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 오디세이 1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카방글이 추천해주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왜 유명한지 알게 될 거라고 했는데, 읽어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물론 이걸 읽기 전에도 요즘 시끌시끌한 사태가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죠) 이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고 논지를 전개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쉽게'라는 점이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쉽게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합니다. 잘 모르면 말을 어렵게 하기 마련이죠. 물론 잘 알면서도 어휘나 개념 상의 문제로 원체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책은 매우 쉽게 읽힙니다.
쉽게 읽히는 이유로 몇 가지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충분한 사진 자료를 첨부하여 보여 주며 설명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시각 자료의 효용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죠.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어투가 구어체에 가깝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이렇다. 이것이 요러저러하고 이러저러하니까 그런 거다. 저건 저런 거니 말이다.' 식의 문체라는 겁니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한 가지 개념이 지나가고 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대화를 하는 대본을 보여 주는 식으로 최종 정리를 또 한 번 해 줍니다. 이러니 어렵기가 어렵죠.
전부 3권인데 현재 다 읽은 건 1권뿐인 고로 1권에 대해서만 말해 보겠습니다. (어제 빌려서 세 시간만에 다 읽었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이 책에서는 원시 예술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어떻게 성장해왔으며 미학의 개념이 어떻게 정립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추려 정리해 보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중요한 테마가 되는 것은 역시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플라톤은 이 세계 너머에 피안 (彼岸)의 세계, 이데아 (idea)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며, 예술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를 쫓아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의에 따르면 예술은 분명해야 하고 완전을 지향해야 하며 정확한 척도와 비례를 따라야 합니다. 추상화가 이런 것에 근거를 두고 미학적으로 기능하죠.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보다 이 세계를 중시하여, 이 세계가 한낱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가 녹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가상 -거짓, 눈속임, 왜곡-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예술이 그 자체로 '미'를 추구하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이며, 당시뿐 아니라 불과 수백 년 전까지도 예술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립된 저 두 가지 사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해 교차되어 예술의 세태를 주도합니다. 중세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플로티노스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자입니다. 다만 플라톤과 달랐던 점은 플라톤처럼 이데아와 현실 세계를 레테의 강 (망각의 강, 이데아에 있던 우리들이 현실로 넘어오며 이데아를 잊게 만드는 원인)으로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빛이 현실로 유출되어 나오고 우리가 그 빛을 따라 올라가면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면 진리를 찾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나타날 수 있는데, 즉 신이야말로 모든 미의 근원이며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그 미가 나뉘어진 것이고, 이 세상의 미를 찾아 올라감으로 신의 미에까지 올라가는- 구원에 이르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세 미학에 적용되어, 중세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재현보다 그 너머 진리를 표현하려 하게 되었고, 자연의 모방이라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나 색채가 자유롭게 구성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13세기부터는 고딕 예술이 나타나기 시작해, 기독교 이상주의의 '진리를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자연주의를 추구합니다. 물질세계를 무시하기보다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으로 보는 것이지요. 기실 기독교에서, 일반법칙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주의 깊게 보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함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이후 15세기부터의 르네상스에서 유명한 두 명의 예술가를 대라면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다 빈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향에 따라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예술을 실천했고, 미켈란젤로는 플라톤의 경향처럼 진리와 영감을 중시했습니다. 17세기의 예술은 바로크 예술이라 하는데, 바로크는 어느 쪽이냐면 플라톤 쪽이라 '현상'과 '감성'을 중시합니다. 이 책에서는 루벤스의 그림을 예로 들며 바로크 예술의 회화적 성향과 역동성, 깊이, 열린 형식, 불명료성 등을 설명합니다. 이 시기 이에 대비되는 것이 고전주의파인 푸생인데, 이 경우는 예술은 진리를 표현해야 한다는 신념 그대로 회화가 '이성'을 중시하며 고요하고 정적입니다.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이 미학 (aesthetica)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그 때까지 예술이 '진리에 이르는 이성적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비로소 감성의 작업으로 규정됩니다. 단,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이성 내에 있는 하나의 감성적 인식으로 봄으로써, 이것이 이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여전히 예술을 인식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칸트에 이르면 드디어 미가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논리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가 됩니다. 미는 누구에게나 분명한 개념이 아니고 각자마다 다를 수 있는 느낌입니다.
칸트 철학을 계승한 19세기의 철학자로 헤겔이 있는데, 이 사람은 태초에 이념/절대자가 있었고, 그 이념/절대자가 자신을 투사하여 자연을 만들고, 자연에서 인간이라는 정신이 다시 탄생하여 그 인간의 정신이 발전하여 자연이 이념/절대자의 다른 모습이며 이 모든 것이 절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연이 되었던 이념/절대자가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저런 사상에 바탕을 두고 '바깥 세계로부터 인간 내면의 정신 세계로 옮아가는' 것으로 예술을 보았는데, 예술의 발전인 건축 → 조각 → 회화 → 음악 → 시 등을 보면 점차 물질 세계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정신 세계 쪽으로 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헤겔의 예술관이며, 이 예술은 종국에는 종교에 자리를 내 주고 종교는 다시 철학에 자리를 내 주어서 세계의 역사를 완성에 다다르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헤겔의 머리 속에서" (219p) 말이죠.
줄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설명하려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쉽게 썼다고 했지만 그렇게 잘 쓴 것 같지는 않군요. 여하간 저게 제가 이해한 내용입니다. 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미학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근거를 두고 고도화해 왔습니다. 결국 미의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없는가가 논쟁의 주축이 됩니다. 어느 쪽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 그 기준이 있다면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힘들며, 그 기준이 없다면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게 됩니다. 화가의 그림이건 화장실 낙서건 동일할 수도 있게 되어 버리니까요. 20세기 들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건 참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되기 쉬운 개념입니다만)의 등장으로 절대이념이 거부되어 버린 요즈음입니다만,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대신 진정한 가치가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버려 오히려 혼란스러워진 세대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신학도인 저로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 신을 저버린 인간이 가게 되는 당연한 길이라고 봅니다만서도.
· 진중권은 확실히 글을 잘 씁니다. 이 감상에서는 내용을 대강 훑어 정리하느라 말이 딱딱합니다만 책을 보시면 쉽게 읽힘을 느끼실 겁니다. 위에서 적은 내용들을 좀 더 쉽고 세세하게 알아 보고 싶으신 분은 책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 동시에, 이 책을 읽으면, 이 사람을 왜 일각에서는 욕하는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이 재미있는 데에는 희화화 (戱畵化)가 한 몫하고 있습니다. 헤겔 설명할 때 "헤겔의 머리 속에서." 라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온 데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설명하면서 한 마디 툭 던지는 게 꼭 있습니다. 재미있다면 재미있긴 한데 어찌 보면 빈정거리는 투로 읽힐 수 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기분이 거슬릴 수도 있겠습니다.
· 책을 읽다 보면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서 왜 머리는 옆에서, 상체는 앞에서, 다리는 둘 다 발이 옆으로 보이게 그려졌는가, 혹은 그림 등에서 원근법의 의도적인 무시는 왜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현상보다, '실제로 어떠한가'- 즉 본질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말하자면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게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므로 '눈에 속지 말라'는 소리가 되겠습니다. 물론 이집트 그림의 경우는 그보다는, 그들에게 육체의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육체의 형태를 남기는 그림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 중간에 신의 존재에 대한 아퀴나스의 논리적 증명에 대한 진중권의 반박이 있습니다. 아퀴나스의 증명부터 말하면 이렇게 소개됩니다.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먹은 음식에서. 그 음식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태양에서. 태양의 에너지는? 이렇게 계속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있어야 한다. 그 끝에 있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172p) 진중권은 이 증명을 그리 똑똑한 생각이 못 된다고 말합니다. 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 생각 역시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닙니다. 진중권은 신을 창조한 위대한 존재에 대한 히브리 고대 문서에서 'DNLDDCK'를 말하지만, 그렇다면 그 'DNLDDCK'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끝이 없습니다. 신을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또 그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무한반복)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야 하냐고 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성경전서 한글 개역판, 출애굽기 3장 14절 중에서)" 혹은, "나는 곧 나다. (공동번역성서, 수록위치 상동)" (KJV나 NIV의 성경에는 "I am who I AM."이라고 되어 있으며,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은 70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실력이나 헬라어 실력이 딸려서 원서는 못 읽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신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스스로 있을 수가 있어? 라는 질문에는 '자연이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지 않나?'고 답해보겠습니다.
·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장미의 이름>의 스포일러를 무지막지하게 터뜨립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를 본받아 나도 앞으로는 부담 없이 감상에서 스포일러를 터뜨려야지··· 가 아니고, 여기에서는 '웃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해학과 위트. (진중권이라기보다 호르헤가) "예수 그리스도는 웃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이게 중세로부터 현대까지 좀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워낙에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그런 게 많다보니) 저는 실제로 예수님은 웃음이 없으신 분이 아니며 오히려 온화하고 웃음이 있는 분이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우선 마가복음 9장 36-37절을 보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 또 마태복음 18장 2절-5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거기에 더해 누가복음 9장 47-48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
물론 이 이야기 자체는 제자들이 '우리 중에 누가 더 크냐'는 세상적인 다툼을 하고 있기에 깨우침을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안았다고 한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 봅시다. 지금이라도 주변을 한 번 살펴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뚝뚝하고 웃음 없는 사람이 아이를 곁에 두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 앞에서는 급방긋을 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즐거이 오지 않아요. 별로 안 내켜하는 아이라도 억지로 가까이 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심지어 안았다고 하는 구절을 볼 때 아이가 기뻐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얼굴이 굳어진 아이를 들어 올리면서 마찬가지로 딱딱한 얼굴의 예수님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라고 말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게 무슨 코미딥니까.
물론 이런 종류의 웃음이 호르헤가 두려워했던 웃음과 전적으로 동일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만, 워낙에 '웃는 예수님의 그림'을 찾아보기 힘들고 워낙 '고난 받는 예수님' '기도하는 예수님' '진지한 예수님'만 보여서 '예수님은 딱딱한 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이참에 한 번 떠벌여 봤습니다. 여하간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던 것만은 확실한데,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이 만져주시고 기도해주시길 바라서 데려오는 걸 제자들이 꾸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시고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15절, 마가복음 10장 13절-16절, 누가복음 18장 15-17절)
딴 건 배우는 입장이라 책에서 읽는 내용만 간추려 말하기도 벅차지만 신학에 대해서만큼은 태클을 걸어본 Neissy였습니다. (...)
진중권 지음/휴머니스트
카방글이 추천해주어서 읽게 된 책입니다. 진중권이라는 사람이 왜 유명한지 알게 될 거라고 했는데, 읽어 보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물론 이걸 읽기 전에도 요즘 시끌시끌한 사태가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죠) 이 사람, 자신이 알고 있는 개념을 다른 사람에게 쉽게 풀어 설명하고 논지를 전개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이 있습니다. '쉽게'라는 점이 중요한데, 기본적으로 쉽게 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전제 위에 성립합니다. 잘 모르면 말을 어렵게 하기 마련이죠. 물론 잘 알면서도 어휘나 개념 상의 문제로 원체 어렵게 되는 경우도 있긴 합니다만 어쨌거나 이 책은 매우 쉽게 읽힙니다.
쉽게 읽히는 이유로 몇 가지를 들어볼 수 있겠습니다만 일단 충분한 사진 자료를 첨부하여 보여 주며 설명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시각 자료의 효용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바죠.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으로는 어투가 구어체에 가깝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건 이렇다. 이것이 요러저러하고 이러저러하니까 그런 거다. 저건 저런 거니 말이다.' 식의 문체라는 겁니다. 심지어 그걸로도 모자라, 한 가지 개념이 지나가고 나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서로 대화를 하는 대본을 보여 주는 식으로 최종 정리를 또 한 번 해 줍니다. 이러니 어렵기가 어렵죠.
전부 3권인데 현재 다 읽은 건 1권뿐인 고로 1권에 대해서만 말해 보겠습니다. (어제 빌려서 세 시간만에 다 읽었습니다. 어렵지 않아요) 이 책에서는 원시 예술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예술이 어떻게 성장해왔으며 미학의 개념이 어떻게 정립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간추려 정리해 보면 이런 내용들입니다.
중요한 테마가 되는 것은 역시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인데, 플라톤은 이 세계 너머에 피안 (彼岸)의 세계, 이데아 (idea)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우리의 세계는 그 그림자에 불과하며, 예술은 그 이데아의 그림자를 쫓아 진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주의에 따르면 예술은 분명해야 하고 완전을 지향해야 하며 정확한 척도와 비례를 따라야 합니다. 추상화가 이런 것에 근거를 두고 미학적으로 기능하죠.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데아보다 이 세계를 중시하여, 이 세계가 한낱 그림자가 아니라 진리가 녹아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플라톤이 가상 -거짓, 눈속임, 왜곡-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던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예술이 그 자체로 '미'를 추구하는 것은 현대적인 관점이며, 당시뿐 아니라 불과 수백 년 전까지도 예술은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정립된 저 두 가지 사상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반복해 교차되어 예술의 세태를 주도합니다. 중세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플로티노스를 알 필요가 있는데, 이 사람은 신플라톤주의자입니다. 다만 플라톤과 달랐던 점은 플라톤처럼 이데아와 현실 세계를 레테의 강 (망각의 강, 이데아에 있던 우리들이 현실로 넘어오며 이데아를 잊게 만드는 원인)으로 갈라졌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이데아의 빛이 현실로 유출되어 나오고 우리가 그 빛을 따라 올라가면 이데아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적으로 해석되면 진리를 찾음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나타날 수 있는데, 즉 신이야말로 모든 미의 근원이며 우리가 보는 이 세상은 그 미가 나뉘어진 것이고, 이 세상의 미를 찾아 올라감으로 신의 미에까지 올라가는- 구원에 이르를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세 미학에 적용되어, 중세에서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재현보다 그 너머 진리를 표현하려 하게 되었고, 자연의 모방이라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나 색채가 자유롭게 구성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13세기부터는 고딕 예술이 나타나기 시작해, 기독교 이상주의의 '진리를 추구하는 예술'이라는 범주 안에서 자연주의를 추구합니다. 물질세계를 무시하기보다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장으로 보는 것이지요. 기실 기독교에서, 일반법칙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을 주의 깊게 보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것은 이러한 견해를 바탕으로 두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신이 지으신 세계를 묘사함은 창조의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뜻이 됩니다.
이후 15세기부터의 르네상스에서 유명한 두 명의 예술가를 대라면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다 빈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향에 따라 합리적인 규칙에 따른 예술을 실천했고, 미켈란젤로는 플라톤의 경향처럼 진리와 영감을 중시했습니다. 17세기의 예술은 바로크 예술이라 하는데, 바로크는 어느 쪽이냐면 플라톤 쪽이라 '현상'과 '감성'을 중시합니다. 이 책에서는 루벤스의 그림을 예로 들며 바로크 예술의 회화적 성향과 역동성, 깊이, 열린 형식, 불명료성 등을 설명합니다. 이 시기 이에 대비되는 것이 고전주의파인 푸생인데, 이 경우는 예술은 진리를 표현해야 한다는 신념 그대로 회화가 '이성'을 중시하며 고요하고 정적입니다.
18세기에 이르러 독일의 철학자 알렉산더 바움가르텐이 미학 (aesthetica)라는 말을 만들어내고, 그 때까지 예술이 '진리에 이르는 이성적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비로소 감성의 작업으로 규정됩니다. 단, 바움가르텐은 감성을 이성 내에 있는 하나의 감성적 인식으로 봄으로써, 이것이 이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는데 여전히 예술을 인식으로 간주한다는 겁니다. 따라서 칸트에 이르면 드디어 미가 인식이 아니라 쾌감이며, 논리와 이성의 산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유희가 됩니다. 미는 누구에게나 분명한 개념이 아니고 각자마다 다를 수 있는 느낌입니다.
칸트 철학을 계승한 19세기의 철학자로 헤겔이 있는데, 이 사람은 태초에 이념/절대자가 있었고, 그 이념/절대자가 자신을 투사하여 자연을 만들고, 자연에서 인간이라는 정신이 다시 탄생하여 그 인간의 정신이 발전하여 자연이 이념/절대자의 다른 모습이며 이 모든 것이 절대자가 자신을 인식하는 과정을 깨닫게 되면 비로소, 자연이 되었던 이념/절대자가 원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저런 사상에 바탕을 두고 '바깥 세계로부터 인간 내면의 정신 세계로 옮아가는' 것으로 예술을 보았는데, 예술의 발전인 건축 → 조각 → 회화 → 음악 → 시 등을 보면 점차 물질 세계에 대한 의존도가 줄어들고 정신 세계 쪽으로 옮아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진리에 이르는 길이 헤겔의 예술관이며, 이 예술은 종국에는 종교에 자리를 내 주고 종교는 다시 철학에 자리를 내 주어서 세계의 역사를 완성에 다다르게 한다고 본 것입니다. "헤겔의 머리 속에서" (219p) 말이죠.
줄기가 어떻게 진행되어 왔는지를 설명하려다 보니 내용이 길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쉽게 썼다고 했지만 그렇게 잘 쓴 것 같지는 않군요. 여하간 저게 제가 이해한 내용입니다. 요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미학은 서로 다른 두 가지 근거를 두고 고도화해 왔습니다. 결국 미의 객관적 기준이 있는가 없는가가 논쟁의 주축이 됩니다. 어느 쪽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이, 그 기준이 있다면 사람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 다른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질문에 답하기 힘들며, 그 기준이 없다면 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어렵게 됩니다. 화가의 그림이건 화장실 낙서건 동일할 수도 있게 되어 버리니까요. 20세기 들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건 참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되기 쉬운 개념입니다만)의 등장으로 절대이념이 거부되어 버린 요즈음입니다만, 모두를 존중할 수 있는 대신 진정한 가치가 존재할 수 없게 되어 버려 오히려 혼란스러워진 세대가 아닐까도 싶습니다. 신학도인 저로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결국 신을 저버린 인간이 가게 되는 당연한 길이라고 봅니다만서도.
· 진중권은 확실히 글을 잘 씁니다. 이 감상에서는 내용을 대강 훑어 정리하느라 말이 딱딱합니다만 책을 보시면 쉽게 읽힘을 느끼실 겁니다. 위에서 적은 내용들을 좀 더 쉽고 세세하게 알아 보고 싶으신 분은 책을 한 번 읽어 보십시오.
· 동시에, 이 책을 읽으면, 이 사람을 왜 일각에서는 욕하는지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글이 재미있는 데에는 희화화 (戱畵化)가 한 몫하고 있습니다. 헤겔 설명할 때 "헤겔의 머리 속에서." 라는 문장을 그대로 옮겨 온 데서 짐작하실 수 있겠지만 설명하면서 한 마디 툭 던지는 게 꼭 있습니다. 재미있다면 재미있긴 한데 어찌 보면 빈정거리는 투로 읽힐 수 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기분이 거슬릴 수도 있겠습니다.
· 책을 읽다 보면 고대 이집트의 그림에서 왜 머리는 옆에서, 상체는 앞에서, 다리는 둘 다 발이 옆으로 보이게 그려졌는가, 혹은 그림 등에서 원근법의 의도적인 무시는 왜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즉 현상보다, '실제로 어떠한가'- 즉 본질을 중시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말하자면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인다고 해서 그게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은 아니므로 '눈에 속지 말라'는 소리가 되겠습니다. 물론 이집트 그림의 경우는 그보다는, 그들에게 육체의 부활 신앙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온전한 모습으로 육체의 형태를 남기는 그림의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만.
· 중간에 신의 존재에 대한 아퀴나스의 논리적 증명에 대한 진중권의 반박이 있습니다. 아퀴나스의 증명부터 말하면 이렇게 소개됩니다. "내 몸을 움직이는 에너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내가 먹은 음식에서. 그 음식에 들어 있는 에너지는? 태양에서. 태양의 에너지는? 이렇게 계속 나가다보면 언젠가는 끝이 있어야 한다. 그 끝에 있는 존재가 바로 신이다" (172p) 진중권은 이 증명을 그리 똑똑한 생각이 못 된다고 말합니다. 신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 생각 역시 그리 현명한 생각은 아닙니다. 진중권은 신을 창조한 위대한 존재에 대한 히브리 고대 문서에서 'DNLDDCK'를 말하지만, 그렇다면 그 'DNLDDCK'는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끝이 없습니다. 신을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창조한 존재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또 그 존재를 창조한 존재를··· (무한반복)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봅시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당신이 누구라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해야 하냐고 물을 때 여호와 하나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성경전서 한글 개역판, 출애굽기 3장 14절 중에서)" 혹은, "나는 곧 나다. (공동번역성서, 수록위치 상동)" (KJV나 NIV의 성경에는 "I am who I AM."이라고 되어 있으며, 스스로 있는 자라는 표현은 70인역 (히브리어 성경의 헬라어 번역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히브리어 실력이나 헬라어 실력이 딸려서 원서는 못 읽었습니다) 아니, 아무리 신이라도 그렇지 어떻게 스스로 있을 수가 있어? 라는 질문에는 '자연이 스스로 생겨났다는 것보다는 설득력 있지 않나?'고 답해보겠습니다.
· 이 책에서는 놀랍게도 <장미의 이름>의 스포일러를 무지막지하게 터뜨립니다. 아니 이럴 수가. 이를 본받아 나도 앞으로는 부담 없이 감상에서 스포일러를 터뜨려야지··· 가 아니고, 여기에서는 '웃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해학과 위트. (진중권이라기보다 호르헤가) "예수 그리스도는 웃지 않으셨다"고 하는데, 이게 중세로부터 현대까지 좀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워낙에 예수님을 그린 그림이 그런 게 많다보니) 저는 실제로 예수님은 웃음이 없으신 분이 아니며 오히려 온화하고 웃음이 있는 분이었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우선 마가복음 9장 36-37절을 보면,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 또 마태복음 18장 2절-5절을 보면, "···예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거기에 더해 누가복음 9장 47-48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
물론 이 이야기 자체는 제자들이 '우리 중에 누가 더 크냐'는 세상적인 다툼을 하고 있기에 깨우침을 주시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만,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또한 누가복음에서는) 안았다고 한 부분을 주의 깊게 살펴 봅시다. 지금이라도 주변을 한 번 살펴 보시면 아시겠지만 무뚝뚝하고 웃음 없는 사람이 아이를 곁에 두는 일은 없습니다. 게다가 설령 다른 사람 앞에서는 그런 사람이라고 해도 아이 앞에서는 급방긋을 하게 됩니다. 안 그러면 아이가 즐거이 오지 않아요. 별로 안 내켜하는 아이라도 억지로 가까이 오게 할 수는 있겠지만, 심지어 안았다고 하는 구절을 볼 때 아이가 기뻐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얼굴이 굳어진 아이를 들어 올리면서 마찬가지로 딱딱한 얼굴의 예수님이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이라고 말했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게 무슨 코미딥니까.
물론 이런 종류의 웃음이 호르헤가 두려워했던 웃음과 전적으로 동일하다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만, 워낙에 '웃는 예수님의 그림'을 찾아보기 힘들고 워낙 '고난 받는 예수님' '기도하는 예수님' '진지한 예수님'만 보여서 '예수님은 딱딱한 분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아 이참에 한 번 떠벌여 봤습니다. 여하간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셨던 것만은 확실한데, 신약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사람들이 아이들을 예수님이 만져주시고 기도해주시길 바라서 데려오는 걸 제자들이 꾸짖었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시고 아이들을 축복하셨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19장 13-15절, 마가복음 10장 13절-16절, 누가복음 18장 15-17절)
딴 건 배우는 입장이라 책에서 읽는 내용만 간추려 말하기도 벅차지만 신학에 대해서만큼은 태클을 걸어본 Neissy였습니다. (...)