을 창출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의 가장 두드러진 점은 그의 문화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어야 한다.
문화는 장소와 시대에 따라 다르다. 기독교는 어느 정도 문화를 파괴하기도 했고 보존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새 삶이 어떻게 자기 시대의 문화와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
복음은 한 문화가 다른 어떤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어떠한 문화는 기독교 복음과 결코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 있으며 어떠한 문화는 그저 관습적인 문제이고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이것은 제 3세계나 서구나 다를 바 없다. 식인 풍습은 가난한 이들을 ‘먹어 치우는’ 사회적 불의와 동일하며 과부를 목 졸라 죽이는 것은 여성 학대와 같다. 유아 살해와 낙태가 다를 바 없으며 부친 살해와 노인 방치가 다르지 않다. 제의적 매춘과 혼음적 성행위가 다를 바 없다. 악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되 근본은 같다. 명백한 악에 대하여 분명하게 대결하여 근절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든 악과의 대결은 개인 차원이 아니라 온 교회 차원에서 해야 한다. 그러나 문화는 복음의 영향 하에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실제로 문화는 필요한 변화에 대해서는 외관상 보이는 것처럼 심하게 저항하지 않지만, 변화를 시작하려 할 때에는 많은 주의를 요한다.
우선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외부의 압력에서가 아니라 그 자신의 필요에서만 온다. 압박을 가함으로 변화시킬 수 없고 설득과 입증으로만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더불어, 제 3세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특히 그 세계에서 사회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내적인 매개들과 그 문화 속에서 일어나는 올바른 혁신의 절차에 대해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관습은 그 문화 안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설령 바람직하지 못한 관습이라고 해도 건설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무턱된 폐지는 좋지 않으며 적절한 대체가 있어야 한다. 어떤 문화적 관습은 그 문화의 신앙 관습에 의거하는 경우가 많으며, 더 나은 대안, 즉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받아들여질 때에만 이러한 것들이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의 전파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복음의 전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복음 전달자가 맡고 있는 것은, 불신자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고 그리스도를 깨우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 있어 그리스도인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자신을 내어놓고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큰 문제가 있는데, 세상 사람들보다도 자신의 이득을 취하고 이해타산적으로 행동한다. 진리와 관계 없는 부분에서 놀랍도록 완고하며 자신의 방법을 강요한다. 타인을 존중하지 않고 그 자신이 모범이 되지 못하면서도 그저 복음을 말하기만 하는 것으로 전도를 한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란 얼마나 부끄러운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기능하기 위해, 전도는 자신의 삶으로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동이 뒷받침될 때에 비그리스도인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말에 귀기울일 것이다.
정치가 중에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사람이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말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행동으로 증명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삶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한다. 자기 희생적 정신과 겸손, 그러나 동시에 진리 위에 선 사람으로서의 정체성 말이다. 위에서 계속 말해 왔다시피 진리 위에서의 정체성은 결코 자기 독단이나 고집, 오만이 아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정치가를 환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놀랍게도,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말하는 복음 때문이 아니며, 그들의 언행 불일치 때문에 일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 어떤 것임을 스스로의 삶에서 보이지 못한다. 복음이 정말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말하는 사람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듯이 보이는데 누가 그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받아들이겠는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행동하는 것이 같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 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겠는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문화를 주도해 나가야 한다. 강제나 억압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통해 이것이 진정한 기쁨과 행복의 삶이라는 설득과 입증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서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든 그 자신의 선교지이다. 하나님 안에서 축복된 선교를 할 수 있느냐, 아니면 대상자들에게 욕을 먹고 초라하게 선교지에서 쫓겨나느냐는 오로지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올바르게 복음 위에 서 있느냐에 달려 있다. 겸손하고 헌신적이며 타인을 존중하되 오로지 진리의 본질이 흐려질 상황에서만 단호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